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원의 해뜨는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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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제 목 : 섹스와의 섹스, 슬픈 누드
□ 총 페이지수 : 10
□ 목 차:
1. 옷의 성, 정신의 그림자
2. 반성(反性)의 성, 사회의 그림자
3. 근성(近性)의 성, 가족의 그림자
4. 무성(無性)의 성, 자아의 그림자
5. 누드의 성, 알몸의 그림자

*아래는 내용중 일부에여
박성원의 「라이히 보고서」 「해뜨는 집」 「이상(異常)·이상(李箱)·이상(理想)」 등은 자본이나 제도와 연관된 권력에 의해 왜곡된 성을 통해 성 자체의 순수성을 역설적으로 강조한다. 이 세 소설의 주인공들은 모두 김해경 혹은 이상(李箱)으로서, 그들을 통해 작가는 “사회·정치·경제적 혁명이 없이는 성의 만족은 없다”라는 빌헬름 라이히의 명제를 확인시킨다. 박성원이 라이히에 기대어 말하고 싶은 것은 금전 경제학이 정액 경제학과 만나는, 즉 마르크스와 프로이드가 결합되는 프로이드적 마르크스주의이다. 이들 소설은 모두 성적인 쾌락에 대한 두려움이 심리적인 병을 일으키므로 성의 자유를 억압하는 제반 사회적 조건을 비판하면서 보다 건강한 성 생활을 실천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본문내용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다.
5. 누드의 성, 알몸의 그림자
케네스 클라크에 의하면 알몸(naked)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몸 그 자체나 가식이 없는 본연의 상태를, 누드(nude)는 알몸에 하나의 시각을 도입함으로써 가면으로 변형되고 대상화된 상태를 나타낸다. 때문에 누드는 또다른 형태의 의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런 구분을 고려할 때 1990년대 신세대작가들의 소설에 나타난 성은 알몸의 성이 아니라 누드의 성이라고 할 수 있다. 성을 성 그 자체로 다루지 않고 사회나 가족, 자아 등의 프리즘으로 바라본 성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 중 우승제나 박성원, 백민석은 권력에 저항하는 성(反性), 배수아나 이응준, 조경란은 가족의 결핍과 충족을 나타내는 성(近性), 김영하나 박청호는 소외를 확인시켜주는 성(無性) 등을 그림으로써 알몸의 성을 누드화시키는 옷을 입히고 있다.
신세대는 공포감이나 위기감 때문에 섹스한다. 그래서 오히려 성이 육체적 행위라기보다는 지나치게 심리적인 행위이다. 흔히 "영혼을 박탈당한 세대"라고 하지만 그들은 영혼이 아니라 육체를 박탈당한 세대일 수 있다. 육체가 영혼을 위한 도구로 쓰이기 때문이다. "나는 몸으로 말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아니라 "나는 섹스한다. 그런데도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가 그들의 실존이다. 성 자체가 존재증명이 아닌 부재증명의 증거물이 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신세대문학의 성이 1)가벼움이나 쾌락을 추구한다는 기존의 논의는 그들의 성이 지닌 그런 영혼의 무게를 생각하면 그 근거를 잃게 된다. 신세대문학의 성은 그들의 환부를 보여주는 상처의 언어이다. 때문에 그들의 성은 가벼운 웃음이 아닌 무거운 울음에 보다 가깝다. 좀더 정확히 표현하면 무거운 웃음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들에게 성은 향유할 수 있는 쾌락의 은유가 아니라 일그러질 수밖에 없는 고통의 환유인 것이다. 한 번도 문학에서의 성이 누드가 아닌 알몸이었던 적이 없듯이 현실원칙이 아닌 쾌락원칙의 지배를 받아본 경우 또한 없다. 이것이 바로 신세대문학에 나타난 성 담론이 사랑의 표현이 아닌 동물적인 욕망을 배출하면서 전통적인 성관습을 붕괴시켰다고 우려하거나 기뻐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이다.
또 그들의 성이 2)개인적이고 비사회적이라는 오해는 그런 오해를 받을 정도로 신세대가 성에 관한 한 히스테리성 억압과 강박관념적인 집착을 동시에 강요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신세대의 성은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느 것도 정치성을 띠지 않은 것이 없다는 소극적 의미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자아와 사회의 공명판이라는 적극적 의미를 지닌 것이다. 발기불능이나 조루, 동성애, 근친상간, 자위 등은 모두 존재들의 정치적 무의식 속에 존재하거나 사회적 외상과 관련 있는 불구의 성들이다. 단 그들이 보여주는 이런 비정상적인 성은 정상적인 성을 희구하는 것이고, 단절적인 성은 소통을 원하는 것이다. 때문에 그들의 비도덕성이나 무책임성은 도덕성이나 책임감을 네거필름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타락한 사회에서 타락한 방법으로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다. 신세대들은 포르노 같은 성을 통해 그런 포르노를 양산하는 포르노를 닮은 사회를 비판한다.
3)이성과 반대되는 감성을 대변한다라는 의견 또한 신세대문학의 성이 이성의 전도체라는 점에서 반박될 수 있다. 신세대들은 이성을 적대시하며 욕망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 그들의 성은 성에 관한 한 가짜낙원조차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이성의 피곤한 역할을 공유한다. 그래서 그들의 성은 이성적인 저항을 지향하는 것이지 이성 자체의 실패를 증명해주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이성적이기 때문에 그들의 몸은 더 많이 벗었는데도 덜 감각적인 육체가 되는 것이다.
혹시 신세대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지퍼 없는 섹스'일 수도 있다. 그것은 완전한 이방인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이상적이고 순수한 것이기에 기대나 죄의식, 가책이 전혀 없는 섹스를 의미한다. 이런 섹스를 통해 애정과 책임감을 의도적으로 거부함으로써 모든 장애를 없애고 고도로 이상화된 동물적인 행위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혹은 앤소니 기든스가 강조하듯이 앞으로는 피임기술이나 체외수정의 발전으로 인해 성에 대한 규범이나 제약이 사라져 조형적인 성(plastic sexuality)이 부상할 수도 있다. 이제는 주어진 성이 아니라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한 성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신세대들에게조차 이런 지퍼 없는 섹스나 플라스틱으로 만든 섹스는 바벨탑처럼 불가능한 꿈으로 보인다. 감정이나 의식이 없기 위해서는 항온동물이어야지 변온동물이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항온동물인 인간은 성에 있어서만큼은 주변환경에 따라 색깔이 바뀌는 카멜레온이 된다. 성 자체가 항온성을 지닐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변수를 많이 지니고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성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라는 측면에서 성은 다시 바벨탑의 언어가 된다. 성은 영원히 의심의 해석학일 수밖에 없다. 성의 개념이나 본질은 계속 결핍되고 유예되어야 문학화될 수 있다는 모순 때문에 지금도 플라톤의 이데아나 UFO처럼 존재하고 있다.
때문에 우리가 신세대문학에게 요구하고 신세대문학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 모두가 그들의 '화장술'이 아니라 '변장술'에 대한 관심일 것이다. 어차피 그들은 新세대나 辛(sin)세대임과 동시에 scene세대이자 seen세대이다. 때문에 '보는 나'와 '보여지는 나'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면, 겉이 아닌 속을 보고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는 서로를 '본' 것이 아니라 '겪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시선의 폭력이 오히려 성욕을 떨어뜨릴 수 있다. 성을 많이 볼수록 그것에 대해 덜 생각하게 되고, 너무 많이 보여주면 직접 하지 않았는데도 실제로 한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시각의 우월성이 육체의 빈곤을 초래하는 것이다. 신세대에게나 성에게나 진정 필요한 것은 '보는 눈'이 아니라 '만지는 눈'이다. 지금 신세대들의 육체와 성, 성 담론 자체 또한 보여지지 않고 만져지기를 원한다. 그러면 이제부터는 '눈 같은 손'이 아니라 '손 같은 눈'이 움직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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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06.03
  • 저작시기20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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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195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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