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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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미학]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세상에 태어난 자의 숙명으로서의 자연.
2. 자연에 대한 도발.
3. 자연이 아닌 인간.
4. 고통 없는 삶의 모순.
5. 욕구를 넘어 욕망으로, 영원한 권태의 굴래.
6. 욕망, 죄의 선고를 받아야만 하는 것일까.
7. 신과 욕망.
8. ‘데우스 엑스 마키나’와 신.
9. 플롯의 바깥,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
10. ‘나’의 플롯을 짜기 위한 ‘데우스 엑스 마키나’ = 예술.
11. 꿈틀거리는 것이 아름답다.

본문내용

별개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러한 자연의 법칙에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려는 행위자체가 ‘인간’을 ‘인간’으로 만든다고 보았습니다. 그 의지란 자연의 약육강식이라는 잔혹한 법칙성을 넘어 인간의 법칙을 따로 두는 것입니다. 문제는 인간 자신의 자연적 속성을 간과하여 인간은 ‘자연의 약육강식’을 대신해 ‘인간의 양육강식’이라는 또 다른 자연을 만들어 냈다는 데에 있었습니다. 요즘 금수저와 흙수저 등의 말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는 조금만 생각해보면 자연에서의 ‘약육강식’의 법칙과 조금도 다를 게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이런 상황이라면 인간을 굳이 자연과 분리하여 생각할 이유가 하나도 없어집니다. 분리하더라도 그것은 자연을 인간 문명의 발전을 위한 수단적 도구로 이용하기 위함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이 상태에까지 도달하는 이상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물어야 할 것입니다. “가만, 나도 자연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나 자신도 도구로 이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왜냐하면, 그 속에는 인간과 자연의 명확한 분리랄게 없기 때문에 결국 자기 자신을 문명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해야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인간이 문명의 노예가 되는 순간이라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경제체계의 발달은 인간을 위해서 무엇이 좋은가라는 물음보다는 그 체계의 성장을 위해서 무엇이 좋은가라는 물음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 차경아역 까치 1996 p. 20
이기주의, 자기중심주의, 소유욕이 자리 잡지 못한 집단들은 원시적 집단으로, 그 구성원들은 자격미달의 미숙한 인물들로 비하되었다. 이 특성들은 산업사회를 구성하는 자연적 충동이 아니라 바로 사회적 제약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인정하려고 들지 않았다.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 차경아역 까치 1996 p. 21
그렇다면 이 약육강식이라는 세상의 플롯에서 벗어나는 것이 나의 욕망을 위한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플롯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먼저,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상황은 각자 개인마다 모두 다르며 그곳에서는 각자의 고유한 서사가 생겨납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서사를 무의식적으로나마 여러 형태로 표출하게 됩니다. 좋은 일은 기쁨을, 슬픈 일은 슬픔을 노래나, 시나, 소설이나, 그림으로 혹은 이야기로 혹은 또 다른 행동으로 표현하면서 새로운 ‘나’의 서사를 꾸려나가는 것입니다. 가령 누군가와 사랑에 빠져 혹은 이별 후에 노래방에서 어떤 노래를 부를지, 그리고 어떤 장면을 회상할지는 세상이 정해둔 플롯에 있는 것이 아닌 전적으로 나에게 있는 것이니까요. 그 속에서 나는 또 다른 나의 이야기를 만들게 됩니다. 그래서 저에게 예술이란, 자신의 고유한 서사를 표출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밝히는 모든 활동입니다. 유리관 속에 박제되어 있는 것만이 예술이라고 하기에는 그 누가 말하는 기준도 미흡하다고 생각합니다. 뒤샹이 변기를 갖고 ‘이것이 예술이다’를 주장했을 때, 불쾌함을 느낀 사람이 있었을지언정 명확한 반박은 할 수는 없었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하죠. 뒤샹은 세상이 정해둔 플롯을 어기며 자신만의 플롯을 보여주었습니다. 누군가가 변기를 예술 작품에 전시했다는 말 만큼은 분명 재미있는 이야기꺼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욕망은 나의 욕망이라 할지라도 영원히 성취될 수 없는 것들도 있습니다. 나는 생각보다 좋은 가정에 태어나지 못할 수 있으며, 좋은 외모를 갖추지 못 할 수 있고, 나는 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조건들은 노력으로 극복 가능한 것들도 있지만, 정말 어쩔 수 없는 것들도 있기 마련입니다. 여기서 오는 욕구를 비롯한 욕망의 영원한 빈곤은 자기 자신은 한편으로는 파멸로까지 잇는 것이기도 합니다. 단지 생존만을 욕구하지는 않는 인간을 특성상, 무엇인가가 영원히 좌절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다면, 그 고통을 일찍 끝내기 위해서라도 ‘죽음’을 택하고 싶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또 다른 양식으로 분출되는 것이 저는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술은 살기 위한 방편이자, 죽음과도 맞닿아 있는 것이 됩니다. 이런 저의 관점에서 예술은 자신 고유의 ‘존재’이자 ‘죽음’이자 ‘삶’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11. 꿈틀거리는 것이 아름답다.
김승옥씨의 『서울 1964년 겨울』에서 “김형, 꿈틀거리는 것을 사랑하십니까?”라는 대사가 나옵니다. 꿈틀거림은 누군가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는 몸짓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고통스럽게 꿈틀거리느니 왜 죽지 않느냐고 물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고통이 없어지는 삶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말입니다. 현대 사회는 고통의 제거를 꿈꿉니다. 언제나 편리하고 빠른 것이, 양질의 서비스와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것들이 사랑받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속에 꿈틀거림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치 생명이 없는 것을 바라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사람의 고유한 인생사는 그저 귀찮은 혹에 불과합니다.
칸트는 내면적 동기를 강조했지만, 저는 고려해야 할 것은 오로지 결과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꿈틀 거리며 자신의 존재를 내보이고자 하는 모든 것의 결과는 악한 결과와 선한 결과가 뒤섞인 것들입니다. 거기에 죄를 묻는다면, 그 사람의 동기를 탓할 것이 아니라,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으로 해결해야 할 것입니다. 좋은 동기였든, 나쁜 동기였든, 결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수 없음이 죄의 대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기꺼이 나의 욕망을 실현하고 이렇게 책임을 지는, 기꺼이 무의미한 꿈틀거림과 고통을 선택하는 시시포스의 굴러 떨어지는 돌일지언정 산 정상에 올리는 행동 모두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 생각합니다.
※참고 도서※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 차경아역 까치 1996
양귀자 『모순』 살림 1998
이상「권태」,『조선일보』,『조선일보』1937. 5. 4~11.
이상 「동경」, 『문장(文章)』1939.5.
진중권 『미학 에세이』 씨네북스 2013
김영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문학동네 2009 2판 6쇄
  • 가격1,600
  • 페이지수11페이지
  • 등록일2018.03.10
  • 저작시기2018.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1047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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