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동석 지사와 경남의 31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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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배동석 지사와 경남의 31운동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들어가는 말

1. 배동석 지사 약전

2. 배동석과 3∙1운동
⑴ 경성 화천정 126번지 하숙생
4인방
⑵ 배동석에 대한 소개서
⑶ 배동석의 서울 활약

3. 3ㆍ1운동 준비와
배동석 지사의 밀사활동
⑴ 민족대표의 밀사 활동
⑵ 배동석 지사와 함안 시위

4. 배동석 지사에 대한 공판과 그후
⑴ 공판과 피의 사실
⑵ 고문과 옥고
⑶ 배동석과 세브란스 결핵병사
⑷ 고문의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나다

5. 경남지역 3.1만세운동

맺음말

본문내용

요양지를 서울 근교로 옮겼을 가능성도 있다. 세브란스 의과대학, 위 웹진
5. 경남지역 3.1만세운동
1) 경남지역 최초의 만세시위, 연개장날 만세시위.
배동석은 2월 25일 마산에 도착하여 함안 칠북면의 이령리 처가에 들러서 자고 다음날 아침 일찍 마산으로 갔다. 다음날인 2월 26일 마산 임학찬 집에서 하루밤을 묵고 다시 이령리 처가에 들러 하루밤을 지내고 2월 28일 서울로 떠났다. 이때 이령리 처가 장인이자 교회 지도자인 김세민에게 독립운동 준비 소식을 전하며, 시위운동에 참여 할 것을 권유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이령리에서는 2월 28일 독립운동을 위한 준비모임이 있었다. 한편 배동석이 이령리 처가를 다녀간 뒤 장인인 김세민 장로는 3월 2일 이령리 주민 13명을 대동하고 광무황제의 국장을 배관하기 위해 상경하였다. 이때 함께 상경한 13명은 이령리의 김세민, 여봉준, 김주현, 윤기선, 황병민, 하갑수, 한세호, 정영실, 김홍찬, 김갑일, 황경수, 김차선, 안수원과 이령리 31운동 기념비
칠원면의 정영보 등이었다. 이규석,『함안 항일독립운동사』, 함안문화원, 1998, p. 295
이들은 서울에서 광무황제의 국장 뿐 아니라, 서울시내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직접 목격하였다.
3월 5일 아침 서울 남대문 역에서 기차를 타고 출발하여 이령리로 돌아온 김세민 등은 이튿날인 3월 6일 29명의 동리 인사들을 모아 이령리 교회에서 준비모임을 갖고 3일 뒤인 3월 9일 연개장날에 만세시위를 벌였다.
김세민은 아들 김정오는 이 시기 서울 약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김정오는 3월 2일 서울에 온 아버지 김세민과 동리 사람들과 함께 했고, 부친 일행이 3월 5일 아침 고향으로 돌아간 뒤에도 서울에 있다가 3월 8일 고향으로 돌아와 3월 9일 이령리 연개장터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그후 4월 21일 서울로 돌아가 하숙집을 묵정동 8번지 박용대(朴容大) 집에서 매형인 배동석이 하숙하고 있었던 화천정 126번지로 옮기고, 서대문 감옥 주변에서 만세시위를 벌이다 4월 26일 붙잡혔다. 「김정오 심문조서」, 국사편찬위원회 편, 위 책, pp. 227~228.
3월 9일 칠북면 이령리 시위는 일제 경찰서가 있는 칠원면과 약 8km 떨어져 있어 충돌없이 조용한 시위로 끝났다.
이후 3월 12일과 17일 대산면 평림장터 시위, 3월 18일 칠서면 이룡리 시위 등 함안 군내 각지에서 연쇄적으로 시위운동이 발발하여 3월 19일 함안읍내시위, 3월 20일 많은 인명 피해를 낳은 군북시위에 이르게 된다.
⑵ 경남 31운동에서의 기독교의 역할
조선헌병대사령부, <조선소요사건상황>에는 경남지방 31운동에 있어서 기독교의 역할을 중심하는 보고를 하였다.
관내에 있어서의 이번 소요와 종교와의 관계는 그 관련자가 가장 많고, 또한 각처의 소요에 거의 종교가 가담되지 않은 일이 없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중에서도 치열을 극한 것은 외국인 경영하는 기독교를 수위로 하고, 다음이 불교와 천도교이다. 조선헌병대사령부, 1973, <조선소요사건상황>,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자료집》6, 603-604.
이와 더불어 3월 11일 부산 일신여학교 시위와 3월 초순의 경남지방 시위에서 기독교의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그러던 중 뜻하지 않게 3월 11일 부산의 호주 장로파 부속 일신 여학교 생도가 동료교사의 선동에 의하여 망동을 야기하며, 점차 각지로 퍼져 갔으며... 현재 관하 23개 대서(隊署) 중 진해서를 제외하고는 모두 소요가 일어났는데, 기독교가 가입하지 않은 대서는 겨우 3개소에 지나지 않는다. 조선헌병대사령부, 위의 책, 608.
⑶ 경남지역 항일만세운동 피해보고서
31운동 직전인 1918년에 기독교 계통의 교회는 모두 3,154개였다. 이 가운데 장로교는 1,896개로 전체의 60.1%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감리교가 817개로 25.9%였다. 31운동은 장로교와 감리교가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는데, 두 교단은 전체 기독교의 86%를 차지하고 있었다. 1919년 10월에 조선예수교장로회협의회 <제3회 총회록>에 의하면 당시 경남지역의 교세는 다음과 같았다.
지역
장로교
감리교

경남
235교회
0교회
235교회
그리고 1919년 10월 조선예수교장로회 <제8회 총회록> 부록에 실린 31운동 당시 전국 및 경남노회의 보고 사항은 다음과 같다.
31운동으로 인한 피해가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우리 기독교는 민족의 아픔에 동참했었고 나라를 위해 기꺼이 희생했었다.
맺음말
배동석은 민족대표의 31운동의 기획과정에 밀사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전문학교 대표 학생으로서 청년학생들의 독립운동 참여와 확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그가 이갑성의 밀명을 받아 마산을 방문하면서 마산과 함안의 만세시위가 촉발되었다. 그리고 3월 11일 부산진일신여학교의 만세운동으로 촉발된 부산울산경남지역의 31운동은 초기에는 학생, 기독교인 지도자, 그리고 종교인들, 특히 기독교가 주도했고, 이후 농어민, 상인, 노동자를 포함한 일반인들이 참여해 3월 중순부터 4월 초순까지 가장 절정에 달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2019년 한해동안 부산경남기독교역사연구회와 (사)경남기독문화원은 공동으로 그동안 잘 살펴보지 못했던 경남지역의 31운동에 대한 연구를 시작해 년말에는 한권의 책으로 엮어보길 소망한다. 오늘 다루지 못한 더 좋은 자료들이 많이 나올 수 있도록 기도와 후원으로 동역해 주시길 기대해 본다.
자신이 속해 있는 경남의 시군구에서 일어났던 31운동만세운동에 관한 좋은 자료들이 있으면
제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예컨대, 각지역 향토사학회에서나 기관들에서 발간한 발간물들, 신문이나
잡지에 게재되어던 기사들, 교회 주보나 요람, 교회사(백년사, 오십년사 등), 회지들에 실린 원고,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사진이나 메모, 선조들의 유품 등을 저희들에게 제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보내 주실 곳: 부산 경남기독교역사연구회
50453 경남 밀양시 상남면 외평로 468
yeandsu@hanmail.net
책임 집필자: 박시영목사(010-7152-8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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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9.03.15
  • 저작시기20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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