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성장기의 사회환경
2. 득도와 저술
3. 문화사업과 독립운동
4. 불교사상
5. 사상적 의의
6. 문학세계와 문학사적 위치
7. 답사내용
8. 답사후기
2. 득도와 저술
3. 문화사업과 독립운동
4. 불교사상
5. 사상적 의의
6. 문학세계와 문학사적 위치
7. 답사내용
8. 답사후기
본문내용
로서 더욱 그 빛과 향기를 더해갈 것이 확실하다.
7. 답사 내용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492
[한용운(韓龍雲)선생 생가지 및 사당 \'만해사\']
이 곳은 일제 식민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며 불교 시인인 한용운(韓龍雲, 1879~1944) 선생께서 1879년 (고종 16년)에 태어난 곳이다. 선생은 1904년에 강원도 인제 내설악산의 오세암(五歲菴)에 출가하고, 1905년 백담사에서 득도하였다. 계명은 봉완이고, 법호는 만해, 법명은 용운이다. 1919년 3.1독립운동을 이끈 33인의 한사람으로, 독립선언서의 공약삼장을 작성하였다.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았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출간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서고 민족혼을 깨우려고 노력하였다. 1944년 5월 9일 서울 성북동 심우장에서 66세를 입적하니 유해는 망우리에 안장하였다. 선생은 세상을 마칠 때까지 불교를 통한 애국 청년운동과 일제에 항거하는 독립운동사상을 북돋워 일으키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이 추서되었다.
[만해 문학 체험관]
[만해 문학체험관 내의 한용운(韓龍雲)선생 밀납인형]
[한용운(韓龍雲)선생의 \'공약삼장\']
[만해 한용운(韓龍雲)선생 생가지 성역화기]
[한용운(韓龍雲) 시비 \'행인과 나룻배\']
[(좌)한용운(韓龍雲) 시비 \'알수 없어요\' (우)나손 김동욱(金東旭) 문학비]
[한용운(韓龍雲)선생 생가]
[한용운(韓龍雲)선생 생가]
[한용운(韓龍雲)선생 친필\'전대법륜\']
[한용운(韓龍雲)선생 조카딸이 살던 집, 얼마전까지관리사무소로 이용]
[만해사 삼문 \'금문\']
♣ 만해 한용운 선생의 일대기 ♣
男兒到處是故鄕 (남아도처시고향) 남아란 어디메나 고향인 것을
幾人長在客愁中 (기인장재객수중) 그 몇 사람 객수 속에 길이 갇혔나.
一聲喝破三千界 (일성갈파삼천계) 한 마디 큰소리 질러 삼천대천 세계 뒤흔드니
雪裡桃花片片飛 (설리도화편편비) 눈 속에 복사꽃 붉게 붉게 피네.
서울로 되돌아온 그는 먼저 민중의 입과 눈과 귀를 열게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종합교양잡지 유심 惟心 (1918년 9월 1일)을 창간하였다.
불교 근대화와 신문화 운동의 전개로서
주로 민족의 정통성과 자존성을 가진 우리 청년들에게 용기와 신념을 잃지
말라는 내용의 잡지였다.
여기에 기미 3 1 운동에 둥지로 규합될 육당 최남선, 최린 등이 글을 기고했다.
손병희 선생을 33인의 대표로 추대하고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에
한용운 스님의 \'공약 3장\'이 첨가되었다.
기미년 3월 1일, 종로 태화관에서 최린의 사회로 \"이제 우리는 조선의 독립을
선언했으니 죽어도 한이 없다\"는 만해 스님의 축사와 대한독립만세 세번을 선창하고
일경에 피습당해 마포경찰서로 잡혀가게 되었다.
스님은 옥중에서 옥중투쟁 3대원칙을 정하고는 몸소 실천에 옮겼다.
첫째는 변호사를 대지 말자는 것이었다. 내 나라를 내가 찾는데 누구에게
변호를 부탁할 것이냐, 변호해 줄 사람도 받을 사람도 없다는 것이었다.
둘째는 사식을 넣지 말자는 것이었다. 온 천지가 다 감옥인데 호의호식하려는
독립운동하지 않은 이상, 밖에서 넣어 주는 사식을 먹지 말자는 것이었다.
셋째는 보석을 요구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스님은 이렇게 3대원칙을 정해놓고
옥중에서까지도 철저하게 항거했다.
스님은 젊은이들을 사랑하며 모든 기대를 늘 그들에게 걸었다.
따라서 청년들이 좀 더 열심히 정진하기를 마음 깊이 바라고 있었다.
만지풍설(萬地風雪) 차고 거친 뜰에 쌓인 눈, 찬바람에 아름다운 향기를 토하려는
매화, 그는 매화나무를 바라볼 때마다 \"조국 청년들아! 너희들은 시대적 행운이다.
현대는 조국 청년들에게 행운을 주는 득의(得意)의 시대이다. 만지풍설 속에서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매화, 이것은 너희의 모습이다\"라고 말하면서 청년들에
게 저 매화의 정절을 닮으려고 역설하였다. 주위가 어떻고 환경이 어떻고
불우하다 슬프다 말하지 말고 눈보라 속에서 꽃피우는 매화의 정절을 닮으라 하며
일진의 청풍을 불어 넣기를 잊지 않았다.
민족운동가, 불교사상가, 근대시인으로 집액되는 만해는 청정심으로
극락정토를 지상에 꾸미려는 깊은 뜻을 버리지 않은 채 1944년 6월 29일 심우장에서
66세를 일기로 입적했다
학병 징병을 거부하고 일체의 배급을 거부하며 영양실조가 되었던 스님의
육신은 홀연히 사라졌다.
그러나 그의 법신은 영원히 이 조국 땅에 남아 역사의 등불이 된 것이다. 민족사의
암흑기에 수많은 사람이 있지만 부처님의 근본정신과 가르침을 이 땅에 심고자
노력한 이가 어디에 또 있는가.
그는 민족의 갈망을 절실하게 노래한 시인이었고 또 구국 일념으로 살아온
독립지사였고,가혹한 고난과 탄압 속에서도 위연함을 보여 지조를 꺽음이 없었다.
불굴의 투지로서 겨레를 이끌었다.
8. 답사 후기
승려 이며 시인, 독립운동가로 근대사를 지조있게 살다간 대표적 인물인 만해 한용운선생은 내가 살고있는 이웃의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태어나셨다. 자동차로 약 1시간정도 걸린 지척에 생가가 있었지만 “한국문학의 이해” 덕분에 떨리는 마음과 조금은 흥분된 마음으로 처음 방문하게 되었다.
학습자료에 올려진 사진을 보니 반가움에 한컷 담고 맨처음 만해체험관으로 향했다. 만해체험관은 님의 침묵으로 대표되는 만해의 시를 비롯해 그의 철학세계를 반영하는 60여점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으며, 어린이 체험실에는 만해 탁본교실과 함께 약 300여권의 도서가 마련되어 어린이들이 좀더 만해와 친근해지고 가까워질 수 있는 공간으로 되어 있었다. 주요 전시물로는 만해가 좌선중 진리를 깨닫고 지은 시 “오도송”과 만해의 불교개혁 이론서“조선불교유신론”과 통도사에서 대장경 열람후 집필한 불교경전 모음집 “불교대전”과 교수님께서 강의중 유심이란 잡지를 소개해 주셨는데 이곳에 만해가 창간한 종합잡지 “유심창간호”도 있었는데 반가웠다. 그리고 1926년 해동서간 초판본인 “ 님의침묵 초판본”도 있었다.
그 밖에 생가지와 사당 그리고 민족시비공원도 잘 정돈되어 있었다.
이곳을 둘러보면서 내 가슴속에는 어느덧 나라사랑정신이 자리잡고 있는 듯 가슴이 뿌듯해옴을 느꼈다
참으로 소중한 방문이었다.
7. 답사 내용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492
[한용운(韓龍雲)선생 생가지 및 사당 \'만해사\']
이 곳은 일제 식민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며 불교 시인인 한용운(韓龍雲, 1879~1944) 선생께서 1879년 (고종 16년)에 태어난 곳이다. 선생은 1904년에 강원도 인제 내설악산의 오세암(五歲菴)에 출가하고, 1905년 백담사에서 득도하였다. 계명은 봉완이고, 법호는 만해, 법명은 용운이다. 1919년 3.1독립운동을 이끈 33인의 한사람으로, 독립선언서의 공약삼장을 작성하였다.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았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출간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서고 민족혼을 깨우려고 노력하였다. 1944년 5월 9일 서울 성북동 심우장에서 66세를 입적하니 유해는 망우리에 안장하였다. 선생은 세상을 마칠 때까지 불교를 통한 애국 청년운동과 일제에 항거하는 독립운동사상을 북돋워 일으키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이 추서되었다.
[만해 문학 체험관]
[만해 문학체험관 내의 한용운(韓龍雲)선생 밀납인형]
[한용운(韓龍雲)선생의 \'공약삼장\']
[만해 한용운(韓龍雲)선생 생가지 성역화기]
[한용운(韓龍雲) 시비 \'행인과 나룻배\']
[(좌)한용운(韓龍雲) 시비 \'알수 없어요\' (우)나손 김동욱(金東旭) 문학비]
[한용운(韓龍雲)선생 생가]
[한용운(韓龍雲)선생 생가]
[한용운(韓龍雲)선생 친필\'전대법륜\']
[한용운(韓龍雲)선생 조카딸이 살던 집, 얼마전까지관리사무소로 이용]
[만해사 삼문 \'금문\']
♣ 만해 한용운 선생의 일대기 ♣
男兒到處是故鄕 (남아도처시고향) 남아란 어디메나 고향인 것을
幾人長在客愁中 (기인장재객수중) 그 몇 사람 객수 속에 길이 갇혔나.
一聲喝破三千界 (일성갈파삼천계) 한 마디 큰소리 질러 삼천대천 세계 뒤흔드니
雪裡桃花片片飛 (설리도화편편비) 눈 속에 복사꽃 붉게 붉게 피네.
서울로 되돌아온 그는 먼저 민중의 입과 눈과 귀를 열게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종합교양잡지 유심 惟心 (1918년 9월 1일)을 창간하였다.
불교 근대화와 신문화 운동의 전개로서
주로 민족의 정통성과 자존성을 가진 우리 청년들에게 용기와 신념을 잃지
말라는 내용의 잡지였다.
여기에 기미 3 1 운동에 둥지로 규합될 육당 최남선, 최린 등이 글을 기고했다.
손병희 선생을 33인의 대표로 추대하고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에
한용운 스님의 \'공약 3장\'이 첨가되었다.
기미년 3월 1일, 종로 태화관에서 최린의 사회로 \"이제 우리는 조선의 독립을
선언했으니 죽어도 한이 없다\"는 만해 스님의 축사와 대한독립만세 세번을 선창하고
일경에 피습당해 마포경찰서로 잡혀가게 되었다.
스님은 옥중에서 옥중투쟁 3대원칙을 정하고는 몸소 실천에 옮겼다.
첫째는 변호사를 대지 말자는 것이었다. 내 나라를 내가 찾는데 누구에게
변호를 부탁할 것이냐, 변호해 줄 사람도 받을 사람도 없다는 것이었다.
둘째는 사식을 넣지 말자는 것이었다. 온 천지가 다 감옥인데 호의호식하려는
독립운동하지 않은 이상, 밖에서 넣어 주는 사식을 먹지 말자는 것이었다.
셋째는 보석을 요구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스님은 이렇게 3대원칙을 정해놓고
옥중에서까지도 철저하게 항거했다.
스님은 젊은이들을 사랑하며 모든 기대를 늘 그들에게 걸었다.
따라서 청년들이 좀 더 열심히 정진하기를 마음 깊이 바라고 있었다.
만지풍설(萬地風雪) 차고 거친 뜰에 쌓인 눈, 찬바람에 아름다운 향기를 토하려는
매화, 그는 매화나무를 바라볼 때마다 \"조국 청년들아! 너희들은 시대적 행운이다.
현대는 조국 청년들에게 행운을 주는 득의(得意)의 시대이다. 만지풍설 속에서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매화, 이것은 너희의 모습이다\"라고 말하면서 청년들에
게 저 매화의 정절을 닮으려고 역설하였다. 주위가 어떻고 환경이 어떻고
불우하다 슬프다 말하지 말고 눈보라 속에서 꽃피우는 매화의 정절을 닮으라 하며
일진의 청풍을 불어 넣기를 잊지 않았다.
민족운동가, 불교사상가, 근대시인으로 집액되는 만해는 청정심으로
극락정토를 지상에 꾸미려는 깊은 뜻을 버리지 않은 채 1944년 6월 29일 심우장에서
66세를 일기로 입적했다
학병 징병을 거부하고 일체의 배급을 거부하며 영양실조가 되었던 스님의
육신은 홀연히 사라졌다.
그러나 그의 법신은 영원히 이 조국 땅에 남아 역사의 등불이 된 것이다. 민족사의
암흑기에 수많은 사람이 있지만 부처님의 근본정신과 가르침을 이 땅에 심고자
노력한 이가 어디에 또 있는가.
그는 민족의 갈망을 절실하게 노래한 시인이었고 또 구국 일념으로 살아온
독립지사였고,가혹한 고난과 탄압 속에서도 위연함을 보여 지조를 꺽음이 없었다.
불굴의 투지로서 겨레를 이끌었다.
8. 답사 후기
승려 이며 시인, 독립운동가로 근대사를 지조있게 살다간 대표적 인물인 만해 한용운선생은 내가 살고있는 이웃의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태어나셨다. 자동차로 약 1시간정도 걸린 지척에 생가가 있었지만 “한국문학의 이해” 덕분에 떨리는 마음과 조금은 흥분된 마음으로 처음 방문하게 되었다.
학습자료에 올려진 사진을 보니 반가움에 한컷 담고 맨처음 만해체험관으로 향했다. 만해체험관은 님의 침묵으로 대표되는 만해의 시를 비롯해 그의 철학세계를 반영하는 60여점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으며, 어린이 체험실에는 만해 탁본교실과 함께 약 300여권의 도서가 마련되어 어린이들이 좀더 만해와 친근해지고 가까워질 수 있는 공간으로 되어 있었다. 주요 전시물로는 만해가 좌선중 진리를 깨닫고 지은 시 “오도송”과 만해의 불교개혁 이론서“조선불교유신론”과 통도사에서 대장경 열람후 집필한 불교경전 모음집 “불교대전”과 교수님께서 강의중 유심이란 잡지를 소개해 주셨는데 이곳에 만해가 창간한 종합잡지 “유심창간호”도 있었는데 반가웠다. 그리고 1926년 해동서간 초판본인 “ 님의침묵 초판본”도 있었다.
그 밖에 생가지와 사당 그리고 민족시비공원도 잘 정돈되어 있었다.
이곳을 둘러보면서 내 가슴속에는 어느덧 나라사랑정신이 자리잡고 있는 듯 가슴이 뿌듯해옴을 느꼈다
참으로 소중한 방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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