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성리학이 한국 철학에 미친영향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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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제 목 : 19세기의 사상적 흐름과 동학

□ 총 페이지수 : 31
□ 목 차:

19세기의 사상적 흐름과 동학

내용미리보기

조선의 전통사회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두 전란을 겪으면서 급속히 변화해 갔는데 그것은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전반에 걸친 것이었다. 특히 이 가운데서 변화의 가장 큰 요인은 물론 경제적인 측면에서의 변화라고 볼 수 있지만, 그것의 반영이라 할 수 있는 사상적인 측면에서의 변화도 역시 조선 사회, 특히 조선 후기 사회의 변화를 선도하는 요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인 퀘이커 함석헌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 연구:
-20세기 한국의 씨알의 소리 그리고 종교적 다원주의의 선구자

내 용

테이블: 함석헌의 생애 연표

머릿말
1. 역사가의 시각으로
2. 논문의 구성
3. 논문연구의 접근방법

첫번째 마당: 20세기 한국사의 배경
이 마당의 목적
1.1. 조선왕조의 유산: 유교와 권위주의
1.2. 제국주의와 공산주의
1.3. 부패한 기독교 정권과 무능한 정부
1.4. 군부독재와 민주주의
1.5. 요약

두번째 마당: 함석헌의 청소년기 (1901-1923)
이 마당의 목적
2.1. 평안북도에서의 `젠틀(gentle)`한 어린시절 (1901-1919)
2.2. 삼일운동에 기독청년으로 (1919-1921)
2.3. 오산학교에서 (1921-1923)

세번째 마당: 식민지 지식인으로 (1923-1945)
이 마당의 목적
3.1. 일본에서의 생활 (1923-1928)
3.2. 역사교사 그리고 {성서조선} (1928-1938)
3.3. `민족주의자`, `동양적(東洋的)`, 농사꾼 (1938-1945)
`감방대학`
우찌무라로부터의 탈출
제국주의 아래서 평화주의자

네번째 마당: `해방된` 조국에서
이 마당의 목적
4.1. 해방 그리고 문교부장으로 (1945-1947)
4.2. `해방된` 남한에서 `광야의 소리`로 (1947-1961)
남한의 사회-정치적 상황
남한의 함석헌
`이단자`
`실패자`
`환영받지 못한 예언자`
`죄인`이 되어

다섯번째 마당: 군부정권 아래서 (1961-1989)
이 마당의 목적
5.1. 군사정변과 퀘이커리즘 (1961-1970)
나그네 함석헌
`전환점`
5.2. 씨 의 소리와 `죽을때까지 이걸음으로` (1970-1989)
`강(强)을 약(弱)으로 제(制)함`
자유를 위한 행진
민족과 가정 사이에서

여섯번째 마당: 함석헌이 남긴 것
이 마당의 목적
6.1. 김동길과 안병무
김동길과 그 삶의 가락
안병무와 민중신학
6.2. 한국의 민주주의
기독교의 사회-정치적 면의 회복자
함석헌 민주화운동의 그 성서적 연관성
6.3. 함석헌의 서구 기독교와 동양사상의 융합
한국인의 종교적 전통과 특성
함석헌의 종교에 대한 접근방법
서구 기독교의 동양적 해석
종교적 다원주의
역사적 그리고 사회-문화적 종교
휴머니스트 함석헌

마치는 말: 함석헌 - 신의 도시와 세속도시 사이에서
후기
참고문헌 및 자료

머리말

본문내용

은 그의 전 재산과 정열을 오산학교와 한민족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그 결과 1911년 일제에 의해 조작된 소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남강은 4년 2개월의 감옥살이를 치루게 되었다. 감옥 안에서 남강은 수없이 성경을 읽게 되었고 기독교에 깊이 심취하게 되었다. 1915년 석방되자 그는 곧 장로교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1919년 3.1운동당시에 남강은 한국개신교 대표로 활약하기도 했고 그 일로 인해 재차 감옥에 수감되어 일본헌병의 손에 의해 수많은 고문과 고난을 겪었다. 남강은 그의 말과 행동을 통해 그의 제자 함석헌에게 영감을 제공해 주었다. 함석헌은 남강에 대한 그의 끓어오르는 존경심을 아래와 같이 표현했다: "남강은 과연 조선에서 등촉이었다. 나는 이때껏 저만큼 광휘있게, 저만큼 뜨겁게, 저만큼 기운차게, 저만큼 참되게 산 이를 보지 못하였다."
또다른 함석헌의 스승은 다석 유영모였다. 다석은 성경과 동양철학에 해박한 지식이 있었고 1921년 9월에 그는 오산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다석은 함석헌에게 노장사상, 불교, 주역 및 여러 동양고전철학을 가르쳤다. 더불어 다석은 성경을 그의 독특한 동양적 시각으로 재해석했고 후에 함석헌의 동양적 성경해석은 이때 다석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다석의 강의를 들으며 청년 함석헌은 자신의 인생의 목적이나 의미를 찾고자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함석헌은 다석이 비로소 자신을 "생각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남강으로부터 배운 애국정신이나 다석으로부터 배운 동양철학은 함석헌이 자신의 생각을 내적으로 숙성 발전시키는데 큰 밑거름이 되었다. 이때로부터 함석헌은 종종 "진리가 무엇일까?"라고 수없이 자문하기도 했다. 함석헌은 많은 한국인들이 맹목적으로 질문없이 기성교회의 교리를 받아들이는 것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대신에 함석헌은 자신에게 더 적합한 어떤 진리를 탐구하고자 힘썼다. 그러나 그가 찾고자하는 '진리'를 함석헌은 그가 속해있던 장로교회 속에서는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는 중에도 그는 독서를 통해서 더많은 지식을 쌓고자 노력했고 그 지식을 스스로의 힘으로 소화시키고자 노력했다. 오산학교에서 학업에 열중하는 한편 함석헌은 더많은 시간을 "인생이란 무엇일까?"하고 자문자답하며 생각하는 일에 보냈다. 그 결과 오산학교에 머무르는 동안 함석헌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사항을 그 삶의 기본적 가치 및 생활신조로 요약하기에 이르는데 그것은 아래와 같다:
"생각을 많이 한 후 나는 내 인생에 이 세 가지는 결코 버릴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첫째는 나는 한국인으로서 내 민족의 전통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둘째 나는 하느님을 믿으며 신앙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세째 과학을 공부한 이래 특히 웰즈의 {세계사개론}을 주의깊게 읽은 후 나는 그의 세계주의 사고와 인류를 위한 과학의 역할에 크게 영향을 받았습니다."
한편 이 무렵 3.1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었던 한국 지성인들 중에서 새로운 사회사상과 정치사상에 관심을 가진 그룹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유럽과 미국의 정치인들은 자기들끼리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구호를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한국이 3.1 운동을 통해 민족의 독립을 힘쓰며 탄압받고 있었을 때 전혀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 물론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몇몇 서양 선교사들이 한국인의 독립운동에 동정심을 갖고 도덕적 지원을 했었다. 3.1운동 후 일본은 한국인들에게 표면적으로는 더 관용적인 듯한 태도를 취했다. 그 결과 한국지성인 그룹들은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사회, 문화 때로는 정치적인 주제들을 놓고 토론할 수 있는 분위기도 형성 할 수 있었다.
1922년에 이르러 일제는 조선사 교과서 편찬위원회를 만들었다. 이 위원회는 한국인은 자주심이나 독립심이 결핍된 민족이라 논쟁했고 조선은 언제나 역사적으로 중국의 속국에 불과한 나라였다고 주장했다. 또한 한국사와 문화는 중국과 일본에 비교해 항상 역행하고 후퇴하는 문화라고 여겼다. 일제는 세계의 여론을 자신들의 유리한 방향으로 돌리고자 한국사를 조작했고 한국민족은 자율능력이 없으므로 일본민족의 `보호와 지도'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이러므로서 일제는 한국에 대한 자신들의 식민정책을 정당화 하고자 했다.
함석헌이 어려서부터 열렬한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아오면서 성장해 왔던 것을 고려할 때, 한국인의 주체의식을 파괴하려는 일제의 소위 학술적 논쟁이나 일본 교과서 편찬위원회의 조작은 청년 함석헌에게 경악심을 심어 주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국인들은 일제의 압박 밑에서 신음했다. 그러나 그 일제의 핍박에 효과적으로 저항할만한 힘을 가지고 있지 못했고 일제의 식민정권으로부터 독립할 조직력도 갖추고 있지 못했다. 이런 면에서 왜 함석헌이 압박당하고 있는 자의 입장에서 한국역사를 쓰기로 결심했는지 그 입장을 어느 정도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므로서 함석헌은 아마도 절망의 수렁 속에 침체해 있는 한국민족에게 어떤 희망을 심어 주고자 했으리라. 이로부터 약 10년 후인 1930년대 초반 함석헌은 마침내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기술하기 시작했다.
조그만 시골벽촌 오산학교에서 함석헌은 민족애와 기독교정신을 호흡하며 그의 생각과 지식을 다듬어 나갔고, 이것은 그에게 진보적 기풍을 제공해 주었다. 이 정신을 바탕으로 함석헌은 식민지로 전락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일할 힘을 축적해 나갔다. 여하튼 22살의 청년 함석헌이 유학을 가고자 오산학교를 떠날 때쯤엔 그의 학업도 그 시대로선 상당히 진척된 편이었다. 광야 오산에서 함석헌은 미래를 위해 잘 훈련돼 있었고 홀로 서기위해 잘 준비 돼있었다. 1923년 봄날, 남강 이승훈의 중재와 오산학교의 재정적 후원으로 함석헌은 오산에서 일본 동경으로의 유학준비를 갖추었다. 그 당시 식민지하의 대다수의 한국인으로선 세계의 최신 사상과 지식을 거의 동경을 통해서야만 접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동경은 한국 유학생들의 목적지로 선호되는 편이었다. 특히 동경은 한국 본토보다는 한국인들에게 어느 정도의 자유가 주어졌고 지리적으로도 미국이나 유럽보다 가까웠고 비용도 상대적으로 저렴했기에 한국 유학생들에게 잘 알려져 있던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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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32페이지
  • 등록일2002.04.25
  • 저작시기2002.0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193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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