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논의방향의 제시
(1) 객관주의란?
(2) 왜 도덕적 객관주의를 고수해야 하는가?
(3) 도덕적 절대주의와 도덕적 객관주의의 구분
Ⅱ. 자연법
(1) 고대의 우주론적 자연법론
(2) 중세의 신적 자연법론
(3) 이중 효과의 원칙
Ⅲ. 온건한 객관주의
Ⅳ. 윤리적 상대주의의 매력
Ⅴ. 나의 생각
(1) 객관주의란?
(2) 왜 도덕적 객관주의를 고수해야 하는가?
(3) 도덕적 절대주의와 도덕적 객관주의의 구분
Ⅱ. 자연법
(1) 고대의 우주론적 자연법론
(2) 중세의 신적 자연법론
(3) 이중 효과의 원칙
Ⅲ. 온건한 객관주의
Ⅳ. 윤리적 상대주의의 매력
Ⅴ. 나의 생각
본문내용
이해하지 못하는 점을 비난함에 있어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다.예) 음식 문화면에서 복날 개고기를 먹는 우리나라인과 애완동물로써의 개를 사랑하는 프랑스인과 문화적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프랑스인의 입장에서 개의 생명권을 침해한다고 비난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각 나라에서 다르게 나타나는 환경에 의해 도출되는 문화에 불과하다.
= 하지만 이것이 어떤 방식으로도 더 낫거나 더 나쁜 삶의 방식은 존재 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함축해서는 안 된다.
④ 서구 사회에서의 종교적 쇠락 때문에.
* 도스토예프스키의 한 ‘등장인물’ - “신이 죽었다면 모든 것이 허용 된다”
* 종교적 신념을 잃어버린 사람들 ┎ 깊은 공허감 (혼동) 도덕적 공허감
┺ 상대주의의 한 형태인 세속적 관례주의로 귀의함
그러나 도덕적 질서의 타당함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신의 존재여부와 상관없이 보편적인 도덕법칙은 존재한다.
⑤ 메타 윤리학으로부터 강한 인상을 받은 철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 윤리학의 원칙이 갖는 내용에 관하여는 처음부터 어떠한 판단도 내리지 않고 있음.
윤리학의 연구는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정의에서 출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
- 다양성의 명제가 그럴듯함.
결국 상대주의가 도출된다고 생각하는 쪽으로 이끌림.
---▶ 윤리학에는 선 그 자체(the good), 인간의 번영과 관련 있는 실제적인 정의가 있음. 사회학, 인류학에는 적절한 정의일 수 있으나 윤리학에는 부적절한 정의.
Ⅴ. 나의 생각
“옳고 그름을 누가 판단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포이만의 대답은 “우리”였습니다. 지구상의 “우리”는 유일한 이성적인 존재로써 대화와 공감과 이해를 통해 최선의 추론의 기초위에서 판단을 내려야합니다. 저는 이 점에 동의합니다.
포이만의 대답은 여러 가지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먼저, 지구상의 “우리”는 유일한 이성적인 존재라는 것을 살펴봅시다. 개는 똥이 마려우면 아무데서나 볼일을 봅니다. 그러나 인간은 똥이 마려울 때 바로 아무데서나 볼일을 보지 않습니다. 언제, 어디서 누어야만 다른 존재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가? 혹은 사회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할 수 있는가? 를 먼저 생각합니다. 본능적으로 어떠한 일을 할 때 그것이 지니는 사회적 의미를 “생각 한다”는 점에서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입니다. 스토아학파는 이 “이성”을 “합리적인 씨앗”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는 모두 이 “합리적인 씨앗”을 가슴속에서 틔워 자신이 걸어가는 데 있어 합리적인 방향을 모색합니다. 하지만 이 때 세상에 “나” 하나만 있다면 굳이 방향을 모색할 필요가 없습니다. 두 갈래 길이란, 갈등이라는 개념이 전제했을 때 가능한 것이니까요.
첫 시간에 교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도덕이 필요하다.” 그렇습니다. 인간이 도덕을 지켜야 하는 당위성에는 “이성”만이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사회”속에서만 존재의미를 찾을 수 있는 사회적 존재이기에, 사회가 해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또는 사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해 도덕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도덕의 당위성에는 “이성”과 함께 “사회”라는 개념이 하나 더 붙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저는 개인적으로 상대주의보다 객관주의에 더 큰 매력을 느꼈습니다. 상대주의는 공동체의 도덕적 결합을 작은 범위에서는 시킬 수 있을지 모르지만, 큰 개념으로 확대시킬 경우 그 결속력이 떨어집니다. 반면에, 객관주의는 넓은 의미에서의 도덕적 결합이 가능합니다. 이것은 사회의 존속여부를 결정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개인의 존재여부까지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한 단계 위의 관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도덕성은 변하지 않는 “선 의지”이다’라고 말한 칸트의 입장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와 같은 관점에서 포이만이 제시한 “공통된 인간본성”이란 “선 의지”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사람은 물질적인 만족으로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또한 “행복”이나 “쾌락”만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존재도 아닙니다. 상대주의가 제시한 바처럼 우리들은 모두 똑같은 환경에서 자랄 수도 없을뿐더러, 모두 일관된 가치관을 가질 수는 없지만, 오직 공통된 한 가지를 바라며 살아갑니다. 그것을 충족해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보편적인 도덕 법칙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원하느냐, 원하지 않느냐의 “정념”과 연관되어있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이것을 좋아할 수도 있지만 누군가는 싫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 두 사람 모두 이것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절대주의적인 방식에서 적용시킨다면, 약간의 문제가 생깁니다. 이것을 객관주의자는 중간적 성향으로 잘 조정해 나갑니다. 두 가지 입장의 논증 해결의 끝에 우리는 이제 절대주의와 상대주의의 극단적인 체계에서 벗어나 객관적 도덕성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포이만의 글을 읽으며 제게 가장 인상 깊게 다가온 이야기는 다름 아닌 “천국과 지옥”이야기 이었습니다. 포이만이 묘사하는 천국은 지옥과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천국에도 지옥과 같이 영구적인 가려움증을 앓는 사람들이 산다는 공통점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다릅니까? 무엇이 천국을 천국으로 지옥을 지옥으로 만든 것일까요? 저는 그 무엇이 바로 “도덕”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가려움증을 앓는 사람들은 모두 앞으로 손이 굳어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나의 손은 내가 앓는 가려움증을 해소- 단, 여기서의 가려움증의 해소는 단순히 인간이 느끼는 정념으로써의 쾌락이 아님을 밝힙니다 - 해줄 수는 없지만 내 앞에 앉아있는 이 사람의 가려움증은 해소해 줄 수 있습니다. 또한, 내 뒤의 이 사람 역시 나의 가려움증을 해소 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의 등을 긁어주며 가려움증을 해소합니다. “협동”의 개념이 창출됩니다. “서로 돕는 것.” 사회는 혼자만의 힘으로 유지해 나갈 수 없다는 진리가 여기에서 나옵니다. 도덕은 “다른 이를 위한 것”이며 동시에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결국 이 세계를 천국으로 만들 것인가, 지옥을 만들 것인가 하는 것은 모두 “우리”의 손에 달린 일입니다.
= 하지만 이것이 어떤 방식으로도 더 낫거나 더 나쁜 삶의 방식은 존재 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함축해서는 안 된다.
④ 서구 사회에서의 종교적 쇠락 때문에.
* 도스토예프스키의 한 ‘등장인물’ - “신이 죽었다면 모든 것이 허용 된다”
* 종교적 신념을 잃어버린 사람들 ┎ 깊은 공허감 (혼동) 도덕적 공허감
┺ 상대주의의 한 형태인 세속적 관례주의로 귀의함
그러나 도덕적 질서의 타당함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신의 존재여부와 상관없이 보편적인 도덕법칙은 존재한다.
⑤ 메타 윤리학으로부터 강한 인상을 받은 철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 윤리학의 원칙이 갖는 내용에 관하여는 처음부터 어떠한 판단도 내리지 않고 있음.
윤리학의 연구는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정의에서 출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
- 다양성의 명제가 그럴듯함.
결국 상대주의가 도출된다고 생각하는 쪽으로 이끌림.
---▶ 윤리학에는 선 그 자체(the good), 인간의 번영과 관련 있는 실제적인 정의가 있음. 사회학, 인류학에는 적절한 정의일 수 있으나 윤리학에는 부적절한 정의.
Ⅴ. 나의 생각
“옳고 그름을 누가 판단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포이만의 대답은 “우리”였습니다. 지구상의 “우리”는 유일한 이성적인 존재로써 대화와 공감과 이해를 통해 최선의 추론의 기초위에서 판단을 내려야합니다. 저는 이 점에 동의합니다.
포이만의 대답은 여러 가지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먼저, 지구상의 “우리”는 유일한 이성적인 존재라는 것을 살펴봅시다. 개는 똥이 마려우면 아무데서나 볼일을 봅니다. 그러나 인간은 똥이 마려울 때 바로 아무데서나 볼일을 보지 않습니다. 언제, 어디서 누어야만 다른 존재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가? 혹은 사회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할 수 있는가? 를 먼저 생각합니다. 본능적으로 어떠한 일을 할 때 그것이 지니는 사회적 의미를 “생각 한다”는 점에서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입니다. 스토아학파는 이 “이성”을 “합리적인 씨앗”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는 모두 이 “합리적인 씨앗”을 가슴속에서 틔워 자신이 걸어가는 데 있어 합리적인 방향을 모색합니다. 하지만 이 때 세상에 “나” 하나만 있다면 굳이 방향을 모색할 필요가 없습니다. 두 갈래 길이란, 갈등이라는 개념이 전제했을 때 가능한 것이니까요.
첫 시간에 교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도덕이 필요하다.” 그렇습니다. 인간이 도덕을 지켜야 하는 당위성에는 “이성”만이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사회”속에서만 존재의미를 찾을 수 있는 사회적 존재이기에, 사회가 해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또는 사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해 도덕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도덕의 당위성에는 “이성”과 함께 “사회”라는 개념이 하나 더 붙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저는 개인적으로 상대주의보다 객관주의에 더 큰 매력을 느꼈습니다. 상대주의는 공동체의 도덕적 결합을 작은 범위에서는 시킬 수 있을지 모르지만, 큰 개념으로 확대시킬 경우 그 결속력이 떨어집니다. 반면에, 객관주의는 넓은 의미에서의 도덕적 결합이 가능합니다. 이것은 사회의 존속여부를 결정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개인의 존재여부까지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한 단계 위의 관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도덕성은 변하지 않는 “선 의지”이다’라고 말한 칸트의 입장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와 같은 관점에서 포이만이 제시한 “공통된 인간본성”이란 “선 의지”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사람은 물질적인 만족으로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또한 “행복”이나 “쾌락”만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존재도 아닙니다. 상대주의가 제시한 바처럼 우리들은 모두 똑같은 환경에서 자랄 수도 없을뿐더러, 모두 일관된 가치관을 가질 수는 없지만, 오직 공통된 한 가지를 바라며 살아갑니다. 그것을 충족해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보편적인 도덕 법칙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원하느냐, 원하지 않느냐의 “정념”과 연관되어있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이것을 좋아할 수도 있지만 누군가는 싫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 두 사람 모두 이것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절대주의적인 방식에서 적용시킨다면, 약간의 문제가 생깁니다. 이것을 객관주의자는 중간적 성향으로 잘 조정해 나갑니다. 두 가지 입장의 논증 해결의 끝에 우리는 이제 절대주의와 상대주의의 극단적인 체계에서 벗어나 객관적 도덕성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포이만의 글을 읽으며 제게 가장 인상 깊게 다가온 이야기는 다름 아닌 “천국과 지옥”이야기 이었습니다. 포이만이 묘사하는 천국은 지옥과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천국에도 지옥과 같이 영구적인 가려움증을 앓는 사람들이 산다는 공통점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다릅니까? 무엇이 천국을 천국으로 지옥을 지옥으로 만든 것일까요? 저는 그 무엇이 바로 “도덕”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가려움증을 앓는 사람들은 모두 앞으로 손이 굳어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나의 손은 내가 앓는 가려움증을 해소- 단, 여기서의 가려움증의 해소는 단순히 인간이 느끼는 정념으로써의 쾌락이 아님을 밝힙니다 - 해줄 수는 없지만 내 앞에 앉아있는 이 사람의 가려움증은 해소해 줄 수 있습니다. 또한, 내 뒤의 이 사람 역시 나의 가려움증을 해소 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의 등을 긁어주며 가려움증을 해소합니다. “협동”의 개념이 창출됩니다. “서로 돕는 것.” 사회는 혼자만의 힘으로 유지해 나갈 수 없다는 진리가 여기에서 나옵니다. 도덕은 “다른 이를 위한 것”이며 동시에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결국 이 세계를 천국으로 만들 것인가, 지옥을 만들 것인가 하는 것은 모두 “우리”의 손에 달린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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