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속답사 보고서 - 한국민속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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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민속답사 보고서 - 한국민속의 이해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경주에 있는 신라의 첨성대, 개성 만월대의 고려 첨성대, 서울 창경궁 내의 관천대와 더불어 우리나라 천문 관측역사의 발전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안국역 3번 출구로 나오시면 바로 현대사옥이 보이고 현대사옥 정문 들어서서 우측으로
눈을 돌리면 바로 사진과 같이 생긴 것이 있습니다. 한번 들러보세요.
현재 계동 현대사옥內에 있는 관상감
사직단
사직단은 종묘와 함께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조선을 세운 태조가 한양에 수도를 정하고, 궁궐과 종묘를 지을 때 함께 만들었다.
토지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국사단은 동쪽에, 곡식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국직단은 서쪽에 배치하였으며, 신좌는 각각 북쪽에 모셨다.
제사는 2월과 8월 그리고 동지와 섣달 그믐에 지냈다.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나 가뭄에 비를 기원하는 기우제 그리고 풍년을 비는 기곡제들을 이곳에서 지냈다.
1902년 사직단과 사직단의 임무를 맡는 사직서가 다른 곳으로 옮겨지고, 일본인들은 우리나라의 사직을 끊고 우리 민족을 업신여기기 위하여 사직단의 격을 낮추고 공원으로 삼았다. 1940년 정식으로 공원이 된 사직공원이 옛 사직단의 자리이다.
사직단은 우리에게는 사직공원으로 더욱 친근하지요. 일제 강점기 때 공원으로 격하되어
오늘에 이르다 최근 몇 년 전 부터는 복원 작업을 시작하여 지금은 옛 모습을 갖추었다.
사직단에 들어서면 정문 좌측으로 사직단이 있고 그 위로는 작은 광장이 있으면 광장에는
좌측은 율곡 이이, 우측은 신사임당의 동상이 나란히 있으며, 좌측으로 난 길을 따라 오르면 조그마한 단군 성전이 하나 나온다.
사직단 단군성전
율곡 이이 선생의 동상을 뒤로하고 오솔길을 따라 오르면 옛 궁터인 황학정이 나온다.
황학정
원래 황학정은 경희궁 회상전 북쪽에 지어진 궁술연습을 하던 활터에 있는 정자였다.
고종 광무 2년(1898) 지어졌으며, 1922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원래 이 자리는 오사정의 하나인 등과정이 있던 자리이다. 오사정이란 도성 안 서쪽에 세워진 다섯 개의 활터에 세워진 정자로, 옥동의 등룡정· 삼청동의 운룡정· 사직동의 대송정· 누상동의 풍소정· 필운동의 등과정이 그것이다.
지금은 오사정이 모두 없어졌으나, 이곳에서는 가끔 궁술행사를 열어 옛 무인들의 기개를 보여주고 있다.
사직단 위쪽에 위치한 황학정
내가 어렸을 때 휴일이나 방학 때 사직공원을 가면 참 많은 사람들이 황학정에 모여서
활을 쏘는 모습을 보며 신기해했던 생각이 난다. 그 거리가 100M는 족히 될 듯싶었는데
그 먼 거리에서 활 시휘를 당기면 관역에 정확히 꽃이는 것이 신기했었다.
독립문
독립문은 서대문구 현저동에 독립문 네거리에 위치해 있다.
갑오개혁 이후 자주독립의 의지를 다짐하기 위해 세운 기념물이다.
갑오개혁(1894∼1896)은 내정개혁과 제도개혁을 추진하였던 개혁운동이다. 그러나 외국세력의 간섭으로 성공하지 못하였고, 나라의 자주독립 또한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국민들은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서는 어떠한 간섭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중국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게 되었다.
서재필이 조직한 독립협회의 주도하에 국왕의 동의를 얻고 뜻있는 애국지사와 국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으며,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본떠 독립문을 완성하였다.
독립문의 옛 모습
버스가 정차한 방향이 서울역 방면, 왼쪽이 광화문, 오른쪽이 금화터널,
보고 있는 쪽이 무악재 방면입니다.
화강석을 쌓아 만든 이 문의 중앙에는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이 있고, 왼쪽 내부에는 정상으로 통하는 돌층계가 있다. 정상에는 돌난간이 둘러져 있으며, 홍예문의 가운데 이맛돌에는 조선왕조의 상징인 오얏 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그 위의 앞뒤에는 한글과 한자로 ‘독립문’이라는 글씨와 그 양옆에 태극기가 새겨져 있다. 문 앞에는 영은문주초(사적 제33호) 2개가 남아있다.
독립문은 내가 어렸을 때인 1979년에(초등 6년) 사직터널 쪽에서 금화산을 관통하여 연세대 앞으로 금화터널이 생기면서 고가도로가 놓여 졌고 고가도로 바로 밑 옆에 독립문이
위치하게 되자 70M 북쪽인 지금의 장소로 옮겨 놓았다. 아마 지금 같았으면 고가도로를 조금 우회하는 한이 있더라도 문화재를 옮기는 일은 없었을 것 같습니다.
현재의 독립문
알아두면 재미를 더하는 우리의 현판 이야기들..,
도성의 성문이나 궁궐의 문, 그 밖의 각종 건축물엔 그 이름과 의미, 유래 등을 담은 현판이 걸려 있다.
현판은 보통 가로쓰기에 3자 내외. 그런데 국보 1호인 숭례문(崇禮門 남대문)의 현판은
세로쓰기로 되어있다. 왜일까? 그 이유는 한양의 남쪽에 위치한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막기 위하여 세로로 길게 늘어뜨려 성문 밑을 막고 누르면 화기가 들어오지 못할 것이란
풍수학적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지금의 서울역 근처에 큰 연못을 파서 물을 가두어
두었는데 이 역시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함 이였으나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묻어
버리고 개발을 하였다.
또 다른 현판은 보물 1호인 동대문( 흥인지문 興仁之門 ) 현판이다. 동대문 현판은 글자의
수를 늘리어 4자로 만들고 두 자씩, 두 줄로 써넣었다. 이 또한 까닭이 있다.
흥인문(동대문) 또한 풍수학적으로는 지대가 낮고, 약하여 글자의 수와 행을 늘려 그 땅을
높이여 지세를 보완하려고 한 것이다.
이 처럼 풍수사상 역시 조선시대에는 우리의 삶과 땔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오늘날
에 이르고 있다.
숭례문 현판
흥인지문 현판
이상으로 민속학의 민속에 대하여 우리 주변에 있는 몇 가지 조사를 하여 보았다.
이번 조사를 통하여 이미 알고 있었던 내용도 있었지만, 새로운 사실도 많이 알아졌다.
그 사실은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불교나 유교와 같은 고등신앙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무속신앙이나 풍수와 같은 것에 기대어 살아온 것 같다.
조선 시대에도 보면 궁궐 내에 조금만한 절이나 사당을 모신 것이나 일 년에 두, 세 차례
하늘과 땅에 재사를 올리는 것을 보면 민간신앙의 대변인 무속 신앙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우리 민족의 삶에 뿌리 깊게 토착화 되어져있다고 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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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9.03.13
  • 저작시기2019.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1089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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