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앞글 - 이론을 택한 이유
2. 이론 설명
3. 내가 겪은 사례
4. 영화 속의 칸트 ‘다크나이트’
5.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 교수철학
-참고문헌
2. 이론 설명
3. 내가 겪은 사례
4. 영화 속의 칸트 ‘다크나이트’
5.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 교수철학
-참고문헌
본문내용
죽이고 모두 자신이 했다고 하라며 고담시의 희생양, 필요악의 영웅, 다크나이트가 되어 사라진다. ‘살인하지 말라’는 정언명령을 어기고 칸트적 신념을 버린 것이다. 영화의 결말은 과연 지켜야할 것과 지키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또 그 기준은 무엇인가, 도덕법칙의 형식의 완벽함과 내용의 선함은 누가 판단해주는가, 결정을 내리기까지 고뇌한 한 인간(배트맨)의 성장은 그저 결과만 놓고 봤을 때 결코 참작될 수 없는 것인가 등을 깊이 생각하게 한다.
5.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학교라는 곳은 사회에서 배우지 않는 것들, 즉 정석적인 삶의 규칙을 가르쳐주는 곳이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교수철학은 칸트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거짓말 하지 말라’, ‘고자질 하지 말라’, ‘컨닝하지 말라’ 등 적어도 지켜져야 할 것들이나, 내가 어떤 규칙을 어김으로써 이득을 보는 것은 남들이 그 규칙을 지키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칸트에 회의감이 들지 않는 것이 아니다.
‘다크나이트’에서 살펴봤던 것처럼 조커처럼 자신만의 보편타당한 신념을 펼칠 수만 있다면 그에 따른 윤리적 충돌은 해결할 길이 없다. 오히려 사회에 나가면 공리주의적 사고가 훨씬 더 유연하고 사회성 충만한 사람으로서 살게 해준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런 부분은 학생이 사회에 나가서 몸소 깨닫는 것도 늦지 않고, 아직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 있을 때에는 사람으로서 지켜야 될 보편법칙, 그것도 뒤집어지기 전의 선한 법칙에 대해 배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틀린 칸트주의는 모르고 살아가기 때문에 알아봤자 만인의 공감을 얻긴 힘들 것이다.
예전에 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의 일이다. 시험 기간이었는데 어떤 학생이 쉬는 시간에 날 찾아와서 옆 학생이 컨닝을 했다고 몰래 말해주었다. 난 매우 난감했다. 왜냐면 나는 그 시간 감독이 아니었고 게다가 그 학생 둘은 매우 친한 사이였기 때문이다. 특히 고민한 부분이 뭐냐면 일단 컨닝한 학생을 불러다 꾸짖어야 하는 데 그 학생이 실토할 리가 없고, 그렇게 되면 고자질한 학생의 존재를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친구를 고자질한 학생이 잘했다고 말할 수도 없다. 고자질은 분명 나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 일을 모른척하고 넘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고자질한 학생은 선생님으로서 어떤 조치를 취해주길 바라는데 그렇지 않는다면 선생으로서의 의무를 저버린 것이니까 말이다.
아마 현장에 나가면 이런 종류의 일들이 비일비재할 것이다. 학생들 사이의 사소한 다툼, 학부모와의 갈등 등, 이런 상황마다 나는 칸트를 따르면 될 것 같다. 왜냐하면 ‘학교’이기 때문이다. 결정과 이익이 직결되는 ‘사회’가 아닌 ‘학교’ 이기 때문에 길게 놓고 봤을 때 교육적으로 더 큰 성장을 가져오는 건 공리주의가 아닌 칸트일 것이다. 더군다나 교사와 학생의 관계에서는 이익이 아닌 의무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교육적으로 더 낫다.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우하라는 말이 어울리는 곳 또한 학교다.
위의 경우도 그렇게 해결하였다. 일단 컨닝한 학생을 불러 컨닝은 나쁜 것이라고 일러주고, 고자질한 학생에게도 사실을 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친구를 고자질 하는 것 또한 옳지 않다고 말했다. 차라리 그 친구에게 직접 말을 하는 게 나았을 거라는 충고도 해주었다.
나름대로 현명하게 대처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생각하면 할수록 윤리문제는 알 수가 없다. 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일들도 남의 기준에서 보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세상에서 가장 까다로운 일이 보편법칙을 정하는 것 같다. ‘살인하지 말라’ 같은 정언명령은 확실히 반박의 여지가 없지만 사형제도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그 빛을 잃으니, 하물며 ‘약속을 지켜라’ 같은 정언명령은 얼마나 뒤집어지기 쉽겠는가? 그래서 파생된 규칙의무론과 행위의무론, 또 공리주의가 있겠지만 이 무수히 많은 이론들 중에 한 가닥 확실한 기준을 잡기가 어렵다. 어쩌면 윤리란 것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고리라는 말이 제일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하나의 결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번뇌와 사유들을 거친 사람과 그렇지 않고 결론에 도달한 사람들 사이엔 엄청난 도덕단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지켜야 할 것과 지키지 않아도 될 것, 그 사이엔 바로 그런 것들이 자리한다.
참고문헌
1. 현대사회와 윤리-윤리학의 역사와 쟁점
이종훈, 한면희 공저
2. 네이버 블로그와 영화리뷰
5.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학교라는 곳은 사회에서 배우지 않는 것들, 즉 정석적인 삶의 규칙을 가르쳐주는 곳이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교수철학은 칸트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거짓말 하지 말라’, ‘고자질 하지 말라’, ‘컨닝하지 말라’ 등 적어도 지켜져야 할 것들이나, 내가 어떤 규칙을 어김으로써 이득을 보는 것은 남들이 그 규칙을 지키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칸트에 회의감이 들지 않는 것이 아니다.
‘다크나이트’에서 살펴봤던 것처럼 조커처럼 자신만의 보편타당한 신념을 펼칠 수만 있다면 그에 따른 윤리적 충돌은 해결할 길이 없다. 오히려 사회에 나가면 공리주의적 사고가 훨씬 더 유연하고 사회성 충만한 사람으로서 살게 해준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런 부분은 학생이 사회에 나가서 몸소 깨닫는 것도 늦지 않고, 아직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 있을 때에는 사람으로서 지켜야 될 보편법칙, 그것도 뒤집어지기 전의 선한 법칙에 대해 배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틀린 칸트주의는 모르고 살아가기 때문에 알아봤자 만인의 공감을 얻긴 힘들 것이다.
예전에 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의 일이다. 시험 기간이었는데 어떤 학생이 쉬는 시간에 날 찾아와서 옆 학생이 컨닝을 했다고 몰래 말해주었다. 난 매우 난감했다. 왜냐면 나는 그 시간 감독이 아니었고 게다가 그 학생 둘은 매우 친한 사이였기 때문이다. 특히 고민한 부분이 뭐냐면 일단 컨닝한 학생을 불러다 꾸짖어야 하는 데 그 학생이 실토할 리가 없고, 그렇게 되면 고자질한 학생의 존재를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친구를 고자질한 학생이 잘했다고 말할 수도 없다. 고자질은 분명 나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 일을 모른척하고 넘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고자질한 학생은 선생님으로서 어떤 조치를 취해주길 바라는데 그렇지 않는다면 선생으로서의 의무를 저버린 것이니까 말이다.
아마 현장에 나가면 이런 종류의 일들이 비일비재할 것이다. 학생들 사이의 사소한 다툼, 학부모와의 갈등 등, 이런 상황마다 나는 칸트를 따르면 될 것 같다. 왜냐하면 ‘학교’이기 때문이다. 결정과 이익이 직결되는 ‘사회’가 아닌 ‘학교’ 이기 때문에 길게 놓고 봤을 때 교육적으로 더 큰 성장을 가져오는 건 공리주의가 아닌 칸트일 것이다. 더군다나 교사와 학생의 관계에서는 이익이 아닌 의무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교육적으로 더 낫다.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우하라는 말이 어울리는 곳 또한 학교다.
위의 경우도 그렇게 해결하였다. 일단 컨닝한 학생을 불러 컨닝은 나쁜 것이라고 일러주고, 고자질한 학생에게도 사실을 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친구를 고자질 하는 것 또한 옳지 않다고 말했다. 차라리 그 친구에게 직접 말을 하는 게 나았을 거라는 충고도 해주었다.
나름대로 현명하게 대처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생각하면 할수록 윤리문제는 알 수가 없다. 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일들도 남의 기준에서 보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세상에서 가장 까다로운 일이 보편법칙을 정하는 것 같다. ‘살인하지 말라’ 같은 정언명령은 확실히 반박의 여지가 없지만 사형제도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그 빛을 잃으니, 하물며 ‘약속을 지켜라’ 같은 정언명령은 얼마나 뒤집어지기 쉽겠는가? 그래서 파생된 규칙의무론과 행위의무론, 또 공리주의가 있겠지만 이 무수히 많은 이론들 중에 한 가닥 확실한 기준을 잡기가 어렵다. 어쩌면 윤리란 것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고리라는 말이 제일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하나의 결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번뇌와 사유들을 거친 사람과 그렇지 않고 결론에 도달한 사람들 사이엔 엄청난 도덕단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지켜야 할 것과 지키지 않아도 될 것, 그 사이엔 바로 그런 것들이 자리한다.
참고문헌
1. 현대사회와 윤리-윤리학의 역사와 쟁점
이종훈, 한면희 공저
2. 네이버 블로그와 영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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