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기독교사] 마태오리치의 전례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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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아시아 기독교사] 마태오리치의 전례논쟁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문을 열며
2. 마테오리치의 생애
3. 마테오리치의 선교
4. 전례논쟁
5. 마치며

본문내용

령을 내린다. 이 사건으로 선교사들은 분열되었다. 하지만 예수회는 포기하지 않았고 끊임없이 교황에게 탄원을 요구했다. 강희제도 1711년, 제사 금지 명령 철회를 위해 사절을 파견한다.
그러나 교황청은 신앙전파를 방해하는 불일치를 제거하기 위한 고민을 하고 있었고, 그것을 위한 첫 단추로 어떻게든 논쟁을 종식시켜야 했다. 그래서 1715년 3월 19일, 예수회의 탄원을 거부하고 투르농의 명령을 추인하는 강경한 금지 명령을 『그날들』(Ex illa die)라는 교황령에 담는다. 강희제는 여기에 다시 분노, 1717년에 “그리스도교의 신 개념과 중국인의 신 개념 사이에 차이가 없으며 전통적 전례를 단죄하는 것은 무식한 짓”이라 말하며 그리스도교를 금하는 칙령을 내린다. 이 칙령으로 그리스도교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관리들이 박해를 시작하였으며 그로 인해 중국 선교가 파국으로 치달았다. 상황이 여기에 이르자 교황은 중국 교회를 위해 1719년에 특사로 메차바르바를 파견해 칙서의 범위 안에서 전례를 허용하는 8개조항을 전달한다. 이 조치로 논쟁은 다시금 불거졌고, 논쟁의 종식은 모호해졌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1742년, 그해 7월 11일에 교황 베네딕토 14세가 『각 경우에 따라서』(Ex quo singula)라는 교황령을 선포, 메차바르바의 허용안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배격하고 클레멘스의 1715년 훈령 『그날들』의 내용을 포괄해, 중국 의례 금지를 금지하고 그 논쟁까지 금하는 강경한 조취를 취함으로 논쟁은 종식되었다. 그러나 예수회는 여전히 자신들의 선교를 고수하기 위해 노력했고, 결국 제국주의의 야망과 부딪쳐 1773년 7월 21일 클레멘스 14세의 ‘예수회 해산 교서’에 의해 해산되었다. 그 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다시 부활해 ‘토착화, 복음화’라는 이름으로 부활할 때까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5. 마치며
마테오리치는 ‘예수를 닮은 삶을 통한 소통’을 원했던 선교사였다. 그의 삶이 그랬고, 그의 선교가 그랬다. 하지만 당시 사회는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 세계로 나아갔던 시대, 그 시대 안에서 그가 지키려 했던 가치와 시도했던 소통들은 무참히 짓밟혔고 예수회 해산이라는 결과로 나타났다.
예수회가 부활하고, 가톨릭이 ‘마테오리치가 시도했던 소통’을 ‘토착화와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회복시키는 시도를 하고 있는 지금. 개신교 울타리 안에 있는 우리는 무엇을 시도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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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8.11.19
  • 저작시기20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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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107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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