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올림픽에 대한 언론에 전반적인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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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서울올림픽에 관한연구

2.160개국 참가한최대 제전

3.라디오 인터뷰

4.후원언론사 선정(중앙일보, 한국방송공사)

5.국내홍보

6.언론사의 군권에 대한 개입 등...

본문내용

소련 등 공산권 14개국은 84년 로스앤젤레스대회 불참으로 보복했다.
88 서울올림픽은 76년 몬트리올올림픽 이후 22년만에 처음으로 IOC 회원국 대부분이 참가한 사상 최대의 제전이었다. 따라서 88서울올림픽은 그간 비대해진 국제경기연맹의 영향력, 올림픽을 통해 확산된 민족주의적 시위 그리고 스포츠를 통해 드러난 국가 간의 정치·외교적 갈등과 이질적인 문화권 간의 충돌 등을 어떻게 조화시켜 IOC의 전통과 권위를 유지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러한 문제들이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국제협력차원에서 구체적으로 시험받게 된 것이다.
■ 국가이미지 개선 효과
9월 17일부터 10월 2일까지 열렸던 서울올림픽은 개최 전까지 역대 올림픽 중에서 국제정치적 측면에서 가장 말이 많았던 대회이면서도 막상 개최 후에는 대회 운영, 참가규모, 시설 등 모든 면에서 가장 성공적인 대회로 기록됐다.
특히 남북한의 군대가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 소련(러시아) 중국이 32년만에 협력적으로 참가한 서울올림픽은 개최일이 임박하면서 처음의 우려와 달리 성공적인 대회가 예견됐다. 서울올림픽에 참가한 160개국은 당시 유엔 회원국 보다 1개국이 더 많고 84년 LA올림픽 참가국 숫자보다 20개국이나 많은 것이다. 참가선수 1만3,600여명, 25만명의 관광객, 4,700여명의 보도진, 대회의 위성중계로 전세계인의 이목을 서울로 집중시켰다.
9월 17일의 개회식과 10월 2일 폐회식 행사는 역대 올림픽 중 최대의 장관을 이루었다는 것이 외국 언론의 한결같은 평가였다. 특히 IOC위원장 특별고문 아디 다카치(당시 70세·유고인)가 30여명의 전문가 의견을 토대로 작성한 서울올림픽 평가보고서는 총18개 평가항목 중 경기장과 연습장 운영, 경기결과 통보 체계, 개회식, 시상식, TV전송, 경기기구의 안전관리,한국스포츠에 미치는 영향, 올림픽을 통한 국가 이미지 개선 등 절반에 해당하는 9개 부문에서 만점을 매겼다. 한국 갤럽조사연구소가 대회 폐막 직후인 10월4일 발표한 「서울올림픽에 대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한국인 95.4%.가 「올림픽을 잘 치렀다」, 91.3%가 「개회식이 잘 되었다」고 평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올림픽의 더욱 큰 성과는 한국의 이미지를 크게 높이고 한국과 소원했던 나라들(당시 공산권)을 가깝게 하는 데 기여해 「불안한 분단국」 「전쟁을 치른 가난한 나라」 라는 인식을말끔히 씻어낸 것이다. 또 한국은 금메달 12개로 소련 미국 동독에 이어 종합 4위를 차지함으로써 주최국으로서 체면을 세웠다. 이는 역대 올림픽 개최국 가운데 우수한 성적이다.
■ 북방외교에 새로운 물꼬
서울올림픽은 외교적으로도 큰 성과를 이룩했다. 참가 160개국 중 비수교국은 32개국으로 이들에게 한국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를 심어준 것은 그후한국의 북방외교에 박차를 가하는 계기가 됐다.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올림픽과 동시에 개최되었던 문화제전을 통해 동유럽, 러시아 예술과의 만남이우리의 분단문화 극복의 계기가 되었음은 값진 체험이었으며 국악이 지배한 폐회식 공연은 우리의 전통예술이 세계 속에 자리잡으려는 값진 시도였다.
81년 2월 당시 서울시장이 올림픽 유치계획을 발표했을 때 대부분의 국민들은 「무모한 계획」 「허황된 발상」으로밖에 받아들이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그때까지 20년간 올림픽 개최 장소는 멕시코시티를 빼면 모두 선진국이었으므로 개도국으로서 감히 올림픽 개최를 꿈꿀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올림픽을 선진국 도약의 획기적 발판으로 삼자는 국민적총의가 모아짐으로써 서울올림픽의 성공을 위해 매진했던 것이다.
국제정치의 오염이 심각한 올림픽제전에서 48년 런던대회 때 체코팀 여자기술위원의 망명요청이나, 56년 멜버른대회 때 헝가리 펜싱팀선수 3명의 미국망명 사건과 같은 골칫거리도 서울올림픽에는 전혀 없었다. 한국은 이 점에서도 완벽한 안전관리에 성공했다. 92년 하계올림픽을 유치했던 스페인은 합동근무를 통해 「서울의 안전」을 배웠으며 92년 동계올림픽을 열었던 프랑스의 알베르빌과 60개국 영연방대회를 개최할 뉴질랜드도 서울올림픽의 경험을 배웠다. 또 우리는 가난한 나라들이 참가할 수 있도록 유고에 60만달러를 제공하고 대한항공이 아프리카 국가들의 항공료를 대폭 할인해주는 등 대회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성의를 다했다.
■ 경제적으론 실패한 대회
그러나올림픽 개최후 한국은 10년이 채 못돼 IMF 구제금융을 요청하는 경제위기를 당하는 나라가 됐다. 이는 그간의 거품경제가 말해주듯 후진국에 시혜를 베풀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선진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허세에 의해 대외협력 관리를 거품으로장식하려는 오류를 범했기 때문이다. 서울올림픽은 30억달러짜리 제전이었으나 이처럼 막대한 투자에 비해 경제적으로 크게 성공한 대회라고는 볼 수 없다. 정부는 서울올림픽이 끝난 뒤 경제적 성과를 발표하지 않았다. 몬트리올·멕시코·도쿄 올림픽도 막대한 투자의 후유증으로 대회 후 불황을 겪었다. 서울올림픽 10년 후에 나타난 상황이긴 하지만, 한국이 IMF 사태를 맞게 된 것도 서울올림픽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북한이 끝내 불참한 것과 대회 기간 중 반미감정이 높아진 것도 서울올림픽의 어둠이다. 한국은 서울올림픽 개막 한달 전까지 남북한 국회회담·올림픽회담 등을 통해 북한이 참석하도록 접촉을 계속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또 복싱경기를 놓고 심판이 한국에 유리한 판정을 내렸다며 일부 미국 언론이 이의를 제기하면서 불거진 반미감정은 경기장에서 한국 관중이 미국팀에 야유를 퍼붓는 등 거친 반응으로 이어졌고 미국 선수의 절도사건까지 겹쳐 악화했따. 비록 본류는 아니고 일시적 역풍이긴 했지만 이러한 현상은 한·미 양측에 반성의 계기를 만들었다.
■ 서울올림픽에 관한연구
이세기 「올림픽과 국가발전」(전망사, 1984)
홍순호 「88 서울올림픽과 국제협력」(「국제협력론」, 한학문화, 1998)
■ 글쓴이/홍순호(洪淳鎬)
<약력>
서울대 문리대 졸. 파리대학 국제관계대학원 석사. 프랑스 소르본대학 국제정치학 박사 현재 이화여대 대학원 지역연구 협동과정 주임교수 저서 한국 국제관계사 이론(93년), 국제협력론(98년).

키워드

서울,   올림픽,   언론
  • 가격2,300
  • 페이지수11페이지
  • 등록일2002.07.01
  • 저작시기2002.07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197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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