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체가 - 관동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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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경기체가 - 관동별곡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관동지방을 모두 순찰한 다음에 조직한 체계적인 작품인 것이다. 안축이 1330년 5월 30일에 강릉도존무사의 명을 받고 떠나, 1331년 9월 17일 임무를 끝내기까지 만 1년 4개월 사이 동안 이곳저곳을 돌면서 관리들의 횡포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고통을 목도한 안축이 그 자리에서 자신의 감흥을 읊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자신의 맡은 바를 모두 끝내고 돌아와서 <<관동와주>>를 출간한 다음에 자신이 일을 마치고 돌아온 것에 자부심을 느끼고 너무도 아름다운 절경을 가진 관동에 임금의 덕이 미쳤으면 하는 마음에서 존무사로 돌아다닐 때를 떠올리며 경기체가를 지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관동별곡>의 내용을 서사 - 본사 - 결사대로 정리를 해보면, 서사에서는 관동을 순찰하는 데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고 있으며 자신이 대리하는 임금의 덕이 관동 곳곳에 퍼지길 바라고 있다. 본사에서는 각 지역을 순찰하면서 보는 아름다운 절경과 중국의 고사의 주인공들보다 더 즐거운 풍류를 읊으면서 현실적이고 주체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결사에서는 주나라 고례현과 무릉도원과 같은 이상향을 이야기 하고 있다는 점에서 순박한 백성들이 아름다운 풍속을 지키며 관동의 절경 속에 사는 것이 이상향이 아니겠느냐고 묻는 듯하다. 관동지방에서 이렇게 좋은 풍속을 지켜온 데 대한 찬탄과 그 이상을 앞으로도 지켜가길 바라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관동별곡>은 서사와 결사에서 이 작품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바를 뚜렷이 제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본사에서도 2,3,4연에서 감흥을 발전시켜 5,6연에서 폭발시킨 다음 7,8연에서 다시 차분해지는 느낌을 받게 한다. 이처럼 하나의 음악, 노래로서 감정상의 굴곡을 그리며 전개되고 있는데, 이는 의도적인 결과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만약 각각의 노래를 따로 짓고 나중에 합쳤다던가 순찰을 돈 감흥을 즉흥적으로 나타냈다고 한다면 이러한 체계와 음률을 갖추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문득 떠오른 생각이 그렇다면 안축은 왜 경기체가를 지었을까 하는 점이었다. <한림별곡> 이후에 조선조 경기체가까지 공백기가 큰 것을 보면-소실된 것인지, 작가(作歌)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인지 판단하긴 어렵지만- 경기체가라는 장르는 그다지 실용적인 작품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한림별곡>이야 지금으로 치면 ‘교가’정도의 위치로 생각할 수 있는 집단적 노래였고 잔치자리에서 쓰였다는 데서 그 자부심을 노래할만 하지만 <관동별곡>의 경우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면서 또한 자신이 강릉도존무사로 지내면서 느끼는 풍류, 순행에 큰 자부심을 느낀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 안축이라는 사람은 굉장히 자긍심이 넘치는 사람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향리 출신이었던 그가 관직에 나아가 임무를 수행했다는 사실을 영광으로 여겨 그 자부심을 신흥사대부들의 노래형식을 빌려 노래하고 싶었던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이 자긍심이야말로 주변의 것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점에서 그는 주변의 것을 진심으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랑하는 마음은 <관동별곡>이 흥겹게 연행되지만은 않았다는 점에서 또 드러난다.
<한림별곡>에 익숙한 나는 처음에 <관동별곡>의 이러한 분위기를 짐작하지 못했었다. 한 바탕 흥이 나야할 경기체가인데 어째서 처연한 느낌이 든단 말인가? 그런데 안축에 대해서 알게 되면서 조금은 이해가 갔다. 안축은 항상 애민하는 사람이었다. 강릉도존무사로 지내면서 항상 그들을 위해 아파하고 심지어 그들을 괴롭히는 관동의 절경이 사라졌으면 하는 생각까지 했던 사람이었다. 그러한 그의 마음은 <<관동와주>>의 한시들에 적지 않게 실려 있다. 이러한 마음이 <관동별곡>에도 담겨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 노래를 들으면 그렇게 ‘처연하고 슬픈 마음’이 드는 것이 아니었을까. <한림별곡>과 같이 ‘창’의 형식으로 불렸지만 메기고 받는 형식이 아닌 개인창으로써 그 음률 또한 느릿느릿했다고 한다. 흥겨운 잔치가 아니라 청아한 분위기의 연회라고 생각하니 조금 마음에 와 닿았다. 예를 들면 클럽과 같이 흥겨운 분위기에서는 <한림별곡>이 어울렸겠지만, 조촐한 연회에서는 잔잔한 <관동별곡>이 어울렸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어쩌면 관동의 빼어난 절경과 순박한 관동지방 백성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여기에 담았는지도 모르겠다. 혹시나 지금 다시 그들이 수탈당하고는 있지 않을지, 빼어난 절경 때문에 고통당하고 있지는 않을지 마음아파하며 임금님이 구제해 주어야 할 텐데 하며 지은 노래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 이 작품의 주제를 ‘아름다운 절경을 가진 관동에 임금의 덕이 미치길 바라는 마음’이라 정해 본다.
내가 <관동별곡>을 통해 또 하나 느낀 것은 ‘파격’이었다. 중간 중간 공식구를 없애고 개인의 감흥을 더 넣은 것은 안축이라는 사람은 정형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것으로 나아갈 줄 아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이 든다. 이 파격을 통해 <한림별곡>이후 명맥을 잃어가던 경기체가를 부활시킨 장본인이 아니었을까. 노래를 하다 보니 감정에 취해서 빼 버린 것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즐길 줄 아는 자유분방하고 호탕한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애민하는 마음과 파격의 미학을 지닌 안축. 그는 자신을 관리로 임명해준 나라를 사랑했고 중국에 비해 뒤지지 않는 관동의 절경과 풍류를 사랑했고 관동에 사는 순박한 백성들을 사랑했으며 지방에 올라와 과거에 급제하여 존무사임명을 받아 왕명을 전달한 자기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사랑을 자긍심으로 표현할 줄 알았던 그야말로 진정한 신흥사대부가 아니었을까.
※참고문헌
김상철, <<고려시대 시가의 탐색>>, 경인문화사, 2004.
김상철, <안축의 <관동별곡>에 나타난 정서와 그 표현방식에 대하여>(<<한국학연구>>), 인하대학교한국학연구소, 1999.
전재강, <안축의 신의론적 시가론과 이상주의적 시가작품>(<<문학과 언어>>), 문학과 언어연구회,
1997.
박경주, <<경기체가 연구>>, 이회문화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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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1페이지
  • 등록일2018.11.25
  • 저작시기20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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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1071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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