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성어와 인물로 보는 문화사 -춘추 시대 晉의 멸망, 전국 시대 趙·魏·韓의 탄생을 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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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사성어와 인물로 보는 문화사 -춘추 시대 晉의 멸망, 전국 시대 趙·魏·韓의 탄생을 알리다-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들어가며
Ⅰ-1. 목적 및 주제
Ⅰ-2. 자료 및 진행 방식
Ⅱ. 치열했던 춘추전국 시대
Ⅱ-1. 晉 : 승승장구하다 세 나라로 쪼개지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다.
Ⅱ-2. 趙 : 호복기사로 위세를 떨쳤지만 진(秦)나라에 삼켜지다.
(1) 武靈王 : 胡服騎射로 조나라를 강대국으로 만들다.
(2) 惠文王 : 두 인재 염파와 인상여의 화해와 우정이 빛을 내다.
(2)-1. 藺相如 : 검을 쥐지 않았지만 조나라의 보옥을 지킨 조나라의 보물
(2)-2. 廉頗 : 탁월한 무술 실력으로 조나라에 충성을 바친 인물
(2)-3. 刎頸之交 : 인상여와 염파의 화해와 우정
(3) 장평 전투 : 40만 명이 생매장 되고 재기할 수 없는 상처를 새기다.
(3)-1. 平原君 : 수천 명 식객을 거느린 인품으로 조나라를 강대국으로 만들다.
(3)-2. 장평 전투의 전개 : 40만 명이 생매장 되고 재기할 수 없는 상처를 새기다.
Ⅱ-3. 魏 : 뛰어난 인재는 많았으나 제대로 붙잡지 못해 멸망의 길을 걷다.
Ⅱ-4. 韓 : 全國七雄이었지만 조용히 秦에 묻히고 후에 같은 발음의 漢에 묻히다.
Ⅲ. 마치며 : 출신이 복잡한 呂不韋는 웬만한 정치가를 능가하는 대상인이었다.

본문내용

양후는 소왕의 외삼촌으로 어린 소왕 대신 국정을 맡은 양후는 소왕이 너무 어렸으므로 위염에게 국정을 맡았다. 자신이 양후로 봉해진 후 위염은 위나라를 쳤고, 이후 상국(相國)이 되고나서는 한 때 위나라를 공격하여 도읍인 대량(大梁)을 포위하기도 했다. 위나라가 진(秦)나라와의 약속을 등지고 제나라와 합종을 맺었는데 이때도 양후가 위나라를 다시 공격했다. 위 문후의 탁월한 인재 등용 능력을 바탕으로 전국시대 초기 전국칠웅답게 강국이었던 위나라는 결국 조나라처럼 진(秦)나라에 멸망한 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Ⅱ-4. 韓 : 全國七雄이었지만 조용히 秦에 묻히고 후에 같은 발음의 漢에 묻히다.
한(韓)나라는 진(秦)나라 시황제가 그토록 만나고 싶어했던 韓非子(한비자)가 태어난 나라이자, 진(晉)에서 분리되어 조나라, 위(魏)나라와 함께 전국칠웅으로 불렸던 나라다. 한나라는 초기부터 재상을 잃는 등 전성기를 맞이하는 길이 순탄치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한나라 재상을 죽인 인물도 한나라 출신이었다. 바로 자객열전에 나오는 政(섭정)이었다.
政(섭정)은 실수로 사람을 죽이고 어머니와 누이와 함께 제나라로 도망쳐 백정으로 살았다. 그에게는 엄중자(嚴仲子)라는 벗이 있었는데, 어느 날 그가 귀한 음식과 황금을 들고 섭정을 찾아와 노모의 장수를 축원해줬다. 더불어 섭정의 의협심을 칭찬하며 자신의 원수를 갚아달라고 청했는데, 섭정은 노모를 봉양해야 하는 처지를 들어 거절했다. 세월이 흘러 노모가 죽고 상복을 벗은 후, 섭정은 지난 날 백정 신분인 자신을 알아주고 사귐을 이어온 엄중자를 생각하여 그를 찾아가 원수가 누구냐고 물었다. 그 원수는 한나라의 재상 俠累(협루)로, 한나라 애후(哀后)의 총애를 받던 엄중자를 질시하여 그를 모함하고 떠돌이 신세로 만든 장본인이었다. 섭정은 그 길로 협루를 찾아가 죽인 후, 스스로 얼굴 가죽을 벗기고 눈알을 도려낸 뒤 배를 갈라 내장을 끄집어내고 죽었다.
재상 俠累(협루)가 살해당하는 아픔을 겪은 한나라는 소후(昭侯) 때 申不害(신불해)가 새로 재상이 된 후 전성기를 누렸다. 그는 법가 사상가 중 한명이었는데 법령인 형명 사상을 주장했으며, 군주가 신하들을 지배하는 방식으로 방식인 술(術)을 강조했다. 그의 사상은 훗날 한비자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소불해가 15년 동안 재상으로 있으면서 관료체제를 정비하고 부국강병책을 취해 강국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진(秦)나라의 힘이 강성해짐에 다른 나라처럼 한나라 역시 국력이 쇠해짐을 느꼈다. 이 때 소진은 다른 나라들과 함께 합종책을 바탕으로 연합해 진(秦)나라를 견제하고자 했다. 한나라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소진은 한나라를 방문하고는 선혜왕(宣王)에게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전하, 한나라는 강한 군대를 가진 나라인데 싸워 보지도 않고 진에 굴복한다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고 진나라는 상국으로 만족하지 않고 한나라의 땅을 요구할 것이옵니다. 옛말에 차라리 닭 부리가 될지언정 소꼬리는 되지 말라 라는 말도 있지 않사옵니까.”
선혜왕은 소진의 계구우후(鷄口牛後) 조언을 듣고는 다른 나라처럼 합종책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장의의 연횡책으로 나라들 간 연합이 와해되고 한나라는 진(秦)나라의 공격을 받으면서 멸망의 늪이 그림자처럼 다가옴을 느끼고 있었다. 이 때 후에 진(秦) 시황제가 되는 진(秦)나라 왕 政(정)은 언젠가 한비자가 저술한 『고분(孤憤)』과『오두(五)』를 읽고는 자신의 통일대업에 필요한 사람이라고 여겼다.
“이 사람을 한번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政(정)은 李斯(이사)에게 감탄을 연발했다. 그러자 이사는 책의 저술자가 한비자라고 말했다. 사실 진(秦)왕 政(정)이 한나라를 공격한 목적은 한비자를 얻는 것이었다. 진(秦)나라는 한비자를 보내줄 것을 요구했고 한비자는 사신의 자격으로 진(秦)나라를 방문했다. 당시 한나라는 허영과 사치에 빠진 채 멸망의 절벽을 향해 가고 있었다. 진(秦)나라의 공격을 늦추고자 한나라 왕 安(안)은 한비자를 사신으로 보내 진(秦)왕 政(정)의 환심을 사고자 했다.
그러나 진(秦)나라에는 한비자와 동문수학했지만 한비자의 지혜와 재능에 열등감을 느끼고 있던 동학 이사가 있었다. 이사는 진시황의 총애를 잃고 싶지 않았다. 비록 말하는 솜씨는 자신보다 뒤처지지만 다른 면에서는 뛰어난 한비자가 진시황의 총애를 얻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에게 내재했는지도 모른다. 결국 이사의 모함으로 자결을 강요받은 한비자는 죽었고, 한나라 왕의 계획도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한나라는 그대로 기원전 230년 진(秦)나라에게 멸망되고 그 땅은 영천군(潁川郡)이 되면서 연합했던 다른 나라들과 같이 멸망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Ⅲ. 마치며 : 출신이 복잡한 呂不韋는 웬만한 정치가를 능가하는 대상인이었다.
빈객 3000명을 모아 여씨춘추(呂氏春秋)를 집필하고 一字千金(일자천금)을 외치며 의기양양했던 呂不韋(여불위)는 본래 출신이 복잡하다. 어떤 곳에서는 위(魏)나라 복양(陽) 사람이라고 하는 반면, 奇貨可居(기화가거)가 유래한『史記(사기)』「여불위열전」에서는 한(韓)나라 양적(陽翟) 출신이라고 나온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여불위는 대상인이었고, 무엇보다 중국을 통일한 진(秦) 시황제의 아버지라는 막강한 설을 품은 인물이다. 비록 이 문화사는 진(秦)나라를 다루지는 않지만 여불위가 한나라 출신이라고 사기에 명시된 만큼 언급함으로써 여불위를 조금이라도 알아보고자 했다. 여불위를 마지막으로 보고서를 마무리 짓고자 한다. 고사성어와 인물로 문화사를 파악하다보니 부족한 부분이 있을지 모르지만 최대한 역사의 흐름을 파헤쳐보고자 했다. 이 보고서를 위해 조원들이 모두 꼼꼼하게 자료를 찾고 열심히 준비한 만큼, 중원 지역 전체를 다루지는 않았지만 다룬 부분에서는 문화사를 보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보고서를 작성한 목적처럼 고대사에 대한 지식을 많이 습득할 수 있었고, 춘추전국시대 속에서 흥미로운 점을 많이 찾을 수 있어서 보람을 느낀 작업이었다. 이 작업이 후에 고대사를 공부하는데 지속적인 조수(助手) 역할을 해주길 기대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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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21.02.01
  • 저작시기2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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