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수연산방으로 가는 길
1.1 수연산방은
1.2 수연산방으로
2. 이태준과 수연산방
2.1 이태준은
2.2 수연산방
3. 수연산방을 나서면서
1.1 수연산방은
1.2 수연산방으로
2. 이태준과 수연산방
2.1 이태준은
2.2 수연산방
3. 수연산방을 나서면서
본문내용
부각시켜, 완결된 구성법과 함께 한국현대 소설의 기법적인 바탕을 이룩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작중 인물들은 회의적·감상적·패배적 성격으로 부각되어 작품 전체가 허무와 서정에 깊이 침윤되었지만, 때로는 그 속에서 현실과 밀착된 시대정신에의 추구를 지향하기도 했다.
<문장(文章)>지를 주관하다가 광복 직전 철원에서 칩거하였으며, 광복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 포섭되어 활약하다가 월북하였다. 그의 단편 <해방전후(解放前後)>(1946)에서 이러한 문학적 변모를 확인할 수 있다. 작품에는 앞에 든 것 외에 소설집 <구원(久遠)의 여상(女像)>, <딸 삼형제>, <사상(思想)>, <해방전후> 등이 있으며, 문장론 <문장강화(文章講話)>가 있다.
그는 1933년 김기림, 정지용 등과 함께 일본에서 유행하던 신감각파의 영향을 받은 구인회를 결성하여 카프의 공리주의 문학을 반대하고 순수문학을 확립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인물에 대한 내관적인 묘사와 치밀한 구성을 통해 한국 근대 소설의 기법적인 바탕을 이룬 것으로 평가된다. <문장강화>라는 유명한 작문법서 집필. 1943년 <왕자호동>을 끝으로 절필 강원도 철원에 칩거하고, 해방 후 임화, 김남천 등과 함께 조선문학 건설본부 조직하였다. 1946년 2월 조선 문학가 동맹의 중앙 집행 위원회의 부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이 시기에 발표된 <해방전후>는 조선 문학가 동맹이 제정한 제1회 해방 기념 조선 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 미군정의 남로당 불법화로 월북하였다가 1953년 임화, 김남천 등과 함께 숙청당했다. 이태준은 그동안 몇몇 귀순자들의 증언에 의해 56년 숙청된 후 60년대말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2.2 수연산방
수연산방에서 가장 먼저 맞이 한 것은 고풍스러운 대문과 수연산방과 이태준을 알리는 안내문이다.
<수연산방의 고풍스러운 대문>
<상허 이태준과 그의 고택을 안내하는 글>
작가 이태준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1946년 38선을 넘어 월북한 뒤 소식이 끊긴 그의 문학은 한동안 금기시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의 <달밤>, <장마>, <밤길> 같은 단편들은 88년 해금이 된 후에야 소개되기 시작했다. 그가 가족과 함께 서울에 살던 시절 기거하던 수연산방은 한눈에 보기에도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다. 그때가 상허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던 때였다고 한다. 평생을 짙은 가난과 싸우며 살았던 그는 이 집에서 비로소 안정을 얻었다고 한다. 1930년부터 46년까지 상허 부부는 이 집에서 5남매를 낳았다.
지어질 당시에는 서남향으로 된 방이 세 개였다. 상허는 각 방에 죽향루, 문향루, 상심루라고 이름을 붙이고 작은 현판을 새겨 문 위에 걸어놓았다. 이 가운데 상심루는 한국전쟁 때 소실되어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높다란 대청마루가 보인다>
건물 안에 들어서면 높다란 대청마루와 마당이 깊은 집 구조가 아늑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건물 안에는 대청을 가운데 두고 방이 두 개인 전통 한옥 구조가 있고, 집안 구석구석에 상허 이태준의 섬세한 손길이 남아 있는 듯하지만, 아쉽게도 그의 흔적이 될 만한 유품은 대부분 없어졌다. 낮은 울타리 밑에 심어진 단풍과 키 작은 나무들이 정감어린 이곳은 상허의 손녀뻘인 조상명씨가 딸과 함께 전통찻집으로 운영하고 있다. 찻집 이름도 ‘수연산방’이다.
2.3 작품 속의 성북동
성북동으로 이사 온 \'나\'는 시냇물 소리와 쏴아 하는 술바람 소리 때문에, 그리고 황수건이란 사람을 만나고부터 이곳이 시골이란 느낌을 받는다. 우둔하고 천진한 품성을 지닌 황수건은 아내까지 거느리고 형님의 집에 얹혀살면서 학교 급사로 일하던 중 일 처리를 잘못하는 바람에 쫓겨난다. 그는 현재 원(정식) 배달원이 떼어 주는 20여 부의 신문을 배달하고 월 3원 정도의 보수를 받는 보조 배달원으로, 그의 유일한 희망은 원 배달원이 되는 것이다.
그는 \'나\'와 가깝게 지내면서, 집을 구하는 것에서부터 우두(牛痘)를 맞지 말라, 개를 키우지 말라는 등 여러 가지 실속 없는 참견을 한다. 그러나 그의 순진한 성격을 아는 \'나\'는 그의 참견을 끝까지 받아 준다.
그런데 성북동이 따로 한 구역이 되었으나 원 배달은커녕 \'똑똑치가 못하니까\' 보조 배달원 자리마저 떨어지고 만다. 황수건은 \'나\'에게 하소연을 한다. \'나\'는 그의 처지가 하도 딱해서 참외 장사라도 해보라고 돈 3원을 준다. 한동안 그는 참외도 가져오고 포도도 훔쳐 오는 등 \'나\'의 집에 잘 들렀으나, 참외 장사도 실패하고 끝내는 동서(同壻)의 등쌀을 견디지 못한 그의 아내마저 달아난다.
어느 늦은 밤, 그는 달만 쳐다보며 서툰 노래를 부른다. 전에 볼 수 없던 모습으로 담배를 피우면서……. \'나\'는 그를 부를까 하다가 그가 무안해 할까봐 얼른 나무 그늘에 몸을 숨긴다. 쓸쓸한 달밤이다.
<마당 구석에 위치한 원두막>
그의 작품《달밤》의 줄거리이다. 각박한 현실에 부딪혀 아픔을 겪는 삶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이태준은 대체로 일상적인 사소함에 패배당하는 인간을 그리고 있다. 이러한 패배주의자들에 대하여 독자가 연민을 느끼는 것은 서술자 또는 작중 인물 \'나\'의 동정적인 태도에 기인한다. \'달밤\'에서 \'나\'가 주인공 \'황수건\'을 대하는 태도 역시 그러한데, 이러한 동정심은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곳 수연산방에서의 안정된 생활 속에서 과거의 가난을 이곳 성북동으로 옮겨오지 않았나 생각한다. 성북동, 그곳을 둘러봤다. 그곳엔 산촌이 형성 되어있다. 아마도 그 시절에도 그런 마을이 형성 되어있던 것 같다. 그 시절의 빈민들을 보며 자신의 과거를 회상한 것이 아닐까?
3. 수여산방을 나서면서
수연산방 구석구석을 보면 옛 물건들이 많다. 더 구석구석을 둘러보고 싶었지만, 그 곳을 관리하는 분에게 눈치가 보여 참 아쉽다. 이곳에서 풍기는 엄숙한 분위기와 사뭇 다르게 시끄러운 잡담이 많이 들려왔다. 이곳에 올 때 문인들이 자주 들르는 곳이라 알고 갔다. 하지만 지금은 폐색 된 것일까?
<수연산방>
상허 이태준, 이곳에서 즐거울 한 때를 생각해본다. 그리고 이 아늑한 집에서 문에 열정을 쏟고 있엇을 그도 생각해본다.
그 밖의 사진들...
<문장(文章)>지를 주관하다가 광복 직전 철원에서 칩거하였으며, 광복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 포섭되어 활약하다가 월북하였다. 그의 단편 <해방전후(解放前後)>(1946)에서 이러한 문학적 변모를 확인할 수 있다. 작품에는 앞에 든 것 외에 소설집 <구원(久遠)의 여상(女像)>, <딸 삼형제>, <사상(思想)>, <해방전후> 등이 있으며, 문장론 <문장강화(文章講話)>가 있다.
그는 1933년 김기림, 정지용 등과 함께 일본에서 유행하던 신감각파의 영향을 받은 구인회를 결성하여 카프의 공리주의 문학을 반대하고 순수문학을 확립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인물에 대한 내관적인 묘사와 치밀한 구성을 통해 한국 근대 소설의 기법적인 바탕을 이룬 것으로 평가된다. <문장강화>라는 유명한 작문법서 집필. 1943년 <왕자호동>을 끝으로 절필 강원도 철원에 칩거하고, 해방 후 임화, 김남천 등과 함께 조선문학 건설본부 조직하였다. 1946년 2월 조선 문학가 동맹의 중앙 집행 위원회의 부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이 시기에 발표된 <해방전후>는 조선 문학가 동맹이 제정한 제1회 해방 기념 조선 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 미군정의 남로당 불법화로 월북하였다가 1953년 임화, 김남천 등과 함께 숙청당했다. 이태준은 그동안 몇몇 귀순자들의 증언에 의해 56년 숙청된 후 60년대말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2.2 수연산방
수연산방에서 가장 먼저 맞이 한 것은 고풍스러운 대문과 수연산방과 이태준을 알리는 안내문이다.
<수연산방의 고풍스러운 대문>
<상허 이태준과 그의 고택을 안내하는 글>
작가 이태준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1946년 38선을 넘어 월북한 뒤 소식이 끊긴 그의 문학은 한동안 금기시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의 <달밤>, <장마>, <밤길> 같은 단편들은 88년 해금이 된 후에야 소개되기 시작했다. 그가 가족과 함께 서울에 살던 시절 기거하던 수연산방은 한눈에 보기에도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다. 그때가 상허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던 때였다고 한다. 평생을 짙은 가난과 싸우며 살았던 그는 이 집에서 비로소 안정을 얻었다고 한다. 1930년부터 46년까지 상허 부부는 이 집에서 5남매를 낳았다.
지어질 당시에는 서남향으로 된 방이 세 개였다. 상허는 각 방에 죽향루, 문향루, 상심루라고 이름을 붙이고 작은 현판을 새겨 문 위에 걸어놓았다. 이 가운데 상심루는 한국전쟁 때 소실되어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높다란 대청마루가 보인다>
건물 안에 들어서면 높다란 대청마루와 마당이 깊은 집 구조가 아늑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건물 안에는 대청을 가운데 두고 방이 두 개인 전통 한옥 구조가 있고, 집안 구석구석에 상허 이태준의 섬세한 손길이 남아 있는 듯하지만, 아쉽게도 그의 흔적이 될 만한 유품은 대부분 없어졌다. 낮은 울타리 밑에 심어진 단풍과 키 작은 나무들이 정감어린 이곳은 상허의 손녀뻘인 조상명씨가 딸과 함께 전통찻집으로 운영하고 있다. 찻집 이름도 ‘수연산방’이다.
2.3 작품 속의 성북동
성북동으로 이사 온 \'나\'는 시냇물 소리와 쏴아 하는 술바람 소리 때문에, 그리고 황수건이란 사람을 만나고부터 이곳이 시골이란 느낌을 받는다. 우둔하고 천진한 품성을 지닌 황수건은 아내까지 거느리고 형님의 집에 얹혀살면서 학교 급사로 일하던 중 일 처리를 잘못하는 바람에 쫓겨난다. 그는 현재 원(정식) 배달원이 떼어 주는 20여 부의 신문을 배달하고 월 3원 정도의 보수를 받는 보조 배달원으로, 그의 유일한 희망은 원 배달원이 되는 것이다.
그는 \'나\'와 가깝게 지내면서, 집을 구하는 것에서부터 우두(牛痘)를 맞지 말라, 개를 키우지 말라는 등 여러 가지 실속 없는 참견을 한다. 그러나 그의 순진한 성격을 아는 \'나\'는 그의 참견을 끝까지 받아 준다.
그런데 성북동이 따로 한 구역이 되었으나 원 배달은커녕 \'똑똑치가 못하니까\' 보조 배달원 자리마저 떨어지고 만다. 황수건은 \'나\'에게 하소연을 한다. \'나\'는 그의 처지가 하도 딱해서 참외 장사라도 해보라고 돈 3원을 준다. 한동안 그는 참외도 가져오고 포도도 훔쳐 오는 등 \'나\'의 집에 잘 들렀으나, 참외 장사도 실패하고 끝내는 동서(同壻)의 등쌀을 견디지 못한 그의 아내마저 달아난다.
어느 늦은 밤, 그는 달만 쳐다보며 서툰 노래를 부른다. 전에 볼 수 없던 모습으로 담배를 피우면서……. \'나\'는 그를 부를까 하다가 그가 무안해 할까봐 얼른 나무 그늘에 몸을 숨긴다. 쓸쓸한 달밤이다.
<마당 구석에 위치한 원두막>
그의 작품《달밤》의 줄거리이다. 각박한 현실에 부딪혀 아픔을 겪는 삶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이태준은 대체로 일상적인 사소함에 패배당하는 인간을 그리고 있다. 이러한 패배주의자들에 대하여 독자가 연민을 느끼는 것은 서술자 또는 작중 인물 \'나\'의 동정적인 태도에 기인한다. \'달밤\'에서 \'나\'가 주인공 \'황수건\'을 대하는 태도 역시 그러한데, 이러한 동정심은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곳 수연산방에서의 안정된 생활 속에서 과거의 가난을 이곳 성북동으로 옮겨오지 않았나 생각한다. 성북동, 그곳을 둘러봤다. 그곳엔 산촌이 형성 되어있다. 아마도 그 시절에도 그런 마을이 형성 되어있던 것 같다. 그 시절의 빈민들을 보며 자신의 과거를 회상한 것이 아닐까?
3. 수여산방을 나서면서
수연산방 구석구석을 보면 옛 물건들이 많다. 더 구석구석을 둘러보고 싶었지만, 그 곳을 관리하는 분에게 눈치가 보여 참 아쉽다. 이곳에서 풍기는 엄숙한 분위기와 사뭇 다르게 시끄러운 잡담이 많이 들려왔다. 이곳에 올 때 문인들이 자주 들르는 곳이라 알고 갔다. 하지만 지금은 폐색 된 것일까?
<수연산방>
상허 이태준, 이곳에서 즐거울 한 때를 생각해본다. 그리고 이 아늑한 집에서 문에 열정을 쏟고 있엇을 그도 생각해본다.
그 밖의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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