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퇴계의 사상과 행동(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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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서 -이퇴계 연구회 설립의 취지

Ⅱ. 이퇴계의 생애와 사상
1. 약전
2. 사람됨과 생활태도
3. 시문·서법
4. 퇴계학의 성격과 역사적 지위

Ⅲ. 저서

Ⅳ. 일본 유학의 발전과 이퇴계

Ⅴ. 좌등직방파의 이퇴계 존신

Ⅵ. 이퇴계의 철학적 수양론과 일본 유학

본문내용

화 등과 明時代의 그것과를 비교하여 보면 宋代의 것은 맑디 맑은 엄격한 정신이 느껴지는 데 대하여, 明시대의 것은 세속적인, 그러나 인간미 풍부한 것이 많다. 이것은 宋시대에 朱子의 理의 철학이 성행했고 明시대에는 氣의 철학이 성행했던 것과 照應한다고 생각되는데, 李退溪는 인간의 맑디 맑은 순결성이라는 것을 각별히 사랑하였던 것이리라. 본래 한국사람은, 옷은 백의를 사랑하고 또 도자기도 宋朝風의 도자기를 애호하여 왔었는데, 李退溪의 정신도 바로 한국의 이와 같은 風尙과 일치하는 것이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일본도 그같은 禪的이라 일컬어지는 맑디 맑은 예술을 사랑하는 일면이 있다. 일본의 유학자가 李退溪에 공명한 그 배경을 생각하면 여러 가지 흥미 깊은 것을 생각할 수도 있으나 지금은 나의 감상 정도를 말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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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부가하여 말하면, 조선에서는 李退溪가 제창한 四端理發, 七情氣發이라는 학설이 이론적으로 상세하게 討究되어 드디어는 政爭과 결부되어 피투성이의 붕당의 싸움으로까지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본에 있어서는 이와 같은 이론적 추구는 거의 도외시되어 山崎闇齋이 四端理發, 七情氣發의 說은 李退溪의 설이 가장 좋다고 단정한 이래로 이같은 이론에 대해 추구하는 것은 거의 행하여지지 않고, 도리어 朱子의 철학의 틀 밖으로 나온 伊藤仁齋의 四端擴充發展說, 性情의 자연적 발달을 지향하는 윤리설이 행하여졌던 것이다. 조선에서는 이론적 추구나 그 구성에 대하여는 능한 것 같으나 일본인은 오히려 직관적이어서 이론의 추구와 구성에는 능하지 않았던 것 같다.
8. 儒學은 어떻게 일본사회에 기능하였는가
儒者라는 전문가
최후로 일본의 江戶시대에 어떻게 이와 같이 유교가 사회에 기능하였는가 라는 점에 대하여 私見의 하나를 첨부해 두고 싶다. 江戶시대는 大名·武士·庶民의 계층으로 되는 신분사회이어서 儒者는 武士와 서민 사이의 중간층에 속하고 있었다. 江戶의 유명한 儒者의 출신을 조사하여 보면 대개 浪人武士나 의사나 부유한 상가, 농가의 출신이었다. 따라서 儒者는 武士의 교사로서 혹은 서민의 지도자로서 그 지혜를 쓸 수 있었다. 혹은 서민의 원기나 발상법을 그 사상 속에 흡수하여 사상을 구성할 수가 있었다. 그 점이 중국이나 조선의 사회와는 매우 달라 있었다.
조선에서는 양반·중인·상민·천민의 4계층으로 나뉘어, 유교는 귀족계급인 양반의 독점물이었다. 어학·천문학·수학·의학·농학 등의 실학은 이것을 중인계층이나 양반의 첩복의 자식들이 담당하였으므로 그 학문이 도리어 발전하였지만, 유학은 귀족출신의 관료들의 신분적인 윤리로서 닦여지고 혹은 귀족의 교양으로서 학습될 뿐이었으므로 발전할 여지가 적었다고 생각된다. 중국에서도 유학은 관료의 신분윤리 혹은 교양으로서 닦여지고, 그 관료가 지위를 얻어 지방에 부임하면 실무는 신분이 낮은 서기에 맡겨버렸으므로 산 학문으로 활용되는 것이 적었다고 생각한다. 조선도 이와 같은 상황이었다고 상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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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일본은 봉건제도, 신분제도가 확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도리어 儒者라는 전문직이 생기고 또한 武士과 서민의 교사로서 실제의 사회에 쓸모 있는 사상, 학설을 말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와 같이 하여 幕末維新의 때가 되어서는 儒者는 재빨리 서양의 학문을 받아들이고, 武士는 武士대로 전문적인 입장에서 서양식의 무기나 투쟁법을 연구하고, 서민은 서민대로 서양식의 상법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중국이나 조선의 관료가 다만 중국의 고전적 교양을 알 뿐으로 군사나 상업에 대하여 아무런 전문적 지식도 없고, 문화에 대하여서도 중국이 가장 뛰어나 있다고 하는 中華自大의 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과는 완전히 달라 있었다.
9. 맺음말
일본의 지혜
생각컨대 일본은 세계의 孤島에 있어 겸허하게 외국문명을 받아들이고 또한 오히려 외국문명을 미화하여, 이른바 蒸溜化하여 수용하였다. 예를 들면 유교의 경우에도, 유교에 수반하는 여러 가지 토속·풍습 등은 받아들이는 일이 없이 그 정신의 정수만을 수용하였다. 호기심에 불타 탐욕할 정도로 외국의 문명을 수용하였으나 동시에 그것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었다. 水戶光國은 일찍이 자서전을 써서 그 가운데 「神儒를 존숭하여 신유를 駁하고 老佛을 존숭하여 노불을 물리친다.」라고 말하였는데, 이같은 정신은 일본의 대표적인 지식인들이 모두 가지고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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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저 어떠한 가르침이라도 완전무결한 것은 있을 수 없다. 神道나 유교 또는 불교라 하더라도 각각 장점도 있으면 결점도 있다. 그 장점을 골라 취해서 사회에 살려 온 것이 일본의 지혜였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조선은 朱子學 때문에 나라를 망쳤다고 하나, 朱子學 그 자체에 죄가 있는 것은 아니고 그것을 쓴 사람이나 사회에 죄가 있다고 하는 것이 일본의 사상의 역사와 비교하여 생각할 때 특히 명백하게 된다. 그 사람이 일어나면 이 도가 일어나고, 그 사람이 없으면 이 도도 쇠한다. 요컨대 그 도를 짊어지는 사람의 여하에 의하여 그 도의 성쇠가 있는 것이다.
현대사회가 바로 평가하여야 할 유교
지금 나는 일본의 나라를 일으킨 커다란 힘이 되고 일본의 사상의 등뼈가 되어 온 것은 유교라고 하는 것을, 역사 위에서 생각해 본 것인데 현재의 일본은 이른바 등뼈가 끊어진 나라로 되어 있다. 한갖 경제대국으로서 세계에 인정받도록 되어 있지만 일찍이 橫井小楠이 기대한 세계제일의 道義의 나라와는 인연이 먼, 그림자가 희미한 존재로 되어 있는 상태이다.
그러나 일본이 참으로 도의의 나라로서 서기 위해서는 뭐라 해도 유교라는 것을 근본으로부터 바로 평가하여 착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때에 한국인으로부터 신처럼 존경되고 동시에 일본인으로부터도 올바른 유학을 일으킨 祖로서 존경되고, 특히 일본의 교육에 대한 자세가 비뚤어져 있을 때 이것을 바로잡으려고 한 山崎闇齋學派나 元田永孚 등에 적지 않이 존경되었던 李退溪의 사상을 현대의 사회에서 바로 평가해 본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한일 양국의 이해와 우호를 깊이하는 위에서 생각해 보아도 중요한 한 점이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안병주 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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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04.26
  • 저작시기20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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