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인의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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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해서도 필요하다(표 3 참조).
남성명창이 줄어들고 춤꾼이 줄어드는 것도 민속예능의 여성화 경향이다.
이번 조사의 학술적 의의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그 동안 자신의 신분 노출을 꺼려하던 재인들의 상당수가 당골 출신임을 밝혔고 본인이 확실히 실토하지 않더라도 당골 출신임이 주변 취재에 의해 밝힌 점이다.
한농선 박범훈씨 등이 전자이고 한승호 전경환 정경파 김오채 박후성 안동숙 정달영 김윤수 김수익 박송희씨 등도 후자이다. 결국 당골 가계야말로 재인들의 생산 배출구임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세습 당골들의 신분 탈출과 관련된 이야기는 눈물겨운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피 속에 흐르는 재능은 또한 이들을 다시 그토록 탈출하고자 했던(수대에 걸쳐서) 재인의 생활로 돌아오게 하고 만다. 이러한 회귀는 한 세대 건너서 일어나기도 하지만 몇 세대가 지난 후 어느 날 불쑥 솟아나기도 한다. 반대로 양반이나 중인계급 출신이 판소리를 할 경우 신분하강을 막기 위한 집안의 노력 또한 비정한 것이었다.
판소리를 둘러싼 신분상승 및 신분하강과 관련한 이야기는 봉건사회의 신분 제도와 계급의 이동(mobility), 그리고 문화의 차별화를 보여준다.
권삼득(權三得)은 전북 익산출신 양반인데 부형이 판소리꾼은 문중치욕이라며 죽이려 하자 마지막으로 판소리를 부르면서 죽겠다고 〈유언가(遺言歌)〉를 불렀는데 감동한 일가가 죽이지는 않고 족보에서 지워버린 이야기는 처절하다.
판소리 동편제의 중흥자 송만갑(宋萬甲)은 자신의 아들 기덕(基德)을 판소리를 못하게 해 경찰로 만들었다.
판소리 명창 정응민(鄭應珉)씨도 아들 권진(權鎭)씨를 경찰로 만들었으나 권진씨가 재능을 못 버려 소리를 다시 시작했고 권진씨는 또 다시 아들 회천(會泉)을 방송국 프로듀서로 만들었으나 회천씨는 다시 민속음악을 택했다. 이 같은 정씨 3대의 판소리 이탈 및 회귀는 재능과 사회차별과의 갈등에서 빚어진 것이다. 이들 정씨가는 판소리 보성제(寶城制)를 쌓아가고 있다.
동편제 명창 김소희(金素姬)씨도 처음에는 딸 박윤초(朴倫初)의 소리학습을 말렸으며 판소리 〈적벽가〉의 한승호(韓承鎬)씨는 대를 잇는 자녀가 한 명도 없다.
피리의 박범훈(朴範勳)씨는 할아버지(박창두(朴昌斗))가 가야금에 능했고 내당숙 함동정월(咸洞庭月)은 가야금 산조로 유명했고 판소리 서편제 대가였던 정응민(鄭應珉) 선생은 박씨의 할머니와 사촌지간이었다. 그런데 일찍 아버지를 여윈 박씨를 키운 작은아버지(의사)가 격리시키기 위해 경기도 양평으로 이사하는 등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허사, 박씨는 결국 피리와 작곡으로 국악계의 기둥이 되었다. 동편제 명창 강도근(姜道根)씨도 자기 대에서 소리를 마감했다.
한편 정부의 무형문화재(인간 문화재) 보호 육성 정책은 문제가 많다.
동편제 중에서도 진동편은 강도근 박송희 등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사라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판소리 명창은 남자는 8명인데 비해 여자는 10명으로 1세대의 경우 전부 남자이던 것에 비하면 여성화되어 가는 경향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춤꾼도 소리에 비해 수적으로 크게 열세인데 총 20명에 불과하다. 이중 남자가 8명, 여자가 12명으로 나타났다. 여기에는 고성오광대나 동래야유, 밀양백중놀이, 양주별산대놀이 속의 춤꾼들을 발굴, 포함시킨 경우이고 순수한 춤꾼은 남녀 각 3 4명에 불과하다.
남자의 경우 이동안, 김천흥(궁중무) 이매방 김덕명 김진홍(이외에 송화영) 등이며 여자는 김수악 장금도(이외에 조갑제) 등이다.
굿이나 연희에서 소리나 춤을 따로 분리해 내어 집계하더라도 소리가 춤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이들 재인들은 소리(歌) 기악(樂) 춤(舞) 연희(演戱) 그리고 그 원형인 무(巫) 등의 종류로 나누어지지만 대부분이 관련 분야의 학습을 골고루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소리하는 사람이 악기 한둘 다루지 못하는 사람이 없고 춤 연기 못하는 사람이 없다. 때로는 재주가 너무 많아 어느 것을 주종목으로 해야 할지 망설이게 하는 경우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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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재인,   곌보,   지방,   영호남,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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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06.04
  • 저작시기2002.0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195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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