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그 어떤 이름이 신을 모두 담을 수 있겠는가. 어떤 이름을 붙여도 그 이름은 그 분의 일부를 나타낼 뿐이다. 인간은 도저히 알 수 없는 그 분의 일부를 절대화시키는 것이야말로 자기 신념을 우상화시키는 것이다. 기독교는 절대적이라고 옹호하는 자신들의 신명의 한계를 인정하고, 서로의 신명을 존중하는 성숙한 모습을 보여야 할 때이다.
결론
신명 논쟁의 역사적 배경과 흐름, 논쟁의 논지들을 살펴보았다. 이 논쟁에서 재밌는 사실은 ‘하님’ 칭호를 옹호하는 입장이나 ‘하나님’ 칭호를 사용하는 입장이나 서로를 범신론, 우상숭배라고 비판하고 있다는 것이다. 상대의 주장에는 매우 엄격한 잣대를 사용하지만, 자신의 약점을 변론할 때는 매우 관대해진다.
선교의 효율과 토착화를 고려하자면, ‘하느님’이 신명으로 더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종교혼합의 차원에서 보자면, ‘하나님’의 신명이 일리가 있다. 또한 이미 각자 널리 사용되고 있고 익숙해진 신명을 일치시킨다는 것은 오히려 혼란을 야기할 것이다. 신명 논쟁의 시작은 다른 신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배타하는 태도에 있다고 보여 진다. 논쟁을 멈추고 각자의 장점과 위험성을 수용하고, 소통할 때가 아닐까.
참고문헌
김광식. “하나님과 하나님.” 『신학논단』 27 (1999/6), 115-130.
배철현. “하나님이냐 하느님이냐.” 『기독교사상』520 (2002/4), 189-198.
옥성득. “개신교 전래기의 신 명칭 용어 논쟁.” 『기독교사상』418 (1993/10), 200-222.
유응기. “하나님 개념에 관하여.” 『신학지남』153 (1971/6), 40-43.
결론
신명 논쟁의 역사적 배경과 흐름, 논쟁의 논지들을 살펴보았다. 이 논쟁에서 재밌는 사실은 ‘하님’ 칭호를 옹호하는 입장이나 ‘하나님’ 칭호를 사용하는 입장이나 서로를 범신론, 우상숭배라고 비판하고 있다는 것이다. 상대의 주장에는 매우 엄격한 잣대를 사용하지만, 자신의 약점을 변론할 때는 매우 관대해진다.
선교의 효율과 토착화를 고려하자면, ‘하느님’이 신명으로 더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종교혼합의 차원에서 보자면, ‘하나님’의 신명이 일리가 있다. 또한 이미 각자 널리 사용되고 있고 익숙해진 신명을 일치시킨다는 것은 오히려 혼란을 야기할 것이다. 신명 논쟁의 시작은 다른 신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배타하는 태도에 있다고 보여 진다. 논쟁을 멈추고 각자의 장점과 위험성을 수용하고, 소통할 때가 아닐까.
참고문헌
김광식. “하나님과 하나님.” 『신학논단』 27 (1999/6), 115-130.
배철현. “하나님이냐 하느님이냐.” 『기독교사상』520 (2002/4), 189-198.
옥성득. “개신교 전래기의 신 명칭 용어 논쟁.” 『기독교사상』418 (1993/10), 200-222.
유응기. “하나님 개념에 관하여.” 『신학지남』153 (1971/6), 4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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