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의 성장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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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 경제의 성장요인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한국경제의 개관

Ⅲ. 1960년대의 한국경제의 성장과정
1. 1950년 말의 현국경제의 실태
2. 1960년대의 한국경제
1) 성장의 시작
2) 대외지향적 정책의 결과
3) 고도성장의 요인과 환경

Ⅳ. 1970년대의 한국경제의 성장요인
1. 1970년대의 성장 전략
2. 1970년대의 중화학공업화
3. 1970년대의 정부정책
4. 노동통제와 생활환경

Ⅳ. 결론

본문내용

노동자가 해외로 진출함에 따라 국내 노동자의 임금은 상승하였다. 왜냐하면 이미 국내에서도 중화학 공업의 발전과 더불어 숙련된 노동자에 대한 수요가 급증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이 기간에 노동 시장에서 숙련 노동자들과 비숙련 노동자들 간의 임금 차별이 심해졌다. 여기에다, 중동에서 보내오는 많은 송금액은 국내 통화 공급을 확대시켰고, 이것이 인플레이션을 자극하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도시 근로자와 농촌 근로자 사이의 소득 불균형을 개선시키고, 농촌 지역의 생산성과 생활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하여, 정부는 \'새마을 운동\'이라는 자립 운동을 전개하고, 곡물 가격 안정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한국은 성공적으로 곡물의 생산과 농촌의 소득을 늘리고, 생활 수준의 불균형을 줄여갈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곡물 가격 안정은 정부에게 막대한 비용을 지불하도록 하였고, 재정 적자와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졌다.
그렇지만, 1970년대 정책의 전환은 인상적인 결과를 이룩할 수 있었다: 1972년과 1978년 사이에 GNP는 연평균 10.8% 성장하였고, 특히 1976-78년의 성장률은 11.2%에 달하였다. 총수출에서 중화학 공업이 차지하는 비율은 1972년 21.3%에서 1978년 34.7%로 올라갔다. 그렇지만, 이 대가로 한국은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경험하였다. 도매 물가 지수는 1972-79년에 매년 거의 18%에 달했고, 1962-71년의 12%와 비교해도 매우 높은 수준이었다. 덧붙여, 한국의 산업 구조는 중화학 공업에 대한 투자 과잉과 경공업에 대한 투자 부족으로 왜곡되었다. 동시에, 실질 임금의 상승이 생산성의 향상보다 더 빠르게 전개되었고, 이는 수출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2. 1970년대의 중화학공업화
1960년대까지의 경공업을 중심으로 하는 수출주도 공업화로부터 우리 경제가 한 단계 도약하는 것은 1970년대의 중화학공업화에 의해서이다. 정부는 1973년에 중화학공업화선언을 발표하고 본격적인 중화학공업화에 나서게 되었다. 이 이전에도 포항제철의 건설과 같은 중화학공업의 육성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여러 중화학산업 분야에 걸친 공업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이때부터이다.
이렇게 중화학공업화가 추진된 배경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로 경공업제품의 수출만으로는 수출이 한계에 직면하였다. 둘째로 경공업제품의 생산에 필요한 생산재를 외국에서 수입함으로써 국제수지가 만성적인 적자를 누적하고 있는 구조를 탈피할 필요가 있었다. 셋째로 미군이 철수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속에서 자주국방을 위해 무기생산 즉 방위산업에 나서게 되었다. 넷째로 국제분업구조가 변화하는 가운데 선진국이 경쟁력을 상실하고 있는 분야가 발생하고 여기에 한국이 끼어 들 여지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정부주도 공업화에 참가하지 못하면 정부로부터 제공되는 특혜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므로 기업들은 소극적이건 적극적이건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 얼마나 잘 적응하느냐에 따라 대기업구조의 재편이 이루어진 셈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중화학공업화 과정을 거쳐 재벌이 국민경제를 지배하는 재벌체제가 확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중화학공업의 추진을 위해 정부는 외국차관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내자금을 총동원하기 위해 국민투자기금을 설치하는 등 갖은 노력을 다하였다.
3. 1970년대의 정부정책
중화학공업화 정책 이외에 주목할 만한 정부정책들로서는 우선 8.3 조치를 지적할 수 있다. 1960년대에 차관을 도입한 기업들 중 다수가 부실기업화되고 이를 구제하기 위해 정부는 긴급조치로서 1972년 8월 3일 사채동결령을 발동하였다. 이에 의해 사채에 시달리던 기업들은 일시에 자금난으로부터 벗어나고 다시 성장의 궤도를 달리게 되었다.
그리고 정부는 공업화를 주도하기 위해 민간이 직접 담당하기 곤란한 분야에서는 스스로 공기업을 창출하였다. 즉 자금이 많이 소요되고, 공장을 건설해서 이익을 창출하는 데까지 오랜 기간이 걸리는 사업에 대해선 정부가 이를 직접 담당하고 그런 다음에 어느 정도 정상궤도에 오르면 민간에 불하하였다. 이 결과 재벌들은 손 안대고 코푸는 식으로 급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부가 기업을 지원함에 있어서는 재정정책을 통해서보다는 주로 금융정책이 이용되었다. 국유화된 은행이 자금공급의 주요 통로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 나라에서는 IMF사태에 이르기까지는 재정은 비교적 건전한 상태를 유지한 반면에 금융기관에는 부실이 누적되어 갔다고 할 수 있다.
4. 노동통제와 생활환경
정부는 압축적 공업화를 추진하기 위하여 분배보다는 성장을 앞세웠다. 그리하여 성장에 걸림돌이 되는 요소에 대해서는 폭력적으로 억압하였다. 5.16 이후에 노동운동 세력을 철저하게 탄압하였고 그후 노동자에 대해서는 병영적 통제가 이루어지도록 정부가 뒷받침하였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성장의 과실로부터 상대적으로 소외될 수밖에 없었고 1971년 청계천의 봉제공장에서 일하던 전태일의 분신자살 사건 같은 것은 그에 대한 불만의 당연한 표출이었다.
농민들은 농어촌고리채 정리와 생산력 향상으로 인해 이른바 보릿고개로부터는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농민들은 주로 자녀들을 공장의 노동력을 공급하는 원천을 제공하는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생활수준이 크게 향상되지는 않았다.
Ⅳ. 결론
60년대 이래 한국경제는 경제원조에 의존하지 않으면서 고도성장을 지속하였다는 것은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성장유형이 출현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1960년대는 한국경제의 질적 전환을 이룬 획기였고 1970년대는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룩하였다.
60~70년대 한국경제의 경제사적 의의는 고도성장을 달성하였다는 데에 그치지 않고 자력적인 성장기반을 구축하였다는 점에서도 구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60~70년대는 참된 의미의 근대성장이 개시되어 고도의 성장을 이룩하였던 것이다.
60~70년대의 고도성장은 강력한 국가와 효율적인 관료제와 국민적 일체감이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개발정책을 효과적으로 강력히 추진할 수 있었고, 해외의 자본과 기술과 결합할 인적 자산이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대외지향적 성장전략이 실효를 거둘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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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7.11.04
  • 저작시기20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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