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택상재학파와 이퇴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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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 논

Ⅱ. 삼택상재와 이퇴계

Ⅲ. 삼택상재와 도엽우재에 있어서의 퇴계학

Ⅳ. 상재학파와 이퇴계

Ⅴ. 결 논

본문내용

書記에게도 책을 보내어, 한국에서는 도학이 크게 열리어 예의가 성하게 행해지고 있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와 같이 希齋는 퇴계학만을 익히는 것이 아니고 李退溪를 퇴계선생으로 호칭하며, 또한 한국의 유자들도 존중하였다. 希齋는 尙齋으로부터 「周易衍義筆記」를 「敬勿爲漫出」이라고 注意를 받고 授하였다. 亨保 16년(1731) 6월 8일 希齋는 京都의 柳馬場의 客舍에서 書寫하였다. 尙齋는 70세, 希齋는 27세였다. 蟹養齋(1705∼1778)는 名을 維安, 字를 子定, 子磋라 칭하였다. 安藝(廣島縣)의 출신(一說에는 阿波 「德島縣」의 출신)으로 되어 있다. 6세에 尾張(愛知縣)에 와서 布施氏에게 양육되고, 21세에 경도에 가서 三宅尙齋에 師事를 하고 후에 尾張藩의 儒臣으로서 藩校明倫堂에서 강학하였다. 崎門學에 따라 朱子學을 신봉하고, 徠의 학설을 배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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尙齋이 京都에 培根達支堂을 설립하여 程朱의 學을 널리 서민교육에까지 힘을 기울이고 있을 시, 養齋와 5舍長의 한 사람으로서 久米訂齋, 多田維則, 石王塞軒, 井澤灌園과 함께 尙齋를 보좌하고 있다. 養齋는 中村習齋에 尙齋學을 전하고, 습재는 深田香實에게, 향실은 細野要齋에게 전하여 明治 시대까지, 尾張에 있어서 尙齋學이 이어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中村習齋와 細野要齋는 李退溪의 「西銘考證講義」 의 手批者이다.
細野要齋手批本 「西銘考證講義」는 「日本刻版李退溪全集」(상) <李退溪연구회>에 수장되어 있다. 宮地靜軒(1674∼1753)은 名을 介行, 介直 등으로 칭하고 土佐(高知縣)의 사람으로 최초에는 山崎闇齋의 高弟子의 1인 谷秦山에 따라서 정주의 학을 수업하였다. 후에는 緖方默堂 伊藤東涯에 배웠으나 최후에는 尙齋에 사사하여 土佐藩에 출사하였다.
정헌은 植木惺齋, 富永縣河에게 學을 전하고, 현하는 恩田敬休에게, 경휴는 山本日下에게 전하고, 다시 山本日下는 子인 霞嶽에게, 霞嶽은 山本澹齋에게 전하고, 土惺에 尙齋學은 明治 초까지 전해지고 있다. 植木性齋(1688∼1774)에는 李洸輯注 「朱子行狀手批本」이 있다. 이 수비본은 「日本刻版 李退溪全集」(상)에 수록되고 있다. 山宮雪樓(生沒年불명)은 名을 維深 仲淵으로 칭하였다.
江戶人으로 최초에는 室鳩巢에 배웠으나 후에 京都에서 三宅尙齋에 사사하여 崎門學을 수료하였다. 川越藩主松平大和守에 侍從들었으나 의견이 맞지 않아 사직하고 국경을 나올 때 도적에 살해되었다. 雪樓는 三宅尙齋의 「小傳」을 쓰고 있다. 그는 「薰風編」속에 「唯知朱子學, 薛文淸及貴國退溪李氏之書, 知導山崎先生, 尙齋先生之遺訓而己」라고 述하고, 朱子, 薛文淸, 李退溪의 서적과 闇齋의 유훈을 아는 것으로 족하다고 하고 있다. 尙齋의 제자 村士淡齋의 子 玉水는 최초에는 山宮雪樓에게 사사하고 후에는 稻葉迂齋의 문인이 되었다.
佐藤直方의 3제자의 1인으로서 迂齋는 直方파의 주류로 되어 있으나, 전술한 바와 같이 尙齋에게서 퇴계학을 배우고 있다. 迂齋에게 사사한 村士玉水는 服部栗齋 岡田寒泉에게 崎門學, 퇴계학을 전하였다. 玉水는 「李退溪書抄」를 편찬하고 몰후 33년 후에는 寒泉의 진력으로 「李退溪서초」 10권이 간행되었다. 服部栗齋외 父 服部梅甫는 尙齋에게서 배우고 攝津國 豊島郡 (大阪府池田市豊中市)에 있으면서 飯野候에 출사하여 郡宰가 되고 실천이행의 학을 활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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岡田寒泉은 최초에 尙齋의 제자 村士淡齋에게 兵學을 배웠다.
) 近藤春雄「岡田寒泉」 (「日本漢文學大辭典」 明治書院)
Ⅴ. 結 論
三宅尙齋는, 師 闇齋는 말할 것도 없이, 선배의 直方·絅齋에게도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퇴계의 사상·학문을 존신한 사람이다. 그 뿐만 아니라 성격, 자연풍물의 애호의 면에서도 李退溪에 가깝다. 또 尙齋의 문류의 사람들 중에도 端山·碩水 형제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퇴계를 존중하고 그의 학문사상의 영향을 받고 있다. 더구나 尙齋는 闇齋, 直方, 絅齋에 비해서 순수한 유교도였다. 直方門의 1인인 渡邊豫齋의 「吾學源流」에는 尙齋의 견식이 直方에게 뒤떨어져 있는 이유로서 李退溪를 知하는 것이 얕으며, 또 尙齋는 한쪽으로만 퇴계를 보았다고 기술되어 있다.
尙翁之見, 所以不及佐藤子者, 知李退溪淺矣. …略… 尙翁之以平平視退溪, 佐藤字以平平視薛文淸也.
豫齋는 稻葉迂齋의 字 默齋 手塚垣齋, 藤田畏齋의 학통, 즉 直方學派의 1인이다. 이와 같은 尙齋와 直方(佐藤子)의 비교론은 妄說謬見에 불과하다. 尙齋門의 사람들 중에는 楠本端山·碩水을 위시하여 月田蒙齋, 小笠原敬齋(豊前小倉藩主의 弟), 橋本左內 등 他의 崎門學派 중의 사람과 함께 일본 江戶 말기에 활약하고, 明治維新에 의하여 일본 근대화의 바탕을 만들기 위해 몸을 던져 國事에 활약하였던 儒者가 있다.
후까지 장생한 유자나마 시류에 아부하여 절의를 굽히지 않고 명성,지위에 미혹됨이 없이 소신을 완수하였다. 예를 들면 楠本端山·碩水가 그 가장 으뜸되는 자이다. 明治維新 후 일본은 서양의 문명사상을 맹목적으로 도입하고 극단의 국수주의에 함입되었다. 기문학의 山崎闇齋나 淺見絅齋의 민족주의에 입각한 국가주의의 사상은 편협한 국수주의자에게 이용되었다. 따라서 제 2차 세계대전 종료까지는 국수주의를 고무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어, 따라서 전집·저작 등이 다수가 발간되고 있다. 佐藤直方全集도 일본의 國體를 언급하고 있다. 「中國論集」, 「湯武論」 등이 제외되어 昭和 16년(1941)에 발행되고 있다. 그런데 三宅尙齋의 전집은 발간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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昭和 14년(1939)에 간행된 「근세일본의 유학-德川公繼宗七十年祝賀紀念會-)에 게재되고 있는 제논문 중에도 三宅尙齋를 취급한 것은 한 편도 없고 阿部吉雄의 「山崎闇齋와 그의 교육」 중에 尙齋의 명칭이 散見되는 정도로 타의 논문 중에는 尙齋의 명칭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무슨 까닭일까? 尙齋는 당시의 국수주의, 제국주의에 따른 침략주의에 기여하지 않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 위대한 일본의 순수한 유교도, 더욱이 李退溪의 영향을 받고 인품도 李退溪를 닮은 尙齋를 우리들은 더욱 알아야 한다. 우리들은 이와 같은 위대한 분의 학문, 사상을 깊이를 더하여 日韓 양국의 우호로 羈絆을 다시 강화하여 세계의 참된 항구적인 평화에 공헌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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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04.26
  • 저작시기20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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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193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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