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치호와 김교신 요약 및 평가 (양현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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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윤치호와 김교신 요약 및 평가 (양현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제1부 윤치호
2. 제2부 김교신
3. 제3부 평가

본문내용

강화도조약을 계기로 조선의 쇄국이 문을 열게 되었다. 윤치호는 1865년 충청남도 아산군 조선 왕조의 절충장군이었던 윤웅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윤웅렬은 총명했던 장남 윤치호의 장래에 큰 기대를 걸었고, 고급문관으로서의 출세를 위해 유교교육을 시켰다. 윤웅렬은 또한 근대적 학문을 흡수함으로써 윤치호의 장래가 열릴 것으로 생각했다. 윤치호는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한 것이 계기가 되면서 일본 유학을 하게 되었다. 윤치호는 조선의 최초의 동경유학생이 되었다. 윤치호는 일본생활의 경험을 통해서 일본은 문명화된 나라이고 그 성공의 원인은 명치 정부에 의한 서구화에 있다고 생각했다. 윤치호는 푸트공사의 통역관이 되는 것으로 귀국을 결심했다. 윤치호는 푸트와의 만남을 통해 서구의 자본주의적인 국제질서를 도의적인 것으로서 인식했다. 그는 모든 나라는 자주독립할 권리가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윤치호는 비도덕적 국가인 청나라에 대한 적대감과 일본이나 서구에 대한 호의라는 이분법에 빠져버린 것이다. 윤치호는 그리스도교가 진정한 종교라는 변증은 산업문명의 창출에 있다고 보았으며 배타적인 태도를 가지고 세계를 그리스도교화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윤치호가 그리스도교의 배타적인 절대성을 주장하고 교화에 대한 전투적인 태도를 보인 것에는 당시 서구 그리스도교의 해외 선교의 특징 중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는 비서구 지역에 대한 종의 문화 제국주의적 자세와 완전히 공명하는 것이었다. 윤치호의 세계관은 ‘산업문명국=선=영원의 지복, 비산업문명국=악=영원의 멸망’이라는 이치논리에 지배되는 일원주의의 세계관이었다. 봉건적 신민의식 등 유교적 요소가 강하게 남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윤치호는 이러한 세계관을 소유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민족적 아이덴티티를 파괴해가는 것이었다.
윤치호는 일본을 문명화에 성공한 ‘우등국’일 뿐만 아니라 비서구 나라들이 추구해야 할 모범 즉, ‘정(正)’의 사회로서 이해했다. 또한 윤치호는 백인으로 대표되는 서구인을 ‘양심적인 교사’로서 존경하고 스스로가 그들과 같이 되기 위하여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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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6페이지
  • 등록일2023.03.13
  • 저작시기2021.04
  • 파일형식아크로뱃 뷰어(pdf)
  • 자료번호#1200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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