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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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근대의 의미:상상력과 이성
2. 자연인이자 부르주아인 로빈슨 크루소
3. 자연인이자 시민인 에밀
4. 자연인이자 철학자인 장 자크 루소
5. 근대성의 종말
1. 근대의 의미:상상력과 이성
2. 자연인이자 부르주아인 로빈슨 크루소
3. 자연인이자 시민인 에밀
4. 자연인이자 철학자인 장 자크 루소
5. 근대성의 종말
본문내용
초월하여 존재할 수는 없어도, 사회에의 종속을 최소한으로 줄인 가운데 살 수 있다. 그의 육체는 사회안에 갇혀있지만 그의 영혼은 사회를 초월하여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5. 근대성의 종말?
루소는 『인간불평등기원론』의 표지 그림을 특별히 주문하여 만들었다. 그리고 이책에 그 그림을 설명하고 있는 듯한 註를 하나 달고 있다. 인용하기는 긴 문장이지만 그 註는 다음과 같다.
회망봉에 있었던 화란 선교사들은 한 사람의 호텐토트를 개종시려던 모든 노력을 기울였으나 결코 성공하지 못했다. 회망봉의 총독인 반 데어 스텔은 어린 호텐토트를 데리고 와서 그를 기독교의 교리과 유럽적인 관습에 따라 교육시켰다. 그는 화려하게 옷을 입고, 여러 언어를 배웠으며 그는 배려와 교육에 힘입어 하루가 다르게 변화되었다. 그에게 기대를 갖고 있던 총독은 그를 인도에 있는 회사에 새로 부임하는 총책임자의 고용인으로 딸려 보냈다. 총책임자가 죽은 후 그 호텐토트는 회망봉으로 돌아 왔다. 돌아 온지 며칠 지나서 그는 자신의 친척인 호텐토트인을 방문했는데, 그 떼 그는 유럽적인 의상을 벗어 버리고 양피로 만든 옷을 입기로 작정했다. 그는 벗어 버린 옷 뭉치를 들고 새로운 옷차림으로 성채로 돌아왔다. 그는 총독에게 옷뭉치를 돌려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총독님, 제가 이 구속물들을 영원히 버리는 것을 이해해 주십시오. 나는 더 이상 기독교를 믿지 않겠습니다. 저는 제 조상의 종교와 삶의 방식과 관습속에서 살고 또한 죽기로 결심했습니다. 제가 총독님의 호의를 구하는 바는 제가 걸치고 있는 목걸이와 단검을 제게 달라는 말씀입니다. 저는 총독님에 대한 사랑의 표시로서 그것들을 갖고 싶습니다." 그는 반 데어 스텔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쏜살같이 뛰쳐 나갔으며, 그 후 그는 더 이상 희망봉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The Discourse on Inequality, footnote 16, pp. 228-229.
이 주에 어렴풋이 묘사되어 있지만, 표지그림은 한편으로는 검은 연기가 뭉실뭉실 피어오르는 거대한 성채를 배경으로 총독이 앉아 있고, 그의 주위를 일단의 사람이 둘러 싸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양피옷을 입은 한 미개인이 옷뭉치를 총독의 앞에 놓고 목걸이와 단도를 몸에 걸친 채 멀리 탁트인 바다를 배경으로 지은 미개인의 오두막집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그곳으로 가고 싶어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만약 모든 인간에게 위의 호텐토트인처럼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욕망과 의지가 있다면, 루소가 당시에 두려워했던 부르주아의 확산은 저지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루소는 이 호텐토트인의 정신과 용기를 모든 사람에게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에밀』에서 끊임없이 교육을 해야만 자연인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 『고백록』에서 상상속에 사는 자신과 같은 문명인이 얼마나 자연적인 모습을 회복하기가 힘든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마찬가지로 크루소도 배가 난파되는 운명을 맞이하지 않았다면 결코 자연인으로 변환되지 않았을 것이다. 부르주아의 삶은 자기기만의 삶이다. 루소가 상상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를 연결하기 위하여 자위행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상상력을 발휘하여 항상 타자화된 입장에 서 있는 부르주아는 자기만족을 위하여 자위행위의 메카니즘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루소는 올바른 이성을 기반으로 하여 자기기만의 메카니즘을 버려야 진정한 개체성의 확립을 가져올 수 있으며, 그 결과 개인은 독립성과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된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앞 인용문에서 기술된 바와 같이 호텐토트인은 '목걸이'와 '단검'이라는 문명의 유산을 지니고 평등한 그의 동료들에게, 다시 말하면 자연상태로 돌아간다. 아마도 그 목걸이는 십자가가 달려있는 목걸이리라. 여기서 우리는 목걸이는 종교를 상징하고 칼은 힘을 상징한다고 추론해 볼 수도 있다. 어쨌든 그는 왜 문명의 유산을 완전히 저버리지 못하고 있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물론 그는 '사랑의 표시'로 그것을 갖기를 원하고 있다. 그것이 그의 진정한 의도라면 그는 후에 그것을 보면서 고독한 산책자인 루소처럼 명상에 빠져 옛날을 회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문명사회에 살았던 기간이 행복하지 않았다면, 그는 루소처럼 행복한 명상에 빠질 수 없게 된다. 또 하나의 가능한 대답은 그는 평등한 입장에서 동료들에게 돌아가길 원했지만, 그들보다 좀 더 낫기를 바랐을지도 모르고, 그리한 '허영' 혹은 '자기편애' (amour propre)의 증거로 문명의 유산을 가져갔다는 해석이다. 이 둘중에 어떤 해석을 취하더라도 필자는 루소의 기본 철학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루소가 파악하고 있는 근대성의 중요한 양상인 것이다.
그러나 루소의 입장과 전혀 상반되는 하나의 해석이 가능하다. 그것은 그 호텐토트인이 종교적 권위와 힘을 지닌 사람으로 그의 동료들을 지배하고 그들 위에 군림하기 위하여 자연상태로 돌아 갔다는 해석이다. 이러한 해석을 따를 때 우리는 우리의 사고 지평에 니체가 등장함을 깨닫게 된다. 니체가 파악한 본질적 인간은, 루소가 묘사하듯이, 독립성과 자유를 지니고 평화롭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그러한 존재는 분명 아니다. 그는 인간 내부에 들끓고 있는 자기 표현의 의지를 보았으며, 그것은 단순히 개체로서의 자유를 누리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의지를 표현할 수 있는 권력으로 연결되고 있음을 그는 보았다. 그는 루소처럼 가만히 자연을 응시하는 고릴라와 같은 인간의 모습에서 인간의 본성을 찾은 것이 아니라, 인간이 지닌 영웅적 열정, 고귀함, 무관심함 등에서 인간의 본성을 찾고 있다. 우리는 니체의 주장에서 평화로움을 초래하는 자유가 아니라 투쟁적인 인간적 고귀함이 강조되는 새로운 인간상이 출현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자유와 이성의 보장된 인간의 모습이 근대인의 전형적인 모습이라면 니체는 권력에의 의지와 주관성을 가지고 있는 새로운 탈근대주의적인 인간의 탄생을 그리고 있다. 만약 니체가 파악하는 인간이 모습이 우리자신의 본질이라면, 우리가 논의해온 근대적 개체성의 의미는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5. 근대성의 종말?
루소는 『인간불평등기원론』의 표지 그림을 특별히 주문하여 만들었다. 그리고 이책에 그 그림을 설명하고 있는 듯한 註를 하나 달고 있다. 인용하기는 긴 문장이지만 그 註는 다음과 같다.
회망봉에 있었던 화란 선교사들은 한 사람의 호텐토트를 개종시려던 모든 노력을 기울였으나 결코 성공하지 못했다. 회망봉의 총독인 반 데어 스텔은 어린 호텐토트를 데리고 와서 그를 기독교의 교리과 유럽적인 관습에 따라 교육시켰다. 그는 화려하게 옷을 입고, 여러 언어를 배웠으며 그는 배려와 교육에 힘입어 하루가 다르게 변화되었다. 그에게 기대를 갖고 있던 총독은 그를 인도에 있는 회사에 새로 부임하는 총책임자의 고용인으로 딸려 보냈다. 총책임자가 죽은 후 그 호텐토트는 회망봉으로 돌아 왔다. 돌아 온지 며칠 지나서 그는 자신의 친척인 호텐토트인을 방문했는데, 그 떼 그는 유럽적인 의상을 벗어 버리고 양피로 만든 옷을 입기로 작정했다. 그는 벗어 버린 옷 뭉치를 들고 새로운 옷차림으로 성채로 돌아왔다. 그는 총독에게 옷뭉치를 돌려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총독님, 제가 이 구속물들을 영원히 버리는 것을 이해해 주십시오. 나는 더 이상 기독교를 믿지 않겠습니다. 저는 제 조상의 종교와 삶의 방식과 관습속에서 살고 또한 죽기로 결심했습니다. 제가 총독님의 호의를 구하는 바는 제가 걸치고 있는 목걸이와 단검을 제게 달라는 말씀입니다. 저는 총독님에 대한 사랑의 표시로서 그것들을 갖고 싶습니다." 그는 반 데어 스텔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쏜살같이 뛰쳐 나갔으며, 그 후 그는 더 이상 희망봉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The Discourse on Inequality, footnote 16, pp. 228-229.
이 주에 어렴풋이 묘사되어 있지만, 표지그림은 한편으로는 검은 연기가 뭉실뭉실 피어오르는 거대한 성채를 배경으로 총독이 앉아 있고, 그의 주위를 일단의 사람이 둘러 싸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양피옷을 입은 한 미개인이 옷뭉치를 총독의 앞에 놓고 목걸이와 단도를 몸에 걸친 채 멀리 탁트인 바다를 배경으로 지은 미개인의 오두막집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그곳으로 가고 싶어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만약 모든 인간에게 위의 호텐토트인처럼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욕망과 의지가 있다면, 루소가 당시에 두려워했던 부르주아의 확산은 저지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루소는 이 호텐토트인의 정신과 용기를 모든 사람에게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에밀』에서 끊임없이 교육을 해야만 자연인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 『고백록』에서 상상속에 사는 자신과 같은 문명인이 얼마나 자연적인 모습을 회복하기가 힘든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마찬가지로 크루소도 배가 난파되는 운명을 맞이하지 않았다면 결코 자연인으로 변환되지 않았을 것이다. 부르주아의 삶은 자기기만의 삶이다. 루소가 상상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를 연결하기 위하여 자위행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상상력을 발휘하여 항상 타자화된 입장에 서 있는 부르주아는 자기만족을 위하여 자위행위의 메카니즘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루소는 올바른 이성을 기반으로 하여 자기기만의 메카니즘을 버려야 진정한 개체성의 확립을 가져올 수 있으며, 그 결과 개인은 독립성과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된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앞 인용문에서 기술된 바와 같이 호텐토트인은 '목걸이'와 '단검'이라는 문명의 유산을 지니고 평등한 그의 동료들에게, 다시 말하면 자연상태로 돌아간다. 아마도 그 목걸이는 십자가가 달려있는 목걸이리라. 여기서 우리는 목걸이는 종교를 상징하고 칼은 힘을 상징한다고 추론해 볼 수도 있다. 어쨌든 그는 왜 문명의 유산을 완전히 저버리지 못하고 있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물론 그는 '사랑의 표시'로 그것을 갖기를 원하고 있다. 그것이 그의 진정한 의도라면 그는 후에 그것을 보면서 고독한 산책자인 루소처럼 명상에 빠져 옛날을 회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문명사회에 살았던 기간이 행복하지 않았다면, 그는 루소처럼 행복한 명상에 빠질 수 없게 된다. 또 하나의 가능한 대답은 그는 평등한 입장에서 동료들에게 돌아가길 원했지만, 그들보다 좀 더 낫기를 바랐을지도 모르고, 그리한 '허영' 혹은 '자기편애' (amour propre)의 증거로 문명의 유산을 가져갔다는 해석이다. 이 둘중에 어떤 해석을 취하더라도 필자는 루소의 기본 철학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루소가 파악하고 있는 근대성의 중요한 양상인 것이다.
그러나 루소의 입장과 전혀 상반되는 하나의 해석이 가능하다. 그것은 그 호텐토트인이 종교적 권위와 힘을 지닌 사람으로 그의 동료들을 지배하고 그들 위에 군림하기 위하여 자연상태로 돌아 갔다는 해석이다. 이러한 해석을 따를 때 우리는 우리의 사고 지평에 니체가 등장함을 깨닫게 된다. 니체가 파악한 본질적 인간은, 루소가 묘사하듯이, 독립성과 자유를 지니고 평화롭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그러한 존재는 분명 아니다. 그는 인간 내부에 들끓고 있는 자기 표현의 의지를 보았으며, 그것은 단순히 개체로서의 자유를 누리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의지를 표현할 수 있는 권력으로 연결되고 있음을 그는 보았다. 그는 루소처럼 가만히 자연을 응시하는 고릴라와 같은 인간의 모습에서 인간의 본성을 찾은 것이 아니라, 인간이 지닌 영웅적 열정, 고귀함, 무관심함 등에서 인간의 본성을 찾고 있다. 우리는 니체의 주장에서 평화로움을 초래하는 자유가 아니라 투쟁적인 인간적 고귀함이 강조되는 새로운 인간상이 출현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자유와 이성의 보장된 인간의 모습이 근대인의 전형적인 모습이라면 니체는 권력에의 의지와 주관성을 가지고 있는 새로운 탈근대주의적인 인간의 탄생을 그리고 있다. 만약 니체가 파악하는 인간이 모습이 우리자신의 본질이라면, 우리가 논의해온 근대적 개체성의 의미는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