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답사준비
일정
자하철 노선표
기행
감상문
인터넷조사
운동주 그는은 누구인가
연력
윤동주 시비 이야기
일정
자하철 노선표
기행
감상문
인터넷조사
운동주 그는은 누구인가
연력
윤동주 시비 이야기
본문내용
주기로 되었는데 최동문은 출판뿐 아니라 시비 건립까지 사재를 희사하기로 되었다 한다. - 「연희춘추」 제37호, 1955년 2월 2일
그러나 무엇 때문이었는지 이때의 시비 건립계획이 계속 추진되지 못했다. 그러다 1962년에 이르러 연세문학회 주관으로 윤동주 시비 건립기금 모집에 대한 광고가 「연세춘추」(1962년 4월 9일)에 게재되었으나 그후 소식도 또 묘연해 졌다. 아마도 최초의 건립계획 이후 4·19혁명과 이어서 교내 사정이 분분해서 계획이 제대로 진척되지 못한 것 같았다. 이후 문과대학 전형국 학장 때 이르러서야 윤동주시비 건립준비위원회가 구성되고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되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전말을 김윤경 교수는 이렇게 적어 놓았다.
\"학교에서 집에 오니 오늘 저녁 여섯시에 윤동주시비 건립준비위원회가 있다고 전화가 왔다 하였다. 전일에는 6일이라 하였기에 학교에 전화로 물었더니 지금 개회중이라 하기에 곧 갔으나 40분이 늦었다. 전형국 전 학장 때 교수회에서 추진하기로 결의하고 이를 전교생과 교직원, 동문, 일반 유지에 거두기로 하였다 했다. 학생처장 성내운씨, 전형국 전 학장은 상치되는 일로 못 나오고 조의설 교수, 현 문과대학 학장 손보기, 국문과 박영준 과장, 연세춘추 최기준 주간, 유족 대표로 그 아우 윤일주들이 모였다. 학생회가 주장이 되고 위원회는 지도위원으로 할 것과 학생의 출연은 50만원으로 하여 유족, 교직원, 동문 유지에서 10만원을 거두어 모두 60만원으로 하자고 결의하였다. 그리고 비석 세울 자리는 학생회관 앞으로 하자는 말이 있었으나 최기준군이 백양로에서 학교 뜰로 오르는 계단 중간 좌우편 장미 꽃밭이 가장 좋다는 의견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총장과 의논하여 정하기로 하고 회의를 끝냈다.\"
가장 큰 논란거리는 시비를 세울 자리였던 것 같았다. 그리하여 한때는 시비 건립 장소를 학생회관 내부로 잠정 결정되었다고 「연세춘추」 제469호(1967년 6월 12일)에 발표되기도 했다. 그러다 마침내 옛날 윤동주 시인이 기거하던 기숙사 앞 현재의 위치로 결정되었다 하였다. 그리고 시비 설계도는 건축가이자 동국대학 교수인 윤시인의 아우 윤일주씨 작품으로 채택하고 제막식은 학생의 날인 11월 3일로 확정하였다고 발표되었다.(「연세춘추」 제514호, 1968년 9월 23일) 그러나 그때까지 11월 3일이 일요일인지 미쳐 깨닫지 못한 모양이었다. 제막식이 임박해서야 부랴부랴 @@월 @일로 고쳤다.
드디어 @@월 @일 토요일 오전 11시, 많은 내외 귀빈과 유족 그리고 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제막식이 엄숙하게 거행되었다. 그리고 동생 윤일주 교수에 의해 윤동주 시집 판권 기증 의식도 배풀어졌다.
\"총학생회는 지난 시비건립 모금에서 초과 달성된 95만 5천여 원중 공사비 64만원을 제한 30만 6천여 원을 고 윤동주 장학기금으로 마련하기로 결정하였다. 한편 유족측에서도 제막식 때 고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판권을 본 장학기금으로 기증한 바 있다\" - 「연세춘추」 제520호, 1968년 11월 11일
그러나 무엇 때문이었는지 이때의 시비 건립계획이 계속 추진되지 못했다. 그러다 1962년에 이르러 연세문학회 주관으로 윤동주 시비 건립기금 모집에 대한 광고가 「연세춘추」(1962년 4월 9일)에 게재되었으나 그후 소식도 또 묘연해 졌다. 아마도 최초의 건립계획 이후 4·19혁명과 이어서 교내 사정이 분분해서 계획이 제대로 진척되지 못한 것 같았다. 이후 문과대학 전형국 학장 때 이르러서야 윤동주시비 건립준비위원회가 구성되고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되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전말을 김윤경 교수는 이렇게 적어 놓았다.
\"학교에서 집에 오니 오늘 저녁 여섯시에 윤동주시비 건립준비위원회가 있다고 전화가 왔다 하였다. 전일에는 6일이라 하였기에 학교에 전화로 물었더니 지금 개회중이라 하기에 곧 갔으나 40분이 늦었다. 전형국 전 학장 때 교수회에서 추진하기로 결의하고 이를 전교생과 교직원, 동문, 일반 유지에 거두기로 하였다 했다. 학생처장 성내운씨, 전형국 전 학장은 상치되는 일로 못 나오고 조의설 교수, 현 문과대학 학장 손보기, 국문과 박영준 과장, 연세춘추 최기준 주간, 유족 대표로 그 아우 윤일주들이 모였다. 학생회가 주장이 되고 위원회는 지도위원으로 할 것과 학생의 출연은 50만원으로 하여 유족, 교직원, 동문 유지에서 10만원을 거두어 모두 60만원으로 하자고 결의하였다. 그리고 비석 세울 자리는 학생회관 앞으로 하자는 말이 있었으나 최기준군이 백양로에서 학교 뜰로 오르는 계단 중간 좌우편 장미 꽃밭이 가장 좋다는 의견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총장과 의논하여 정하기로 하고 회의를 끝냈다.\"
가장 큰 논란거리는 시비를 세울 자리였던 것 같았다. 그리하여 한때는 시비 건립 장소를 학생회관 내부로 잠정 결정되었다고 「연세춘추」 제469호(1967년 6월 12일)에 발표되기도 했다. 그러다 마침내 옛날 윤동주 시인이 기거하던 기숙사 앞 현재의 위치로 결정되었다 하였다. 그리고 시비 설계도는 건축가이자 동국대학 교수인 윤시인의 아우 윤일주씨 작품으로 채택하고 제막식은 학생의 날인 11월 3일로 확정하였다고 발표되었다.(「연세춘추」 제514호, 1968년 9월 23일) 그러나 그때까지 11월 3일이 일요일인지 미쳐 깨닫지 못한 모양이었다. 제막식이 임박해서야 부랴부랴 @@월 @일로 고쳤다.
드디어 @@월 @일 토요일 오전 11시, 많은 내외 귀빈과 유족 그리고 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제막식이 엄숙하게 거행되었다. 그리고 동생 윤일주 교수에 의해 윤동주 시집 판권 기증 의식도 배풀어졌다.
\"총학생회는 지난 시비건립 모금에서 초과 달성된 95만 5천여 원중 공사비 64만원을 제한 30만 6천여 원을 고 윤동주 장학기금으로 마련하기로 결정하였다. 한편 유족측에서도 제막식 때 고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판권을 본 장학기금으로 기증한 바 있다\" - 「연세춘추」 제520호, 1968년 11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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