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득- 시는 얼마나 새로울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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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자득- 시는 얼마나 새로울 수 있는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글자만 남았을 때 조경종이 최후로 참여하여 바로 지어 쓰기를 “去時兒女悲, 歸來茄鼓競, 借問行路人, 何如去病”한 데서 온 말이다(박석무·정해렴 편역, 앞의 책, p.750.).
에 굳이 얽매이지 않아도 되고 推敲쯤이야 더디 해도 괜찮다. 또 안 하면 어떻겠는가? 흥취가 미치면 곧 이리저리 생각하고 생각이 미치면 곧바로 그대로 쓰면 된다. 남의 눈치 볼 것 없고, 내 것 아닌 것 흉내 내느라 헛고생할 것 없다. 어차피 “배와 귤은 각각 그 맛이 다른 것[梨橘各殊味]”이니 “입맛 따라 제 맘에 들면 그뿐[嗜好唯其宜] 정약용, <老人一快事六首效香山體> 마지막 두 구, 박석무 편역, 《哀絶陽》, 시인사, 1983, p.163.
”이다. 공연히 배가 귤 맛을 내려다가 배의 본래 맛마저 잃게 된다. “나는 본래가 조선사람이라서 / 즐거이 조선시를 지어낼 뿐[我是朝鮮人, 甘作朝鮮詩]”이다. 中華니 民族이니를 떠나 김성진의 전게 논문은, 燕巖의 ‘朝鮮風’이라든가 茶山의 ‘朝鮮詩’를 ‘事大的 慕華文學을 배격하고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民族文學論을 제창’하는 것으로 본 김상홍, 송재소의 견해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김성진은, ‘文必秦漢 詩則盛唐’을 표방하고 格調를 중시한 李攀龍·王世貞을 추종하는 擬古文派와 이를 반대하고 歸有光·唐順之를 추종하는 古文派가 병립하고 있었던 조선중기 이후의 우리나라 한문학의 흐름과 관련해서 살피는 것이 온당함을 치밀하게 논증하고 있다. 다시 말해, ‘조선풍’과 ‘조선시’는 민족적 문학관에서라기보다는 善變을 하고 時宜에 맞으며 情境과 聲色을 그려 眞趣와 眞率을 표현하고자 한 古文 창작태도의 결과라는 것이다. p.325.
제가 잘 아는 것, 자기의 느낌과 뜻을 펼쳐 쓰는 것이 중요하다. “옛 사람들의 구구한 (意)格이니 (聲)律이니 하는 것들 / 지금 사람인 우리네가 어찌 알아내랴[區區格與律, 遠人何得志]” 또 알아낸들 무엇 할 것인가? 지금의 내 興, 내 뜻[志]이 아닐 바에야.
지금 懋官(이덕무의 字-필자)은 조선 사람이다. 산천과 기후의 지리적인 조건이 중국과 다르고 언어와 謠俗의 시대적 배경이 漢·唐과 다르다. 만일 중국의 수법을 본받고 漢·唐의 문체를 蹈襲한다면 나는 다만 그 수법이 높으면 높을수록 意趣는 비루하게 되고 그 문체가 漢·唐과 비슷하면 할수록 그 언어는 더욱 거짓이 됨을 볼 뿐이다.
우리나라가 비록 구석져 있기는 하나 나라가 적지 않고 新羅·高麗가 비록 소박하기는 하나 민간에서는 아름다운 풍속이 많았다. 그러한즉 우리나라의 그 方言을 문자로 옮기고 그 민요를 운율에 맞추기만 하면 자연히 문장이 이루어져 진실이 발현된다. 답습을 일삼지 않고 남의 것을 빌려오지 않고 현재 있는 그대로를 가지고 온갖 것들을 표현해 낼 수 있는 것이다. 박지원, <處稿序>《燕巖集》
古格이나 古律에 얽매이지 마라. 눈앞의 情景을 그려 眞率과 眞趣를 표현하되, 모방에 의존하지 마라. 남의 것을 빌려다가 따라하는 짓 하지 마라. 지금 갖고 있는 것만 가지고도 온갖 것들을 다 표현해낼 수 있다. 斬新과 獨創, 그것이 詩文의 참다운 경지다.
茶山의 自得論은 그가 私淑한 星湖 李瀷(1681~1763)의 다음 논지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옛 사람의 시는 시골의 野人과 같아서 갓도 스스로 만들며 띠도 스스로 만들고 옷과 신발도 스스로 만들었고 器物도 스스로 만든 것이었다. 요즈음 사람들의 시는 京邑의 선비와 같아 갓도 띠도 의복과 신발과 기물도 모두 다 남의 것을 빌린 것이다. 비록 모두가 아름답고 볼 만한 것이라고 하지만, 이는 自己의 것이 아니다. 동녘 이웃과 서녘 이웃에서 빌린 것이기 때문에 무엇 하나 족히 稱할 것이 있으랴! 내가 陶淵明의 文集을 보니 그것은 스스로 지은 것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배우기가 어렵다. 요즈음 論하는 시는 남의 것을 빌려서 조금도 빈틈이 없이 잘 벌여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또 혹자는 남의 것을 빌려서 先後가 顚倒되고 本末이 錯亂되었으니 더욱 가소로운 일이다. 이익, <陶詩自做>《星湖僿說》
古人의 글은 自得의 결과이다. 스스로 만들어낸 글이므로 글쓴이[自己]를 疎外시키지 않는다. 타인의 자득은 힘써 배운다고 따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일껏 빌려다가 잘 벌여 놓았다 쳐도 끝내는 模倣이고 蹈襲이고 剽竊이므로 흠구덕이 없을 수 없다. 이미 그 사람이 아니고 이미 그 시대가 아니기 때문에 이것은 피할 도리가 없다.
그러나 茶山의 自得은 이 글에서 규명하고자 하는 創新과는 일정한 거리가 常存함을 무시할 수 없다. 그에게 創新은 시간·공간적으로 먼 타인의 것을 모방하는 것을 경계하고 ‘지금·이곳’의 삶을 ‘자기’의 진실된 감정으로 표출하는, 主體의 의미가 강하다. 실제로 그는 자녀교육의 일환이었던 편지글에서 用事와 學詩를 자주 강조하고 있다.
… 시를 쓰면서 用事를 하지 않고 吟諷令月이나 담기설주하여 겨우 韻字나 단 것은 서너 집 되는 村家의 고루한 訓長들의 시이다. 이후로 시를 쓸 때에는 모름지기 用事를 위주로 하라. 우리나라 사람들은 역사적 사실을 인용한답시고 중국의 일이나 인용하고 있으니 이것 또한 볼품없는 일이다. 아무쪼록 《三國史記》《高麗史》《東國輿地勝覽》《懲毖錄》《練藜室記述》 및 우리나라의 다른 글 속에서 그 사실을 뽑아내고 그 지방을 고찰하여 시에 인용한 뒤에라야 후세에 전할 수 있는 좋은 시가 나온다. 정약용, <寄淵兒>
적극적으로 用事를 하되, 우리 시에는 ‘우리 것’을 인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용사 없는 시는 고루하고 편벽되며 볼품없다고까지 목소리 높인다. 다만 字句나 바꾸고 韻字나 꿰맞추는데 급급한 베끼기와 작가 정신이나 창작 방법을 熟知하여 자기화하는 것은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自得을 일깨우기 위한 시에서도 茶山 역시 폭넓고 다양한 故事들을 동원하고 있다.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경향의 시를 스스로 짓고 力說했지만 그 역시 漢詩의 틀 안에 있었고 用事를 강조했으며 古人과 古人의 작품을 效則하곤 했다. 결론적으로 이 논의는 자연스럽게 연암 박지원의 ‘法古創新’論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겠는데, 그것 또한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는 오래된 명제를 재확인해주는 善例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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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8.11.20
  • 저작시기20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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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1070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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