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머리말
Ⅱ. 천주교의 여성관
Ⅲ. 양반 여성과 천주교의 만남
Ⅱ. 천주교의 여성관
Ⅲ. 양반 여성과 천주교의 만남
본문내용
거리가 먼 삶을 살았고, 가정형편도 곤궁했다. 여흥 부대부인 민씨가 시집을 가면서 여흥 부대부인 민씨의 삶은 어린 시절과 정반대가 되면서 여흥 부대부인 민씨가 무언가 기댈 수 있는 새로운 진리에 갈증을 느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상황이었다.
(2) 여흥 부대부인 민씨의 입교
여흥 부대부인 민씨(지금부터는 민씨라 칭하겠다.)는 세례를 받은 천주교 신자였다. 그리고 그의 남편인 흥선 대원군은 천주교 박해를 일으킨 장본인이었다. 한 사람은 천주교 신자이고, 한 사람은 박해를 일으킨 서로 이 극과 극으로 대립되는 이 두 사람이 부부라는 사실이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민씨가 천주교를 본격적으로 만난 것은 정확히 알 수없다. 다만 민씨에게 천주교를 전래해 준 사람은 박 마르타라는 사람이었다. 박 마르타는 민씨가 고종을 낳은 후에 유모로 있었던 사람이다.
이 당시를 칼레 신부 칼레신부는 프랑스에서 온 선교사이다. 칼레신부는 박해를 피해 조선 땅에 숨어있었는 데, 당시 칼레신부와 페롱 신부를 구출코자 로즈제독은 3척의 군함을 이끌고 인천 앞바다로 왔다고 한다. 이것이 병인양요(丙寅洋擾)이다. 칼레신부는 군함이 왔음을 알고 탈출할 길을 찾고자 했으나 군함을 만나지 못하고 따로 청국으로 피신하였다.
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대원군의 부인, 곧 임금의 어머니는 천주교를 알고, 교리 문답을 조금 배웠으며, 날마다 몇 가지 기도문을 외고, 자기 아들이 왕위에 오른 것에 대해 감사미사를 드려달라고 내게 청했다.”
이 당시에는 부대부인 민씨가 아직 세례를 받지는 않았다. 하지만 민씨가 당시 천주교에 얼마나 많이 의지했는 지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부대부인 민씨는 왜 천주교에 의지하였을까?
이 당시 민씨의 삶은 왕족의 삶이라고 할 수 없다. 이 당시의 민씨는 참혹한 한 삶을 살았다. 경제적으로 궁핍했다. 민씨는 끼니걱정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민씨는 이 문제보다 더 심각한 문제점이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유교적 사고에 대한 혼란이었고, 또 하나는 생명에 대한 위협이었다. 첫 째, 유교적 사고에 대한 혼란을 이야기하겠다. 이 당시에 민씨는 대원군의 행동에서 상당히 많은 혼란을 느꼈을 것이라 생각한다. 대원군은 왕족으로서, 양반으로서 행동을 하지않았다. 무릇 양반이란 점잖해야하며, 근엄해야했다. 하지만 대원군은 저잣거리의 무뢰배들과 다름 없는 행동을 했다. 또한 양반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대원군에게 손가락질을 했고, 무시하였다. 당시 민씨는 대원군을 보면서 자신이 이제껏 알고 있던, 유교적 행동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런데 민씨는 가정 내에서만은 유교적 체계였을 것이다. 모든 가정사를 민씨가 주도하였겠지만, 엄염히 대원군에게 종속되어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가정내와 가정 밖에서의 양립되는 이중적인 대원군의 모습에서 민씨는 어쩌면 혼란을 느꼈을 것이고, 무언가에 기대고 싶었을 것이다. 유교는 종교적인 색채가 많이 약해진 탓에 민씨는 유교를 제외한 다른 무언가에 기대야만 했고, 그것이 ‘天主敎’였다.
둘 째 생명에 대한 위협이다. 당시 조선왕조의 왕권은 미약해질 대로 미약해진 상태였다. 풍양조씨, 안동 김씨등 여러 세도가문에게 왕족들은 자신의 목숨이 언제 떨어질지 불안에 떨며 지내야 했다. 민씨 또한 민씨 자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들들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 철종의 후사가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자신의 아들(이명복)이 왕위에 오르기를 간절히 바랬을 것이다.
물론 민씨의 입교를 크게 이 두 가지 점으로 분류하고 있지만 민씨의 입교도 엄연히 그 근본에는 다른 천주교 여성신자와 마찬가지로 평등이라는 관점에 매혹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흥선대원군이 재야에 묻혀 파락호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시절 그의 아내인 민씨 부인은 고종을 낳은 뒤 박씨 부인을 유모로 두었다. 박씨 부인은 세례명이 마르타였고, 민씨 부인에게 천주교를 전해준바 있었다. 칼레 신부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대원군의 부인, 곧 임금의 어머니는 천주교를 알고, 교리 문답을 조금 배웠으며, 날마다 몇 가지 기도문을 외고, 자기 아들이 왕위에 오른 것에 대해 감사미사를 드려달라고 내게 청했다.” 이 때 물론 부대부인 민씨는 세례를 받지는 않았다.
1896년 10월 주교(主敎) 뮈텔로부터 영세를 받았다. 고종의 유모이며 같은 교우인 박(朴)마르타와 함께 프랑스인 주교 베르뇌를 통해 프랑스 정부의 도움으로 남진(南進)하려는 러시아 세력을 꺾으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2) 여흥 부대부인 민씨의 입교
여흥 부대부인 민씨(지금부터는 민씨라 칭하겠다.)는 세례를 받은 천주교 신자였다. 그리고 그의 남편인 흥선 대원군은 천주교 박해를 일으킨 장본인이었다. 한 사람은 천주교 신자이고, 한 사람은 박해를 일으킨 서로 이 극과 극으로 대립되는 이 두 사람이 부부라는 사실이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민씨가 천주교를 본격적으로 만난 것은 정확히 알 수없다. 다만 민씨에게 천주교를 전래해 준 사람은 박 마르타라는 사람이었다. 박 마르타는 민씨가 고종을 낳은 후에 유모로 있었던 사람이다.
이 당시를 칼레 신부 칼레신부는 프랑스에서 온 선교사이다. 칼레신부는 박해를 피해 조선 땅에 숨어있었는 데, 당시 칼레신부와 페롱 신부를 구출코자 로즈제독은 3척의 군함을 이끌고 인천 앞바다로 왔다고 한다. 이것이 병인양요(丙寅洋擾)이다. 칼레신부는 군함이 왔음을 알고 탈출할 길을 찾고자 했으나 군함을 만나지 못하고 따로 청국으로 피신하였다.
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대원군의 부인, 곧 임금의 어머니는 천주교를 알고, 교리 문답을 조금 배웠으며, 날마다 몇 가지 기도문을 외고, 자기 아들이 왕위에 오른 것에 대해 감사미사를 드려달라고 내게 청했다.”
이 당시에는 부대부인 민씨가 아직 세례를 받지는 않았다. 하지만 민씨가 당시 천주교에 얼마나 많이 의지했는 지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부대부인 민씨는 왜 천주교에 의지하였을까?
이 당시 민씨의 삶은 왕족의 삶이라고 할 수 없다. 이 당시의 민씨는 참혹한 한 삶을 살았다. 경제적으로 궁핍했다. 민씨는 끼니걱정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민씨는 이 문제보다 더 심각한 문제점이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유교적 사고에 대한 혼란이었고, 또 하나는 생명에 대한 위협이었다. 첫 째, 유교적 사고에 대한 혼란을 이야기하겠다. 이 당시에 민씨는 대원군의 행동에서 상당히 많은 혼란을 느꼈을 것이라 생각한다. 대원군은 왕족으로서, 양반으로서 행동을 하지않았다. 무릇 양반이란 점잖해야하며, 근엄해야했다. 하지만 대원군은 저잣거리의 무뢰배들과 다름 없는 행동을 했다. 또한 양반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대원군에게 손가락질을 했고, 무시하였다. 당시 민씨는 대원군을 보면서 자신이 이제껏 알고 있던, 유교적 행동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런데 민씨는 가정 내에서만은 유교적 체계였을 것이다. 모든 가정사를 민씨가 주도하였겠지만, 엄염히 대원군에게 종속되어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가정내와 가정 밖에서의 양립되는 이중적인 대원군의 모습에서 민씨는 어쩌면 혼란을 느꼈을 것이고, 무언가에 기대고 싶었을 것이다. 유교는 종교적인 색채가 많이 약해진 탓에 민씨는 유교를 제외한 다른 무언가에 기대야만 했고, 그것이 ‘天主敎’였다.
둘 째 생명에 대한 위협이다. 당시 조선왕조의 왕권은 미약해질 대로 미약해진 상태였다. 풍양조씨, 안동 김씨등 여러 세도가문에게 왕족들은 자신의 목숨이 언제 떨어질지 불안에 떨며 지내야 했다. 민씨 또한 민씨 자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들들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 철종의 후사가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자신의 아들(이명복)이 왕위에 오르기를 간절히 바랬을 것이다.
물론 민씨의 입교를 크게 이 두 가지 점으로 분류하고 있지만 민씨의 입교도 엄연히 그 근본에는 다른 천주교 여성신자와 마찬가지로 평등이라는 관점에 매혹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흥선대원군이 재야에 묻혀 파락호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시절 그의 아내인 민씨 부인은 고종을 낳은 뒤 박씨 부인을 유모로 두었다. 박씨 부인은 세례명이 마르타였고, 민씨 부인에게 천주교를 전해준바 있었다. 칼레 신부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대원군의 부인, 곧 임금의 어머니는 천주교를 알고, 교리 문답을 조금 배웠으며, 날마다 몇 가지 기도문을 외고, 자기 아들이 왕위에 오른 것에 대해 감사미사를 드려달라고 내게 청했다.” 이 때 물론 부대부인 민씨는 세례를 받지는 않았다.
1896년 10월 주교(主敎) 뮈텔로부터 영세를 받았다. 고종의 유모이며 같은 교우인 박(朴)마르타와 함께 프랑스인 주교 베르뇌를 통해 프랑스 정부의 도움으로 남진(南進)하려는 러시아 세력을 꺾으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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