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무의 민중 메시야론과 문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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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한국에서의 개인적 만남들

Ⅱ. 마가복음에 있어서 예수와 민중(ochlos)

Ⅲ. 메시야와 민중(minjung)

Ⅳ. `고난 당하는 하나님의 종`은 누구인가?

Ⅴ.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

본문내용

로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성서에 대한 "소유" 논쟁은 타당하지 않을 뿐 아니라 비신앙적인 것이라 생각한다. 성서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Ⅴ.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
마가복음에서 예수와 백성(ochlos)의 관계를 통하여 규정되는 민중의 기독교적 이념은, 계급적인 교회의 역사 속에서 실현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억압되었다. 1994년 이후로 유럽의 가톨릭 교회 내에서 "우리가 교회이다"라는 표어와 함께 교회 백성(Kirchenvolk)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제왕적인 사교직(司敎職, Episkopat)이 초기 교회에서 형성될 때부터, 교회는 교황의 보편적 사교직이 "아래를 향하여" 다스리며 그리스도의 백성을 "교회 백성"(Kirchenvolk)으로 추락시키는, "위로부터"의 계급체제(Hierarchie)로 발전되어 왔다.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은 하나님의 백성을 분열시켰다. "평신도"라는 말은 본래 laos 곧 하나님의 백성의 한 지체를 말하는데, 이 하나님의 백성으로부터 "성직자"가 분리됨으로써 "잘 알지 못하는 자,""직권이 없는 자,""능력이 없는 자" 곧 "평신도"라는 단어가 생겨나게 되었다. "철두철미 평신도"라는 말은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자를 뜻한다. 계급체제적 차원에서 "백성"은 "거룩한 통치,""목자들"을 통한 사목과 인도의 대상으로 생각될 뿐이다. 교회의 백성은 이 무신적이며 비기독교적인 소외에 대하여 점차적으로 무관심과 침묵으로 반응하였다. "교회에 가야" 할 "강제성"이 사라진 이후로, 백성은 교회를 버리고 있다. 이리하여 교회 없는 백성과 백성 없는 교회가 생겨나고 있다. 이것은 교회의 소리 없는 쇠퇴를 말하며, 이 쇠퇴는 교회 자신이 야기한 것이다. "백성을 위한 교회"가 "백성의 교회, 백성을 통한 교회"로 될 때, 계급체제적 보호교회(Betreungskirche)가 다양한 참여를 가진 공동체 교회(Gemeindekirche)로 될 때, 교회와 백성의 오래 된 괴리가 극복될 것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가 평신도를 소외시키는 계급체제인 것과 마찬가지로 개신교회는 목회자 귀족체제 혹은 신학적, 목회적 전문가 귀족체제(Expertokratie)가 되었다. 사람들의 종교적 욕구들을 피상적으로 관리해 주는 교회는 결코 어떠한 "백성의 교회"(Volkskirche)도 만들지 못한다. 또한 오늘 날 추구되고 있는 "백성을 위한 교회,""타자를 위한 교회" 혹은 "세계를 위한 교회"의 프로그램들도 백성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이 프로그램들은 "...를 위한"이라는 단어를 통하여 교회와 백성을 분리시키고 백성을 목회의 대상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예수와 백성에게 상응하는 백성의 교회는 오직 교회 공동체의 혁신을 통하여 백성으로부터, 백성을 통하여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라틴 아메리카 가톨릭 교회의 기초 공동체들과 자유교회들 그리고 오순절 교회들은 이에 대한 좋은 예와 모범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교회와 백성의 관계에 대한 다른 형태를 생각할 수 있으며, 이러한 형태는 교회의 개념을 확대시킬 수 있을 것이다.
) 이것을 나는 아래 문헌에서 자세히 기술하였다: Kirche in der Kraft des Geistes (Munchen, 1975), 141-152.
복음서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자들 즉 신자들의 보이는 교회(manifeste Kirche)가 있고, 가난한 자들과 예수를 기다리는 자들의 보이지 않는 교회(latente Kirche)가 있다. 신자들의 보이는 공동체(Gemeinschaft)는 그리스도의 사도직(Apostolat) 안에서 사는 것을 의미한다: "너희의 말을 듣는 사람은 곧 나의 말을 듣는 것이다"(눅 10:16).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는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 20:21). 여기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세계를 향한 그의 메시야적 파송에 복종하는 사도직 안에서 그가 실재적으로 임재(Realprasenz) 할 것을 약속한다. 이리하여 그의 공동체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하나님과의 화해를 위한 초대를 선포한다(고후 5:20). 그리스도께서 자기와 자기의 공동체를 동일화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실재적 임재는 공동체의 선포와 성례전과 친교와 봉사에 권위를 부여해 준다. 이것은 적극적 동일화(Identifikation)이다.
이와 비슷하지만 수동적 의미의 그룹이 가난한 사람들, 굶주린 사람들, 목마른 사람들, 옥에 갇힌 사람들 곧 오클로스인데 그리스도가 이들 가운데 임재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들을 방문하는 자는, 나를 방문하는 것이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마 25:40). 이것은 어린이들에게도 해당한다: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 하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다"(마 18:5).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과 어린이들이 복되다고 축복한다. 하늘 나라가 이미 그들에게 속하기 때문이다.
백성의 가난한 사람들과 어린이들과 그리스도의 이 보이지 않는 친교를 교회론에 받아들일 때, 그 결과로 "실재적으로 존재하는 교회"가 다리를 놓아야 하는 커다란 긴장이 나타나게 된다: 그리스도가 계신 거기에 교회가 있다 (Ubi Christus - ibi ecclesia). 그리스도의 참 교회는 그리스도의 친교가 있는 곳에 있다. 신자들의 보이는 공동체와, 가난한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공동체 안에, 즉 신자의 공동체와 가난한 사람들, 백성의 사랑하는 사람들과 어린이들의 공동체 안에, 온전한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신다. 그의 사도직은 교회가 무엇인가를 말해주며, 가장 작은 자들은 교회가 누구에게 속하는지를 말해준다. 숨어계신 그리스도는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을 백성의 가난한 사람들과 어린이들 안에서 기다린다. 계시된 그리스도(manifest Christ)는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과 함께 있는 사람들에게 찾아온다. 사도직 안에는 부활하였고 장차 올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신다면, 가난한 사람들 안에서는 고난 당하며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며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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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06.25
  • 저작시기2002.0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197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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