오웬(Clement. C. Owen:오기원)의 생애와 호남선교
본 자료는 4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해당 자료는 4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4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오웬(Clement. C. Owen:오기원)의 생애와 호남선교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오웬(Clement C. Owen, 오기원)
1. 생애
2. 사역
3. 성과
Ⅲ.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양림동에 묻힌 22명의 미국인』, 33
Ⅲ. 결론
오웬은 복음을 전하고 병든 자를 헌신적으로 돌보다가 과로와 급성폐렴으로 쓰러졌습니다. 그 역시 양림산 언덕에 묻혔는데 그가 그곳에 묻힌 최초의 선교사가 되었다.
그는 1867년에 태어나 마흔 두 해 짧은 인생, 가장 건강하고 황금 같은 시기를 조선에서 보내고 이 땅의 사람들을 섬기다 갔다. 그가 처음 조선에 왔을 때 목포의 유달산을 바라보면서 ‘저 산에서 교회 종소리가 언제나 울려 퍼질까’하고 기도했었다. 그런데 그의 기도는 응답되었고 화순, 보성, 장흥, 구례, 여수, 순천, 광양에 이르도록 교회 종소리가 가득하게 되었다. 부인 파이팅 선교사는 남편이 죽고 난후 미국에 들렀다가 다시 딸 네 명을 데리고 한국에 돌아와 계속 광주에서 네 딸을 키우면서 선교사역을 감당했다. 그녀는 1920년 안식년을 얻어 미국에 갈 때까지 신입 선교사 정착을 도우며 언어분과에서 조선어를 가르쳤다. 그녀는 무디 학생 신앙 운동(SVM)출신으로 같은 신앙배경을 가진 쉐핑 선교사의 복음에 대한 열정과 사역을 보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오기원선교사는 자기 자신보다 선교지 조선을 더 사랑했습니다. 광주 선교의 역사는 바로 이런 희생을 바탕으로 쓰여졌다.
광주 남구 양림동 호남신학대학 내의 묘지에는 오웬 선교사를 비롯하여 23인의 선교사가 이 땅의 어둠을 밝히기 위해 헌신하다가 풍토병 등으로 이곳에 잠들어 있다. 그리고 기독병원 간호전문대학 안에 있는 오웬기념각(광주유형문화재26호)은 오웬선교사와 그의 할아버지 윌리암(William)을 기념하기 위하여 미국 친지들이 보내 준 돈으로 1914년 건립되었다. 오웬선교사의 뒤를 이은 쉐핑(서서평) 선교사가 이 건물에서 조선 최초의 여자신학교인 이일 성경학교를 시작했고 간호인을 양성하는 전문학교를 설립하는 등 이곳은 한국 의료선교역사의 큰 꿈이 시작된 요람이기도 하다. 그 건물을 지금은 기독간호대학교 강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당시 사람들은 오웬을 ‘오 목사’라 불렀고, 그의 묘비에도 ‘님’이란 존칭 없이 ‘吳牧師’라고만 새겨져있다. 이처럼 그는 인생의 황금기에 조선에 와서 이 땅 백성들에게 친숙하고 가깝게 다가서며 예수의 좋은 친구가 되어 섬기다 마흔 두 해라는 너무나 짧은 인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는 아름답고 근면 성실한 삶으로 각인 되고 있다.
호남지방에서 활동했던 남장로교 선교사만 해도 무려 450인이었다. 복음 선교, 의료선교, 교육선교, 문서선교, 문맹퇴치, 구제 등 이들이 행했던 아름다운 일들을 일일이 열거하기가 어렵다. 지금 호남지방이 이처럼 아름답게 된 것은 이들을 통해 복음의 물이 흘렀기 때문이요 복음에서 나오는 아름다운 열매들이 이 땅을 흘렀기 때문이다. 여기에 일일이 기록되지 못한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활동내역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들은 대체로 미국에서 좋은 교육을 받고 이 땅에 들어온 고급 인력들이요 빼어난 하나님의 종들이었다. 법관직을 포기하고, 의사로서의 안정된 삶을 포기하고, 몇 달씩 걸리는 배를 타고 이 땅에 들어왔던 이들 선교사들이 겪었던 고난, 그것은 실로 위대한 고난이었다. 이들 450명의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호남지역에서 이루었던 그 일들은 실로 위대한 일이었다. 이들의 수고와 헌신을 읽고 정리하면서 문득 사도바울의 복음을 위한 고난의 목록들이 생각난다.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복음을 위해 그가 어떤 고난을 당했는가?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고후11:23-27).”
오기원선교사의 일생을 연구하며 느낀 것은 호남지역 선교사들에 대한 연구나 자료가 많이 없다는 것에 아쉬움이 많았다. 자신들의 목숨을 버리면서 까지 복음증거에 헌신했던 그들의 발자취가 아무렇게나 방치 소재열, 정해송의 저서와 안영로의 연구를 주로 참고하였다.
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기존의 호남지방 교회사에 대한 문제점을 살펴보고 앞으로의 방향을 이야기함으로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호남지방 교회사 연구에 대한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안대희, 『1893~1945년 全州西門外敎會의 成長過程과 民族運動』, 『지방사와 지방문화』제5권, 역사문화학회, 2002, 218~219쪽을 참고하여 정리하였다.
① 교회사를 연구하는 정립된 방법론이 없다.
② 기독교 성장의 배경으로서의 지방사회에 대한 설명이 미흡하다.
③ 객관적 입장보다는 호교론적인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다.
④ 한국교회사는 선교사 중심의 '선교사'가 아닌 한국인 신도 중심의 '한국교회사'가 되어야 한다.
앞으로 호남 지방 기독교에 대한 연구는 선교사들에 관한 부분과 선교사시대 이후 한국인 지도자들에 대한 연구와 호남 지방 각 지역의 기독교사에 대한 연구 또한 필요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독교인 사학자 뿐 아니라 일반 사학자들의 객관적인 연구 또한 시급하다.
참고문헌
김수진 한인수, 『한국기독교회사: 호남편』, 1979.
김수진, 『광주초대교회사연구: 광주제일교회와 양림교회를 중심으로』 (호남기독교회사연구회, 1994)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연세대학교출판부, 2000)
소재열, 『호남 선교이야기』, (말씀사역, 2004)
신재의, 김권정, 조이제, 한국 기독교와 초기 의료선교 (서울: 한국기독교역사 문화연구소, 2007)
안대희, 『1893~1945년 全州西門外敎會의 成長過程과 民族運動』, 『지방사와 지방문화』 제5권, (역사문화학회, 2002)
애너벨 메이저 니스벳한인수 역, 『호남선교초기역사(1892-1919)』, (서울:도서출판경건, 1998)
차종순, 『양림동에 묻힌 22명의 미국인』 (광주: 삼화문화사, 2000)
차종순, 『호남교회사 연구』 1권
호남신학대학교편, 『신학이해 12집』 (광주: 글벗출판사, 1994)
  • 가격3,000
  • 페이지수13페이지
  • 등록일2017.04.04
  • 저작시기2016.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1023077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