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현장을찾아서2) 교재에서 역사의 현장을 다루는 방식을 참고하여 나의 삶에 특별한 공간을 한두 곳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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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역사의현장을찾아서2) 교재에서 역사의 현장을 다루는 방식을 참고하여 나의 삶에 특별한 공간을 한두 곳 소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구곡문화(九曲文化)

2. 사전 준비, 진행과정

3. 구곡문화에 대해 새롭게 느끼거나 알게 된 내용
1) 청량산유람기와 도산구
2) 세계유산적 가치
3) 구곡문화의 유래
4) 우리나라의 구곡 분포
5) 퇴계 이황

3. 나의 의견

Ⅲ. 결론

Ⅳ. 참고문헌

본문내용

, 학문을 탐구하였거나 풍류 생활을 하였던 곳에 위치하고 있다. 무이구곡은 계곡하류에서 곡(曲)이 시작하여 각 곡에서 도를 닦고 마지막 구곡(九曲)에서 득도하여 경세제민(經世濟民)하기 위해 마을이 보이는 곳에서 끝나는 반면, 국내의 구곡은 계곡 상류를 선계(仙界)의 이상향으로 여겨 대부분 주거지에서 시작하여 계곡상류에서 끝이 난다.
5) 퇴계 이황
도산구곡의 제5곡 탁영담의 대표 인물인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은 1501년 11월 25일 예안현 온계리에서 진사 이식(李埴)의 7남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성은 이(李), 이름은 황(滉), 본관은 진성(眞城)이며 초명(初名)은 서홍(瑞鴻), 자(字)는 경호이다. 이황는 태어난 지 7개월만에 아버지를 여의어 6세 때 이웃 노인에게서 ‘천자문’을 배운 것을시작으로 12세에 작은 아버지 우(瑀)에게 ‘논어’를 배웠고, 14세부터 혼자독서를 하며 특히 도연명(陶淵明)의 시와 그의 사람됨을 흠모하였다. 20세에 이르러 침식을 잊어가며 ‘주역’에 몰두한 탓에 건강을 해쳐 그 뒤부터 다병한 사람이 되어버렸으며 33세에 재차 성균관에 들어가 김인후(金麟厚, 1510~1560)와 교유하고 ‘심경부주(心經附註)’를 입수하여 크게 심취하였다.
34(1534)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가 되면서 벼슬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중종 말년 조정이 어지러워지자 먼저 낙향하는 친우 김인후를 한양에서 떠나보내고 이 무렵 관직을 떠나 은퇴할 결심을 하였다. 43세이던 10월에 성균관 사성으로 승진하자 성묘를 핑계 삼아 사가를 청하여 고향으로 되돌아갔고, 을사사화 후 병약을 구실삼아 모든 관직을 사퇴하였다. 46(1546)세가 되던 해 향토인 낙동강상류 토계(溪)의 동암(東巖)에 양진암(養眞庵)을 지어 독서에 전념하였고, 이때 토계를 퇴계(退溪)라 개칭하여 자신의 아호로 삼았다. 그 뒤에도 자주 임관의 명을 받았으나 부패하고 문란한 정계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외적을 지망하였으며 풍기군수 재임 중 전임군수 주세붕이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편액(扁額), 서적, 학전을 하사할 것을 청원하여 실현 되었다1. 50(1550)세때는 퇴계의 서쪽에 ‘한서암(寒湊庵)’을 지어 생활하고 다음해 1551년에는‘계상서당(溪上書堂)’ 학문에 전념하며 끊임없는 사퇴를 번복하였다.
4. 나의 의견
산수경관은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미의식과 자연관을 형성하는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16세기 후반 이래로 주자(朱子) 성리학을 심화 시킨퇴계(退溪)와 율곡(栗谷)의 학풍이 조선사회에 크게 영향을 미치면서 주자의 구곡경영과 정사건립은 주자의 경영철학과 이상을 배우는 과정으로 널리 유행되어 졌다. 따라서 복잡한 현실로부터 벗어나 산수 간에 집을 짓고 은거하여 수양하며 사는 삶은 주자의 구곡경영의 이상향을 따르며, 세상만물의 이치를 깨우치고 심신을 수양(修養)하는 등 호연지기(浩然之氣)의 기상과 천리(天理)를 체득하는 도학자적 삶의 과정으로 인식되었다. 17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주자의 삶이 특정한 도맥과 학문, 정치적 입지를 확고히 하려는 과정에서 더욱 부각되어, 붕당의 형성과 환국, 사화의정치적인 파국으로까지 치닫게 되는데, 정치적인 패배로 이어진 이들은 복잡한 현실을 떠나 초야(草野)에 묻히고자 하는 산수경영 의지를 드러내며 우거(寓居)를 하거나 은거를 하는 경향이 늘어나게 된다.
이러한 선비들의 은거지와 그들이 경영한 산수문화는 문화다양성의 관점에서 볼 때, 자신의 사상과 철학, 자연관이 반영한 요소임을 부정할 수 없고, 시인묵객들이 방문하여 남긴 편액(扁額)과 기문(記問), 제영시(題詠詩)가 남겨져 국문학적 가치가 있으며, 조경학적 측면에서도 그 시대의 경관과 문화를 이해 할 수 있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산수를 찾아들었던 선비들은 자신이 학문을 강론하고 인격을 수양하는 생활의 터를 오랜 세월을 두고 매우 신중하게 선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 은거(隱居) 터에 아담한 정원(庭園)을 조성하였다. 또한 수시로 원근의 주위를 거닐며 빼어난 자연경관을 감상하고, 산과 바위 혹은 시내의 물굽이에 이름을 지어 적극적으로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자신의 사상과 연결된 주위의 생활세계를 창조하였다. 가장 뚜렷한 예가 팔경(八景)과 구곡(九曲)이며 조선시대사대부들은 이중에서도 구곡의 계곡을 거슬러 물의 근원을 찾아 거닐고 주위의 산수를 즐기는 자연 속에 살면서 심신을 수양하고 학문을 궁리(窮理)해 갔던 것 이었다.
Ⅲ. 결론
지금까지 본론에서는 교재에서 역사의 현장을 다루는 방식을 참고하여 나의 삶에 특별한 공간을 한두 곳 소개하고 그 의미를 서술해 보았다. 우리나라 지형의 약 70%는 산으로 형성되어져 있기 때문에 어느 곳에서나 산과 골짜기, 계곡이 이루는 ‘산수경관(山水景觀)’을 접할 수 있다.과거 우리 선조들은 자연을 벗하며 살고자 노력했고 이러한 풍류적인태도는 생존을 넘어 도덕과 이성이 추구하는 이상(理想)이자 현실과의 괴리를 순화할 수 있는 여과의 매개체로서 자연을 향유하는 문화로 발전했다. 산수 자연을 즐기는 문화는 자연을 직접 찾아 체험하는 ‘산수유람(山水遊覽)’의 풍류적인 태도로 나타났으며 유교사상을 기반으로 현실적인 삶을 살아가는 동시에 산수자연에 묻혀 사는 도교사상의 자연적인 삶도 추구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산수자연 그 자체를 만물의 시원(始原), 영원한 존재 또는 일종의 정신적인 개념으로 받아 들여, 자연을 존재가치로서 합일하고 조화하고자 하는 의식이 강하였다. 자연도 사람과 같이 무생명의 존재가 아닌 살아 생동하는 존재로 인식하여, 자연과 생(生)을 영위하고, 자연을 사랑하며, 그 속에 담긴 자연의 섭리를 관조하면서 이에 순응하고 따르고자 하였다.
Ⅳ. 참고문헌
봉화군. 2012. 옛 선비들의 청량산 유람록 Ⅲ. 청량산 박물관.
이성원. 2008. 천년의 선비를 찾아서. 도서출판 푸른역사.
김문기, 강정서. 2012. 경북의 구곡문화 Ⅱ. 경상북도,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박정현. 2010. 도시경관계획에서 조망경관 가이드라인에 관한 연구. 조선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한승희. 2012. 구곡에 관한 지형분석과 스토리텔링. 대구가톨릭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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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21.09.09
  • 저작시기20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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