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한용운의 선사상과 실천적 다원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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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 차

Ⅰ. 신중심주의에서 구원중심주의로
Ⅱ. 깨달음의 사회적 연관성
Ⅲ. 불교유신을 향하여
Ⅳ. 사랑과 관계의 존재로서의 님
Ⅴ. 보살과 실천적 다원주의

본문내용

III/263)
만해는 정토와 예의 차이는 중생이 깨달음에 도달하였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달려있다고 보고 있다. 「흙 자체에 염정(染淨)이 있음이 아니라 중생의 미오(迷悟)에 따라 염정의 차가 있음이니 미혹하여 악법을 행하면 염토(染土) 아닌 곳이 없고, 개달아서 선법을 행하면 정토 아닌 곳이 없다.」 (III/265) 그러나 깨달음이란 것이 타자의 깨달음과 연결되어 있는 것임을 생각할 때, 정토란 결국 개인의 심리상태나 종교적 성숙도에서가 아니라 타자를 깨달음에로 인도하려는 노력에서 찾아진다. 유마의 병이 타자를 깨달음으로 인도하려는 거룩한 병인 것처럼 만해의 고통은 타자를 깨달음으로 인도하고자 하는 지순한 아픔이었다.
「일체 중생이 우치(愚痴)로부터 애착을 생하는 고로 병이 생기느니 일체 중생이 병이 생기면 보살도 또한 병이 생기는지라. 보살은 생사를 떠났으니 생사를 떠나면 병도 없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생사고락을 중생으로 더불어 샅이 하는 까닭이며, 법의 체성(體性)으로 보면 중생과 보살이 차이가 없는 고로 중생이 병들면 보살도 또한 병들고, 중생이 병이 나으면 보살도 또한 낫느니라.」 (III/304)
만해는 집착에도 두가지 종류가 있다고 보았다. 타자를 위한 방편(upaya)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을 위한 지식에 매달리는 것도 집착이다. 그러나 자신의 지헤없이 다른 사람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려는방편에만 매달리는 것 역시 집착이다. (III/311) 그러므로 보살은 스스로 열반에 들어가서 치료받고자 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병이 낫는 유일한 길은 중생과 더불어 생사의 현실을 살아가면서 그들을 치유하는 길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III/312)
보살은 지혜와 사랑의 통합체이다. 지혜와 사랑이라는 종교적이고 실천적인 모멘트는 보살의 존재방식이다. 그것은 모두 타자의 타자성에 대한 철저한 긍정이다. 보살의 지혜는 모든 중생들이 타자와 무한한 연쇄관계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과 따라서 존재자의 자성은 무라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이다. 보살의 사랑은 자기 자신의 절대적 근거로서의 타자의 타자성에 대한 철저한 긍정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그것 역시 자기 자신의 무자성에 대한 깨달음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유마경』이 말하고 있듯이 「중생도 도량이다. 그들은 무아를 가르치기 때문이다.」
보살은 사물의 무자성과 공성을 깨달은 존재이다. 공이란 모든 존재들이 연기관계 속에 있다는 사실에 대한 다른 표현인 것이다. 사물은 모두 무한한 연관관계 속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공은 연기와 동의어이다. 보살은 자신이 타자와 무한한 관계 속에 있고, 이러한 관계를 통해서 비로소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사람을 가리킨다.
「「나」이 없으면 다른 것이 없다. 마찬가지로 다른 것이 없으면 나도 없다. 나와 다른 것을 알게 되는 것은 나도 아니오, 다른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나도 없고 다른 것도 없으면 나와 다른 것을 아는 것도 없다. 나는 다른 것의 모임이요, 다른 것은 나의 흩어짐이다. 나와 다른 것을 아는 것은 있는 것도 아니오, 없는 것도 아니다. 갈꽃 위의 달빛이요, 달 아래의 갈꽃이다.」 (II/351)
만해에게 있어서 존재와 비존재, 유심과 무심의 구분은 타자를 깨달음으로 인도하려는 의지를 통해서 극복되었다. 타자를 향한 사랑에서 실현되는 보살의 자기부정을 통해서 보살은 타자를 실재의 중심으로서 깨닫게 된다. 불교적 공의 입장이란 모든 실재가 각각의 존재에서 중심임을 의미한다. 자기중심성이 사라졌으므로, 모든 타자들이 중심이되며, 이를 통해서 타자의 타자성을 그대로 긍정하는 입장인 것이다. 따라서 공과 무가 초월적인 것은 횡초(橫超)적인 의미에서이다. 실재는 테두리없는 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입장은 실재의 일성(一性)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우리들을 벗어나게 한다. 유대-기독교적인 선민의식은 신을 하나의 궁극적인 중심으로 설정하였기 때문에 비롯된 견해일 뿐이다. 종교적이고 문화적인 다원주의를 염두에 두면서 불교의 공의 입장은 창조적인 비젼을 선사해준다. 왜냐하면 다원주의는 하나의 중심에 대한 서로 다른 많은 길을 의미하는데에 그치지 않고 근원 자체의 다원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참다운 다원주의는 초월을 초월적 일자 없이 생각하고 살아갈 수 있을 때 가능하다. 즉 현실의 다성(多性)을 하나의 중심 없이 생각할 수 있을 때 그것은 가능한 것이다. 거기에는 일성의 그림자가 깨끗이 사라진 영역이다. 간단히 말해서 그것은 불교가 절대무라고 부르는 깨달음의 세계이다. 이때 우리들은 『유마경』에 쓰여있는 노래를 우리의 노래로 부를 수 있다.
「보살에게는 대립하여 일어나는 싸움이 없습니다. 그래서 보살은 다툼이 없는 사랑을 하게 됩니다.
보살에게는 안과 밖, 즉 상대적인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보살은 차별이 없는 사랑을 하게 됩니다.
보살의 마음은 허공과 같습니다. 그래서 보살을 끝없는 사랑을 하게 됩니다.
보살은 공에 젖어 있습니다. 그래서 보살은 무아를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런 까닭에 보살은 권태를 모르는 사랑을 하게 됩니다.」
투쟁과 차별과 권태가 없는 무한한 사랑은 우리들이 이 다원주의 시대를 살아가는데 불가렬한 자유와 병행한다. 불교적 공의 실현은 따라서 종교다원주의적 입장에서 자신의 종교와 타종교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시각을 제공한다. 공은 우리들을 다원적 다원주의로 안내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무제약적인 요구의 실천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요한1서』 4:21)
만해의 보살도에서 우리들은 종교의 신학과 해방신학의 조화를 위한 길을 발견할 수 있다. 니터가 말하고 있듯이 이 「시대의 도전」로 다가온 두가지 신학적 조류의 만남을 위해서 만해의 사상을 보다 세심한 연구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겠다.
보살의 길로서의 만해의 삶의 족적들은 실천적인 차원에서의 종교다원주의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요구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대가 서있는 종교 내에서 믿고, 타자를 위해서 필요한 일을 행하십시요! 그러나 그 어디에도 집착하지 마시요! 그대가 믿는 종교에도, 그대가 손을 내미는 이웃에게도, 그리고 그대 자신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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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05.22
  • 저작시기2002.0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1948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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