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누가 쓰는가 -연혁인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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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시는 누가 쓰는가 -연혁인창-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시는 누가 쓰는가?
-연혁인창-


1. 서유구‘의’ 《임원경제지》

2. 게리 스나이더‘의’ <길 밖에서>와 <도끼 자루들>

3. 연혁인창, 법고창신, 그리고 구성주의

본문내용

陽而異品矣). 유협, 위의 책, p.361.
뿌리와 줄기가 땅에 닿았다는 것은 문장 격식의 명칭과 내용 사이의 일치를 나타내고, 태양에 노출되었다는 것은 다양한 상황에 대한 창작 방법의 적용을 의미한다.
淸나라의 葉燮(1627~1703)도 문학을 沿[선례를 따름, 답습]·革[혁신]·因[계승]·創[창신], 즉 이전의 것을 계승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작업의 연속으로 보았다. 계승이 없으면 창조가 있을 수 없고, 창조가 있어야지만 自成一家하여 자신의 개성적인 목소리를 지닐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무릇 앞사람이 길을 열면 뒷사람이 그것을 이어받아 보태고, 앞사람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면 뒷사람이 그것을 이어 확대하게 된다. 만약 앞사람이 이 말을 하지 않았다면 뒷사람이 앞사람이 한 것처럼 처음으로 이 말을 할 수 있고, 앞사람이 이미 이 말을 했다면 뒷사람은 앞사람의 말을 이어받아 다르게 만들 수 있다. 요컨대 뒷사람은 앞사람이 없으면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없고, 앞사람은 뒷사람이 없으면 그 말을 더 이상 확장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시삼백(《詩經》)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면서, 이 가운데 종결과 시작이 서로 이어져 형성된 연고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葉燮, 《原詩》, 이병한 편저, 《중국 고전 시학의 이해》, 문학과지성사, 1992, p.48~49.
연암 박지원이 박제가의 《楚亭集》 서문에 붙인 글에서 역설한 ‘法古新’ 역시 沿·革·因·創의 復唱이라 할 수 있다.
문장을 어떻게 지어야 할 것인가? 論者들은 반드시 ‘法古’해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마침내 세상에는 옛것을 흉내 내고 본뜨면서도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가 생기게 되었다. 이는 王莽의 <周官>으로 족히 예악을 제정할 수 있고, 陽貨가 공자와 얼굴이 닮았다 해서 만세의 스승이 될 수 있다는 셈이니, 어찌 ‘법고’를 해서 되겠는가.
그렇다면 ‘新’이 옳지 않겠는가. 그래서 마침내 세상에는 괴벽하고 허황되게 문장을 지으면서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자가 생기게 되었다. 이는 세 발[丈] 되는 장대가 국가 재정에 중요한 度量衡器보다 낫고, 李延年의 新聲을 종묘 제사에서 부를 수 있다는 셈이니, 어찌 ‘창신’을 해서 되겠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옳단 말인가? 나는 장차 어떻게 해야 하나? 아니면 문장 짓기를 그만두어야 할 것인가?
아! 소위 ‘법고’한다는 사람은 옛 자취에만 얽매이는 것이 병통이고, ‘창신’한다는 사람은 常道에서 벗어나는 게 걱정거리이다. 진실로 ‘법고’하면서도 변통할 줄 알고 ‘창신’하면서도 능히 전아하다면, 요즈음의 글이 바로 옛글인 것이다. 爲文章如之何。論者曰。必法古。世遂有摹倣像而不之者。是王莽之周官。足以制禮樂。陽貨之貌類。可爲萬世師耳。法古寧可爲也。然則新可乎。世遂有誕淫僻而不知懼者。是三丈之木。賢於關石。而延年之聲。可登淸廟矣。新寧可爲也。夫然則如之何其可也。吾將奈何無其已乎。噫。法古者。病泥跡。新者。患不經。苟能法古而知變。新而能典。今之文。猶古之文也。古之人有善讀書者。
수년 전부터 ‘구성주의(constructivism)’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하면서 인문학과 교육학 분야의 담론을 주도해 오고 있다. 구성주의를 한마디로 요약하기는 쉽지 않다. 어느 학자의 말처럼 연구자의 수만큼이나 다양하게 정의될 수 있다. 다만, 구성주의와 대비되어 이전 산업시대의 세계관에 학문적 정당성을 부여했던 패러다임, 즉 객관주의(objectivism)와의 비교를 통해 간략하게나마 규명해 보면 다음과 같다.
객관주의에서는 지식이란 고정되어 있고 확인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본다. 따라서 일단 이런 지식을 ‘발견’할 수만 있으며 그것은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인 제약을 벗어나 모든 경우에 적용할 수 있다고 본다. 반면에 구성주의는 이와는 정반대의 입장을 취한다. 즉 개인은 어느 특정 사회에 속하여 살아가면서 그 사회의 사회적, 문화적,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그 위에 자신의 개인적인 인지적 작용을 가하면서, 주어진 사회 현상과 이해를 지속적으로 구성해 간다고 본다. 다시 말해 개인의 인지적, 사회적 요소와 역할을 강조하면서 지식의 보편적, 일반적 성격을 부인하는 것이다. 이경화, <독해의 구성주의 관점과 읽기 지도>, 《한국어문교육》7권 1호, 한국교원대학교 한국어문교육연구소, 1998, pp.357~382.
이런 구성주의 관점은 독자와 저자의 관계를 새롭게 볼 것을 요구한다. 독자의 능동적이고 전략적인 역할이 강조되어, 독자는 읽고 쓰는 행위, 즉 文識(literacy)의 주체로 거듭난다. 특히 읽기와 쓰기는 동시에 이루어진다고 본 Spivey의 주장이 눈에 띈다. 그는 ‘글쓰기’를, 다른 사람이 쓴 여러 가지 텍스트를 쓰고자 하는 과제와 잠재적 관련성이 있는 부분들을 선택·조직·추론·정교화하여 ‘구성’하는 과정으로 파악한다. Spivey, 신헌재·박태호·이주섭·김도남·임천택 옮김, 《구성주의와 읽기·쓰기》, 박이정, 2004(개정판). 특히 <제7장 쓰기 담화에서 텍스트의 변형>과 <제8장 저술의 정체성>을 참고했다.
이렇게 보면, 결국 저자들은 다른 사람의 텍스트를 변형하는 독자이고, 그것도 개인적 차원을 넘어 사회적 환경 속에서 작품을 생산한 사회적 존재라는 복잡한 문제가 발생한다. 여기서 저술의 정체성, 우리가 요즘 말하는 著作權 문제가 그리 간단치 않다는 생각에 미치게 된다. 그래서 “바르트는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선언을 되새겨 ‘저자는 죽었다’고 선언하였고, 텍스트의 의미가 유일하지 않으며 결정되어 있지도 않음을 알렸다.” Spivey, 위의 책, p.340.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시는, 문학은, 책은 누가 쓰는가? 구성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저자는 ‘구성하는 사람’이다. ‘서유구의 《임원경제지》’에서 ‘의’를 ‘編纂’으로 해석하면 이 논리에 정확히 符合한다. 즉 《임원경제지》는 서유구라는 개인을 만든 환경, 시대의 결과물이고 서유구는 그것을 구성[編纂]한 사람이다. 이것은 <길 밖에서>, <도끼 자루들>‘의’ 게리 스나이더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다시 묻자. 시는 누가 쓰는가? 책을, 세상을, 인생을 읽는 사람-독자-들이 쓴다. 더 능동적이고 생산적인 독자들이 더 좋은 力作을 남긴다는 것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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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8.11.27
  • 저작시기20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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