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머리말
2. 도동서원의 역사
3. 도동서원과 김굉필의 학문
4. 도동서원의 건물 구성
1) 진입공간
2) 강학공간
3) 제향공간
4) 배치구조
5. 맺음말
2. 도동서원의 역사
3. 도동서원과 김굉필의 학문
4. 도동서원의 건물 구성
1) 진입공간
2) 강학공간
3) 제향공간
4) 배치구조
5. 맺음말
본문내용
계 이황의 글씨를 새긴 것이고, 검은 바탕에 흰 글씨는 선조의 사액 현판으로 경상도 도사가 적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밝은사람들, 2019, 『도동서원 이야기』, 달성군, 34쪽
그 밖에도 중정당에는 왕명을 적은 전교(傳敎), 왕과 왕비의 제삿날을 기록한 국기(國忌), 도동서원 규목 등을 걸어두었다.
중정당을 나가면 장판각(藏板閣)과 거인재(居仁齋), 거의재(居義齋)가 있다. 장판각은 김굉필의 경현록 목판본을 보관하던 곳이고 거인재와 거의재는 유생들의 거처로 사용된 공간이다. 중정당 앞에 거인재와 거의재가 서로 마주보고 있으며 중정당과 함께 서원 교육공간의 중심을 구성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아래 한 칸은 마루방이고 두 칸은 온돌방이다.
원생들의 생활공간을 재실(齋室)이라 하는데 보통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로 나뉜다. 도동서원은 북향이기 때문에 서쪽에 놓인 거인재가 동재가 되었고 동쪽에 놓인 거의재는 서재가 되었다. 강당에서 바라볼 때 왼쪽이 동쪽, 오른쪽이 서쪽이라는 전통적 방위개념 때문이다.
동재에 기거하는 원생이 서재의 원생보다 선학(先學)의 입장이었다. 그렇기에 동재의 격을 보다 높이기 위해 시설물을 차별화했다. 동재에는 서재에 없는 마루가 놓여있고 대청 뒤로 반듯한 문이 나있다. 아궁이도 굴뚝과 함께 건물 뒤로 배치하여 서재와 다른 모습의 공간 구성을 보여주었다. 밝은사람들, 2019, 위의 책, 58-59쪽
3) 제향공간
제향공간인 사당(祠堂)에는 수월루와 달리 내삼문(內三門)이 나있는 것이 특징이다. 김굉필과 정구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공간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주심포기둥에 맞배지붕으로 된 건물로 정면 3칸에는 칸마다 밖여닫이 널문을 달았고 내부는 통칸으로 틔웠다. 원래는 김굉필의 위패만을 모시고 있었는데 서원 건립의 주도적 역할을 한 정구의 공헌을 인정하여 1678년 추가 배향하였다.
4) 배치구조
도동서원의 배치구조는 앞서 말했듯, 전형적인 경사지 서원의 일렬 배치로 설명할 수 있다.
도동서원은 진입공간, 강학공간, 제향공간이 중심축선상에 배치되어 있으며 주축을 따라 안쪽으로 진입할수록 지반의 높이가 상승하며, 주요건물들이 담장으로 둘러싸여진 각각의 독립된 공간을 형성하면서도 공간과 공간을 연결하는 문, 그리고 좁은 계단, 중정당 앞의 돌길 등을 통해 자연스런 공간의 흐름을 유도함으로써 위계질서를 잡고 있다. 이는 분절과 통합, 개체성과 전체성을 나타내는 유교건축 특유의 관념성을 나타낸 것으로 해석된다.
5. 맺음말
도동서원은 서원건축의 일반적 유형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서원 건축의 규범이 자세한 부분까지 정해져 있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철저히 규범을 따라 짓는 것이 더 어려운 부분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된다. 일반적 형태의 서원의 모습을 지어냈다고 하더라도 도동서원처럼 원형을 유지하며 남아있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이다. 도동서원 같은 문화재가 큰 훼손 없이 현재까지도 존재할 수 있음을 보면, 역사적 의미도 깊고 사료적으로도 남는 것이 많아 학문 연구 목적이나 탐구 목적에서 기쁘겠지만 그래도 직접 문화재의 형상을 만끽하여 볼 수 있음에 대해 감사할 따름이다.
【참고문헌】
단행본
밝은사람들, 2019, 『도동서원 이야기』, 달성군
논문
김기주, 2014,「道東書院과 寒岡學의 전개」, 『한국학논집』, 57,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
김정운, 2018,「18세기 도동서원의 지식 체계 구축과 공유」, 『한국서원학보』, 7, 한국서원학보
박균섭, 2012, 「한훤당 김굉필의 교육사상 재검토」, 『嶺南學』, 22,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이수환, 2000, 「도동서원의 인적구성과 경제적 기반」, 『사학연구』, 60, 한국사학회
그 밖에도 중정당에는 왕명을 적은 전교(傳敎), 왕과 왕비의 제삿날을 기록한 국기(國忌), 도동서원 규목 등을 걸어두었다.
중정당을 나가면 장판각(藏板閣)과 거인재(居仁齋), 거의재(居義齋)가 있다. 장판각은 김굉필의 경현록 목판본을 보관하던 곳이고 거인재와 거의재는 유생들의 거처로 사용된 공간이다. 중정당 앞에 거인재와 거의재가 서로 마주보고 있으며 중정당과 함께 서원 교육공간의 중심을 구성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아래 한 칸은 마루방이고 두 칸은 온돌방이다.
원생들의 생활공간을 재실(齋室)이라 하는데 보통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로 나뉜다. 도동서원은 북향이기 때문에 서쪽에 놓인 거인재가 동재가 되었고 동쪽에 놓인 거의재는 서재가 되었다. 강당에서 바라볼 때 왼쪽이 동쪽, 오른쪽이 서쪽이라는 전통적 방위개념 때문이다.
동재에 기거하는 원생이 서재의 원생보다 선학(先學)의 입장이었다. 그렇기에 동재의 격을 보다 높이기 위해 시설물을 차별화했다. 동재에는 서재에 없는 마루가 놓여있고 대청 뒤로 반듯한 문이 나있다. 아궁이도 굴뚝과 함께 건물 뒤로 배치하여 서재와 다른 모습의 공간 구성을 보여주었다. 밝은사람들, 2019, 위의 책, 58-59쪽
3) 제향공간
제향공간인 사당(祠堂)에는 수월루와 달리 내삼문(內三門)이 나있는 것이 특징이다. 김굉필과 정구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공간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주심포기둥에 맞배지붕으로 된 건물로 정면 3칸에는 칸마다 밖여닫이 널문을 달았고 내부는 통칸으로 틔웠다. 원래는 김굉필의 위패만을 모시고 있었는데 서원 건립의 주도적 역할을 한 정구의 공헌을 인정하여 1678년 추가 배향하였다.
4) 배치구조
도동서원의 배치구조는 앞서 말했듯, 전형적인 경사지 서원의 일렬 배치로 설명할 수 있다.
도동서원은 진입공간, 강학공간, 제향공간이 중심축선상에 배치되어 있으며 주축을 따라 안쪽으로 진입할수록 지반의 높이가 상승하며, 주요건물들이 담장으로 둘러싸여진 각각의 독립된 공간을 형성하면서도 공간과 공간을 연결하는 문, 그리고 좁은 계단, 중정당 앞의 돌길 등을 통해 자연스런 공간의 흐름을 유도함으로써 위계질서를 잡고 있다. 이는 분절과 통합, 개체성과 전체성을 나타내는 유교건축 특유의 관념성을 나타낸 것으로 해석된다.
5. 맺음말
도동서원은 서원건축의 일반적 유형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서원 건축의 규범이 자세한 부분까지 정해져 있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철저히 규범을 따라 짓는 것이 더 어려운 부분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된다. 일반적 형태의 서원의 모습을 지어냈다고 하더라도 도동서원처럼 원형을 유지하며 남아있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이다. 도동서원 같은 문화재가 큰 훼손 없이 현재까지도 존재할 수 있음을 보면, 역사적 의미도 깊고 사료적으로도 남는 것이 많아 학문 연구 목적이나 탐구 목적에서 기쁘겠지만 그래도 직접 문화재의 형상을 만끽하여 볼 수 있음에 대해 감사할 따름이다.
【참고문헌】
단행본
밝은사람들, 2019, 『도동서원 이야기』, 달성군
논문
김기주, 2014,「道東書院과 寒岡學의 전개」, 『한국학논집』, 57,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
김정운, 2018,「18세기 도동서원의 지식 체계 구축과 공유」, 『한국서원학보』, 7, 한국서원학보
박균섭, 2012, 「한훤당 김굉필의 교육사상 재검토」, 『嶺南學』, 22,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이수환, 2000, 「도동서원의 인적구성과 경제적 기반」, 『사학연구』, 60, 한국사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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