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안 성산산성 출토 목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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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함안 성산산성 출토 목간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함안과 성산산성
① 발굴현황
2) 출토 목간의 분류와 각 기능
① A형 목간
② B형 목간
③ 기타 목간
3) 목간의 제작연대 추정
Ⅲ. 결론

본문내용

에 모이고, 다시 그것이 상위의 집적단위 장소에서 합쳐져 함안의 성산산성으로 운송되었던 상황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마침 상류에서 하류로의 운송은 용이하며 운송속도 또한 빨랐을 것이므로 실제 물류에 소요되는 노력은 상당히 절약될 수 있었을 것이며 상류에서 하류로의 교통으로 생각된다.
장부상에는 상주의 해당지역이 상급 지방행정 단위를 거쳐 중앙에 조용조를 납부되고, 또 이것이 다시 하주의 신 편입 지역인 함안에 집중 세출된 것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하물 즉, 공진물(貢進物)은 상주 지역에서 중앙으로 왔다가 다시 지방으로 배송되는 과정이 생략되고, 직접 지역에서 지역으로 직송하는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하찰목간이 사용되던 시기는 낙동강을 이용한 물류시스템이 신라국가에 의해 윤활하게 기능되고 있었던 것이다. 낙동강은 기실, 가야의 정치-경제적 기반이었으며, 아마도 제국통합과 교통의 주요배경이기도 하였다. 특히 중류와 하류는 가야가 3세기 이래로 장악하여 교역의 이익을 얻고 있었다. 바로 가야가 국제무대에서 약진할 수 있었던 주요한 근거이기도 했었다. 낙동강 상류는 이미 빠르게는 5세기 후반, 늦더라도 6세기 초반에는 이미 신라에 편입되었다. 하류는 남가라(금관국) 및 탁순이 신라에 완전 편입되면서 6세기 전반에 신라에 장악되었다. 중류 도한 비사성(비자목)이 신라에 완전 제압되고부터는 가라나 다라의 낙동강 통제는 거의 유명무실화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540년대 『일본서기』에 의하면 「大江水」아마도 낙동강을 둘러싸고 안라와 신라는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제 낙동강은 상류에서 하류에 이르기까지 신라가 장악하게 된 것이다. 안라지역에 이와 같이 낙동강 상류지역으로부터 원거리 공진물 수송과 투입은 신라 국가체제의 하류를 이용한 효율적인 윤영에 그치지 않고, 말기 가야제국을 주도하였던 주축이었던 안라지역과 구 가야백성들에게 낙동강이 이제 완전히 신라에 의해 장악되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고도의 정치적 의미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성산산성 목간 90여점을 통해, 6세기 중엽 낙동강을 중심으로 하는 신라국가의 지방경영 및 지방의 사람과 물자의 장악, 물류·통신, 징세와 역역, 율령운용의 단명, 호적작성, 문자를 사용한 문서 행정 등을 구체적으로 엿볼 수 있다.
참고자료
♨ 윤선태「함안 성산산성 출토 신라대간의 용도」 진단학회 1999
♨ 이용현『한국목간기초연구』신서원 2006
  • 가격1,000
  • 페이지수6페이지
  • 등록일2018.04.02
  • 저작시기2018.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105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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