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와유물유적4-교재 속 조선시대와 관련된 부분을 읽고, 자신이 조선시대 유적지-도산서원-를 둘러본 경험을 정리할 것0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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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문화와유물유적4-교재 속 조선시대와 관련된 부분을 읽고, 자신이 조선시대 유적지-도산서원-를 둘러본 경험을 정리할 것0k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 론
Ⅱ. 본 론
1. 서원의 소개
1) 서원의 기원과 역할
2) 서원의 구성과 배치

2. 도산서원과 관련된 세부정보
1) 도산서원 교통편
2) 주제선정 기준 및 이유
3) 도산서원 탐방의도
4) 도산서원 소개

3. 도산서원 탐방기
1) 도산서당
2) 도산서원
3) 영남 유학의 중심 '도산서원'
4. 나의 제언
Ⅲ. 결 론
참고자료

본문내용

운영규칙을 정하고 서적을 펴내는 등 서원 교육의 바탕을 마련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서원의 건립과 운영에 이황이 적극적이었던 이유는 서원교육을 통해 선비들이 성인(성인)이 되는 참다운 공부 방법을 뿌리내릴 수 있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이황은 천명을 깊이 이해하고 그 속에서 아무런 구애 없이 노니는 높은 경지의 정신 수양을 학문과 수학의 목표로 삼았다. 천명(천명)을 이해한다는 것은 이 세상을 움직이는 가장 근원적인 원리를 이해한다는 것이었고, 인식 주체인 나와 인식 대상의 객체 간의 대립과 간극을 없애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참다운 인간, 사람다운 사람의 길을 깨닫고 바르게 살 수 있다 여긴 것이다.
이황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공부는 자연 속에서 마음을 투명하게 하고 사심(사심)이 개입되지 않는 마음공부였다. 그러한 공부의 요체가 경(경)이었다. 경이란 극기복례(극기부례), 즉 자기 자신의 욕심과 사심을 이기고 마침내 예의 세계로 나가는 것이었다. 이황에게 서당과 서원은 스스로 이러한 경 공부를 할 수 있고 후학들에게 경을 가르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이황이 서원교육을 중시했던 또 다른 이유는 한 시대를 책임지는 사림, 즉 진정한 선비를 키워내기 위해서였다. 조선 시대 선비들의 삶의 목표이자 공부의 목표는 ‘성인(성인)’과 ‘군자(군자)’가 되는 것이었다. 이황은 자제와 함께 도산서원으로 가는 산길에서 “소용돌이에 백로는 마음 고우라 미역 감고, 외로이 선 나무는 꽃 피어 절로 환하네.”라는 두자미의 시 한 구절을 두고 그 의미를 이렇게 설명한다.
군자는 억지로 하고자 함이 없이 저절로 그리하여야 한다는 것이 이 시의 뜻에 꼭 맞는다. 배우는 사람은 모름지기 이를 체험하여 그 뜻을 바르게 하여 이익을 꾀하지 말 것이며, 도를 밝히고 공(공)을 헤아리지 말아야 한다. 만일 털끝만큼이라도 억지로 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학문이라 할 수 없다.
이황이 말하는 공부의 경지는 공자가 말한 “마음이 원하는 바대로 따라도 법도를 넘지 않는” 경지이다. 서원의 교육을 통해 작위적이거나 인위적으로,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도덕과 예를 실천하는 인간, 즉 군자를 키우고자 하였다.
1570년(선조 3) 이황이 작고한 다음 예안과 영천(지금의 영주), 그리고 안동의 유림과 문인들은 이황의 서원 건립을 서둘렀다. 예안은 이황은 고향이었고, 영천은 처향(처향), 안동은 선향(선향)으로 모두 이황과 연고가 있었다. 예안에는 이황의 발의로 몇 년 전에 세워진 역동서원이 있어 새로 서원을 짓는 것을 반대하는 의견도 있었지만 4년 동안 절충을 한 결과 이황이 생전에 세운 서당과 정사를 근간으로 서원을 만들기로 하였다.
그 때문에 지금의 도산서원 초입에는 농운정사와 도산서당이 있다. 퇴계 사후에도 도산서원에서는 이황의 교육철학을 충실히 계승해 지금의 심포지엄이나 세미나라 할 수 있는 강회(강회)가 열렸고 국내외 정세와 흐름에 맞는 학문적 대안과 자구책을 모색하는 모임과 토론들이 이루어지는 등 교육 활동과 학술 활동, 서적 간행 등이 꾸준히 이어져 왔다.
Ⅲ. 결 론
조선시대의 서원은 사립 교육기관을 대표하는 시설로서, 중세 동아시아의 중요한 사상 중의 하나인 성리학이 조선에 전래되어 조선 사회에 정착형성한 산실로써, 중국의 주희가 집대성한 성리학이 서원에서 중국, 일본과 다른 모습으로 발전하였다. 조선시대의 서원은 성리학인 지향하는 자연관과 한국의 문화적 전통이 반영된 교육 유산의 특출한 전형으로, 특히 서원의 건축 공간은 성리학적 가치관, 세계관, 자연관이 반영된 물리적 표상이다. 2019년 5월 유네스코의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는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할 것을 권고했다.
퇴계는 34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로 벼슬을 시작하여 43세 때까지 대체로 순탄한 관료 생활을 보낸다. 종3품인 성균과 대사성에 이른 43세의 퇴계는 이 때부터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갈 뜻을 품는다. 퇴계는 50세 이후에는 고향의 한적한 시냇가에 한서암과 계상서당 및 도산서당을 세우고,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퇴계의 중요한 저술 또한 주로 노년으로 접어드는 50대 이후에 이루어졌다. 그의 저술 가운데 천명도설(천명도설)과 천명도설후서(천명도설후서), 고봉 기대승(고봉 기대승)과의 8년간에 걸친 사단칠정논변(사단칠정록변), 주자서절요(주자서절요), 자성록(자성록), 전습록논변(전습록록변), 무진육조소(무진육조소), 성학십도(성학십도)등은 한국유학사상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대표적인 저술이다. 60세에 도산서당을 지어 스스로 학문을 연구하고 후진을 인도하는데 힘썼는데 그의 강학은 사망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정문을 들어서서 전교당으로 도산서당과 농운정사 뒤로 보이는 똑같은 모양의 건물이 광명실 인데 이곳은 서고(서고)다. 퇴계가 소장하던 책들과 서간집, 여러 임금께서 내려주신 책들이 이곳에 1300여종 5000여책의 장서가 소장되어 있었으나 2003년4월에 국학진흥원으로 옮겨서 잘 보존되고 있다
현 사회적 흐름을 보면 인륜 질서가 무너지는 현실에서 서원은 지방 사회의 전통 문화 보존의 중심체로서, 청소년 수련장이나, 예절 교육의 장으로서, 또는 전통 문화를 전수하는 섬머 스쿨을 개설하든지 등의 다양한 활동을 통해 박제화 된 구경거리가 아닌 살아 움직이는 공간으로 활용되었으면 한다.
참고자료
-공용, 2009, 문화유산, 조선시대 서원의 교육적 역할과 기능
-김봉규, 2020, 영남일보, 안동 도산서원(상)...퇴계가 꿈꾼 유교적 이상향
-최영진(2007). 퇴계 이황. 살림.
-이명수(2006). 퇴계 이황이 들려주는 이야기. 자음과 모음.
-이상해(2002). 서원. 열화당.
-「조선후기의 교원생고」(송찬식,『국민대학교 논문집』11,1976)
-「조선전기 서원과 향약」(국사편찬위원회,『한국사론』 8,1980)
-「조선서원의 성립과정」(정만조,『한국사론』 8,1980)
-「퇴계이황의 서원론」(정만조,『한우근박사 정년기념 논문집』,1981)
위키페디아, https://ko.wikipedia.org/wi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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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20.11.18
  • 저작시기20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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