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없음
본문내용
이사회나 신문사 간부모임과 같은 소규모 분위기를 가장 편안하게 느꼈다. 그의 성격은 소집단의 동료들에게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동시에 마르크스는 대등한 위치에서 경제학과 사회학의 여러 문제들을 논의할 수 있는 명망있는 학자들과의 회합을 기피했다. 자신의 넓은 식견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는 영국의 외무장관 파머스턴 경이 러시아 정부의 첩자라는 식의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부르주아 사회가 자신을 '돈 만드는 기계'로 전락시키지 못하게 하겠다고 결심하면서도 엥겔스의 증여와 친척들의 여러 유산에 생계를 의존했다.
마르크스는 예수가 어린이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예수를 찬양한다고 말할 정도로 애정이 넘치는 아버지였지만 자신의 생활이나 건강을 돌보지 않았다. 그는 '투쟁'을 삶과 존재의 법칙으로 간주했으며 언어의 습득조차도 삶의 투쟁에서 새로운 무기를 획득하는 일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개인적인 습성이나 생활방식에 있어서 마르크스는 영원한 학생이었다. 마르크스는 두 친구와 함께 거리의 가로등을 깨부수고 경찰이 몰려오자 꽁무니를 빼는 어리광스러운 장난을 하기도 했다. 그는 대단한 소설광으로서 특히 월터 스콧 경과 발자크에 탐닉했고 가족은 모두 셰익스피어의 예찬론자들이었다. 마르크스와 예니 사이에는 7명의 자녀가 있었으나 세 딸만 남고 나머지는 유년기에 잃고 말았다. 가장 총애했던 엘레아노르는 신경질적이고 감성적인 성격을 지녔으며 여배우가 되려는 소망으로 인해 그를 근심하게 했다. 또다른 그림자가 마르크스의 가정생활을 어둡게 만들었는데 하녀 헬레네 데무트가 프리드리히라는 사생아를 출산했기 때문이었다. 엥겔스는 자신의 임종시에 마르크스가 프리드리히의 아버지임을 엘레아노르에게 일러주었다.
국제노동자협회의 결의서에 '노동계급의 성서'라고 공식 기술된 바 있는 〈자본론〉은 1867년 베를린에서 출판되었고 1873년 재판되었다. 오직 첫 권만이 생존시에 완성되었고 제2권과 제3권은 엥겔스의 편집에 의해 1885년과 1894년 출간되었으며, 처음 제4권으로 구상되었던 부분은 1905~10년 〈잉여가치학설사〉라는 독립된 형태로 카를 카우츠키에 의해 출간되었다. 카를 마르크스는 데이비드 리카도의 고전 경제학을 부르주아 사회는 모든 사회적 유기체와 마찬가지로 불가피한 발전의 경로를 거쳐야 한다는 유물변증법과 결합시켰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준비하면서 수행했던 작업이 얼마나 광범위했는가를 알려면 먼저 많은 양의 유고(遺稿)와 수고(手稿), 방주(傍註), 서신교환 등을 조사해보아야 한다. 그의 분석대상은 자본주의 생산과정의 본질, 자본의 유통과정, 자본의 총과정, 인간과 자연의 물질대사, 이데올로기 비판, 인간상, 잉여가치론과 그 역사에까지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사회학·기술·공학적 문제들을 연구했고 수학 및 자연과학을 연구했으며 역사적 과정과 농업경제를 분석했는가 하면, 헤겔의 〈논리학 Wissenschaft der Logik〉에 특별히 주목하기도 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의 법칙성에 관한 연구를 자연사적(自然史的) 과정이라는 성격을 갖는 사회구성체 발전이론으로 총괄했으며 경제적 토대,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 생산력, 생산관계 등 사회구성체의 생산관계를 밝히고 사회구성체의 여러 요소들 사이의 상호관계를 탐구했다.
〈자본론〉은 이윤의 감소율과 같은 자본주의의 내재적 모순들이 현저해짐에 따라 자본주의는 사라지고 더 나은 사회로의 이행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언한다. 기억할 만한 〈자본론〉의 내용 가운데 영국 의회의 청서(靑書)에서 발췌한 것으로 노동계급의 비참한 생활을 서술한 페이지들이 있다. 마르크스는 이 비참함이 증가되고 동시에 자본의 독점이 생산에 대하여 착취로 작용하는 가운데 마침내 부르주아 사유재산의 조종(弔鐘)이 울리게 되고 착취자가 피착취자로 전락하게 되리라고 믿었다. 그는 계급과 계급투쟁의 존재를 자신이 발견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는 않고 부르주아 역사가들이 자기보다 훨씬 이전에 이 문제들을 다루어왔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생산발전의 각 단계는 이에 상응하는 계급구조와 연관이 있다는 것과 계급투쟁은 필연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를 낳아 무계급 사회의 도래가 실현될 것임을 주장했다. 어떻게 그가 이러한 주제들에 관한 몇몇 단락들을 학문적 표준에 의해 이루어진 핵심적인 증거로 간주하게 되었는가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끊임없이 완성되어가는 혁명과정 속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유능한 지도자와 이론가를 한 세대에 걸쳐 길러냈다. 베벨, 빌헬름 리프크네히트, 라 파르그, 메링, 카우츠키 등이 그러한 인물들이다.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그들의 처지와 욕구를 과학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 해주었다. 노동자 계급의 역사적 사명을 실현하는 데 협력하는 것, 이것이 그의 진정한 필생의 직무였다. 그의 철학은 결코 자기목적이 아니었고 항상 사회를 인식하고 변혁하는 무기였다. 그것은 경제생활과 정치적 계급투쟁, 과학과 기술의 혁명, 그리고 인민의 문화적·정치적 발전 등과의 결합에서 얻어진 것이었다. 마르크스의 철학은 거의 150년에 걸친 역사 속에서 생명력을 입증했으며 혁명적 노동운동과 실재하는 사회주의 속에서 실현되었다. 그것은 사회주의 사회의 이론적·실천적 문제해결과정 속에 지양되어 있다. 그것은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에 의해 더욱 발전되었으며 공산당과 노동자당의 정치에 있어서 이론적 토대를 형성했다.
사회학 이론에 있어 마르크스의 가장 지대한 공헌은 그의 일반적 분석양식, 즉 '변증법적인' 양식에 있다. 이 양식은 모든 사회체계가 내재적 모순(불안정)을 발생시키며 이 모순은 새로운 사회의 등장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고 간주한다. 카를 마르크스의 분석양식은 토머스 맬서스, 허버트 스펜서, 빌프레도 파레토의 양식과 더불어 사회과학의 대표적인 이론구조의 하나로 정립되었고, 더이상 〈자본론〉의 경제학적 추론을 받아들이지 않는 신마르크스주의자들도 자본주의 사회체제의 분석에 있어서는 마르크스의 분석양식에 의존하고 있다. 그의 사고양식을 거부해온 학자들로는 경험주의 철학 계통의 버트런드 러셀, 존 듀이, 그리고 카를 포퍼가 있다.
L. S. Feuer 글
마르크스는 예수가 어린이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예수를 찬양한다고 말할 정도로 애정이 넘치는 아버지였지만 자신의 생활이나 건강을 돌보지 않았다. 그는 '투쟁'을 삶과 존재의 법칙으로 간주했으며 언어의 습득조차도 삶의 투쟁에서 새로운 무기를 획득하는 일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개인적인 습성이나 생활방식에 있어서 마르크스는 영원한 학생이었다. 마르크스는 두 친구와 함께 거리의 가로등을 깨부수고 경찰이 몰려오자 꽁무니를 빼는 어리광스러운 장난을 하기도 했다. 그는 대단한 소설광으로서 특히 월터 스콧 경과 발자크에 탐닉했고 가족은 모두 셰익스피어의 예찬론자들이었다. 마르크스와 예니 사이에는 7명의 자녀가 있었으나 세 딸만 남고 나머지는 유년기에 잃고 말았다. 가장 총애했던 엘레아노르는 신경질적이고 감성적인 성격을 지녔으며 여배우가 되려는 소망으로 인해 그를 근심하게 했다. 또다른 그림자가 마르크스의 가정생활을 어둡게 만들었는데 하녀 헬레네 데무트가 프리드리히라는 사생아를 출산했기 때문이었다. 엥겔스는 자신의 임종시에 마르크스가 프리드리히의 아버지임을 엘레아노르에게 일러주었다.
국제노동자협회의 결의서에 '노동계급의 성서'라고 공식 기술된 바 있는 〈자본론〉은 1867년 베를린에서 출판되었고 1873년 재판되었다. 오직 첫 권만이 생존시에 완성되었고 제2권과 제3권은 엥겔스의 편집에 의해 1885년과 1894년 출간되었으며, 처음 제4권으로 구상되었던 부분은 1905~10년 〈잉여가치학설사〉라는 독립된 형태로 카를 카우츠키에 의해 출간되었다. 카를 마르크스는 데이비드 리카도의 고전 경제학을 부르주아 사회는 모든 사회적 유기체와 마찬가지로 불가피한 발전의 경로를 거쳐야 한다는 유물변증법과 결합시켰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준비하면서 수행했던 작업이 얼마나 광범위했는가를 알려면 먼저 많은 양의 유고(遺稿)와 수고(手稿), 방주(傍註), 서신교환 등을 조사해보아야 한다. 그의 분석대상은 자본주의 생산과정의 본질, 자본의 유통과정, 자본의 총과정, 인간과 자연의 물질대사, 이데올로기 비판, 인간상, 잉여가치론과 그 역사에까지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사회학·기술·공학적 문제들을 연구했고 수학 및 자연과학을 연구했으며 역사적 과정과 농업경제를 분석했는가 하면, 헤겔의 〈논리학 Wissenschaft der Logik〉에 특별히 주목하기도 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의 법칙성에 관한 연구를 자연사적(自然史的) 과정이라는 성격을 갖는 사회구성체 발전이론으로 총괄했으며 경제적 토대,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 생산력, 생산관계 등 사회구성체의 생산관계를 밝히고 사회구성체의 여러 요소들 사이의 상호관계를 탐구했다.
〈자본론〉은 이윤의 감소율과 같은 자본주의의 내재적 모순들이 현저해짐에 따라 자본주의는 사라지고 더 나은 사회로의 이행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언한다. 기억할 만한 〈자본론〉의 내용 가운데 영국 의회의 청서(靑書)에서 발췌한 것으로 노동계급의 비참한 생활을 서술한 페이지들이 있다. 마르크스는 이 비참함이 증가되고 동시에 자본의 독점이 생산에 대하여 착취로 작용하는 가운데 마침내 부르주아 사유재산의 조종(弔鐘)이 울리게 되고 착취자가 피착취자로 전락하게 되리라고 믿었다. 그는 계급과 계급투쟁의 존재를 자신이 발견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는 않고 부르주아 역사가들이 자기보다 훨씬 이전에 이 문제들을 다루어왔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생산발전의 각 단계는 이에 상응하는 계급구조와 연관이 있다는 것과 계급투쟁은 필연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를 낳아 무계급 사회의 도래가 실현될 것임을 주장했다. 어떻게 그가 이러한 주제들에 관한 몇몇 단락들을 학문적 표준에 의해 이루어진 핵심적인 증거로 간주하게 되었는가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끊임없이 완성되어가는 혁명과정 속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유능한 지도자와 이론가를 한 세대에 걸쳐 길러냈다. 베벨, 빌헬름 리프크네히트, 라 파르그, 메링, 카우츠키 등이 그러한 인물들이다.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그들의 처지와 욕구를 과학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 해주었다. 노동자 계급의 역사적 사명을 실현하는 데 협력하는 것, 이것이 그의 진정한 필생의 직무였다. 그의 철학은 결코 자기목적이 아니었고 항상 사회를 인식하고 변혁하는 무기였다. 그것은 경제생활과 정치적 계급투쟁, 과학과 기술의 혁명, 그리고 인민의 문화적·정치적 발전 등과의 결합에서 얻어진 것이었다. 마르크스의 철학은 거의 150년에 걸친 역사 속에서 생명력을 입증했으며 혁명적 노동운동과 실재하는 사회주의 속에서 실현되었다. 그것은 사회주의 사회의 이론적·실천적 문제해결과정 속에 지양되어 있다. 그것은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에 의해 더욱 발전되었으며 공산당과 노동자당의 정치에 있어서 이론적 토대를 형성했다.
사회학 이론에 있어 마르크스의 가장 지대한 공헌은 그의 일반적 분석양식, 즉 '변증법적인' 양식에 있다. 이 양식은 모든 사회체계가 내재적 모순(불안정)을 발생시키며 이 모순은 새로운 사회의 등장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고 간주한다. 카를 마르크스의 분석양식은 토머스 맬서스, 허버트 스펜서, 빌프레도 파레토의 양식과 더불어 사회과학의 대표적인 이론구조의 하나로 정립되었고, 더이상 〈자본론〉의 경제학적 추론을 받아들이지 않는 신마르크스주의자들도 자본주의 사회체제의 분석에 있어서는 마르크스의 분석양식에 의존하고 있다. 그의 사고양식을 거부해온 학자들로는 경험주의 철학 계통의 버트런드 러셀, 존 듀이, 그리고 카를 포퍼가 있다.
L. S. Feuer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