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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가 어떤 식으로 나타날 수 있는지가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 진 <127시간>에서는 다소 분위기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주인공은 바위에 끼어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강인한 생명력을 보여준다. 가족, 연인 등을 떠올리며 끊임없이 살기 위해 발버둥 친다. 하지만 주인공 에런이 마침내 팔을 잘라내는 결단을 내린 장면에서 이질적인 장면 하나가 등장한다. 카메라가 아래에서 위로 비추며 애런이 자신의 신경을 끊어내며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데 난데없이 어린아이의 모습이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주인공이 팔을 자르는 것을 지켜보며 비웃는 듯 묘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이 장면을 과연 대니보일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연출했을지 궁금했다. 마지막까지 가족들을 떠올리며 희망을 말하다가 갑자기 희망 따윈 없다는 듯 비웃어버린다. 이 전작까지의 영화의 결말을 생각해 보면 대니보일은 절대 현실을 긍정적으로 바라 보지 않는다. 이 장면에서도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운명이나 희망에 기대 살아난다는 기대를 짓밟아 버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오히려 순수한 얼굴을 한 아이가 주인공의 처절한 사투를 비웃는 모습은 희망이라기 보다는 지지 않으려는 싸움과 더 가까울 것 같다. 투지, 인간 본연의 생명력에 더 집중하라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결과적으로 에런이 자신의 팔을 완전히 잘라냄과 동시에 아이의 환영은 사라진다. 비로소 자유로워 진다. 운명이나 희망이 만들어 낸 해피엔딩이 아니라 주인공 자신이 살기를 ‘선택’했기 때문에. 대니보일이 아이의 환영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건 이게 아닐까 싶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 진 <127시간>에서는 다소 분위기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주인공은 바위에 끼어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강인한 생명력을 보여준다. 가족, 연인 등을 떠올리며 끊임없이 살기 위해 발버둥 친다. 하지만 주인공 에런이 마침내 팔을 잘라내는 결단을 내린 장면에서 이질적인 장면 하나가 등장한다. 카메라가 아래에서 위로 비추며 애런이 자신의 신경을 끊어내며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데 난데없이 어린아이의 모습이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주인공이 팔을 자르는 것을 지켜보며 비웃는 듯 묘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이 장면을 과연 대니보일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연출했을지 궁금했다. 마지막까지 가족들을 떠올리며 희망을 말하다가 갑자기 희망 따윈 없다는 듯 비웃어버린다. 이 전작까지의 영화의 결말을 생각해 보면 대니보일은 절대 현실을 긍정적으로 바라 보지 않는다. 이 장면에서도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운명이나 희망에 기대 살아난다는 기대를 짓밟아 버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오히려 순수한 얼굴을 한 아이가 주인공의 처절한 사투를 비웃는 모습은 희망이라기 보다는 지지 않으려는 싸움과 더 가까울 것 같다. 투지, 인간 본연의 생명력에 더 집중하라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결과적으로 에런이 자신의 팔을 완전히 잘라냄과 동시에 아이의 환영은 사라진다. 비로소 자유로워 진다. 운명이나 희망이 만들어 낸 해피엔딩이 아니라 주인공 자신이 살기를 ‘선택’했기 때문에. 대니보일이 아이의 환영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건 이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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