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32
-
33
-
34
-
35
-
36
-
37
-
38
-
39
-
40
-
41
-
42
-
43
-
44
-
45
-
46
-
47
-
48
-
49
-
50
-
51
-
52
-
53
-
54
목차
이육사 연구
생애
연보
시 감상
월간 우리교육 1996년 6월호에서 발췌 글-신경림(시인)
일제하 암흑기의 별 (강진호 / 문학평론가 )
이육사의 기러기 박 태 일(시인, 경남대 교수)
생애
연보
시 감상
월간 우리교육 1996년 6월호에서 발췌 글-신경림(시인)
일제하 암흑기의 별 (강진호 / 문학평론가 )
이육사의 기러기 박 태 일(시인, 경남대 교수)
본문내용
경남대 교수)
연이 닿다보니 안동, 영양 쪽 걸음이 잦다. 지난 여름부터 한 해 동안에 세 번이다. 걸음마다 이저곳을 달리 해 둘러본 셈이지만, 벌써 낯익은 한길과 능선 그리고 물줄기가 마음 여러 자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풍산들의 스산한 가을 햇살도 좋지만, 병산서원이 불러 앉힌 풍광은 언제나 찬탄을 부른다. 그 멋스런 자리를 동강내며 세워진 최신 숙박시설은 지금도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어찌 자본이 자신을 포기하랴. 이웃 물돌이동의 변신은 갈 때마다 놀라움을 더하게 한다. 흙빛 시멘트로 쳐 올린 벽이며 길바닥 그리고 장터 뺨치는 소란스러움에 마을로 들어설 엄두도 내지 못하고 물가로 걸음을 돌렸던가.
영양은 영양대로 가슴 두근거리게 하는 몇 갈래 길을 숨기고 있다. 이병각 시인이 자신의 시에다 옮겨놓은 낡은 사당으로 올라서는 원촌 옛길. 창수로 넘어서는 한적한 길은 그 너머 영덕 갯가에서 보냈던 내 이십대의 한때를 새삼스러운 밀물로 돌려세운다. 오일도와 조지훈 생가로 이어지는 길로 따르다, 선돌 못미처 이병철 시인의 잊혀진 생가와 우물터를 떠올리는 것도 한 즐거움이다. 물소리 돌돌 구를 그 언저리에 그의 고단한 삶이 가재 등껍질처럼 어둡게 깃들어 있으리라. 오일도를 민족시인이라 새긴 시비의 글귀가 거슬리긴 하지만, 근대 인물인 오일도나 조지훈의 생가까지 도문화재로 만들어놓고 돌보는 마음씨는 참으로 기껍다.
그리고 이육사. 이육사를 떠올리면 마음이 아프다. 이육사 시비를 보러 안동으로 처음 들어선 때가 대구에서 잠시 군 생활을 할 때인 1976년 무렵이었던 듯 싶다. 낙동강 물가에 세워져 있었던 그 시비가 안동댐 건설공사와 함께 댐 밑으로 옮겨간 것도 모른 채 다시 찾아 나섰다 못 찾고 돌아섰던 때는 또 몇 해가 흐른, 대학의 복학생 무렵이었다. 부석사에서부터 시작해서 안동, 고령을 거쳐 하단에 이르는, 낙동강 긴 답사기획의 어느 더운 여름 한낮이었다. 지금 그 육사시비는 광복열사 석주 이상룡 선생의 고택인 임청각을 멀리 건너다보며, 댐 아래 이른바 민속촌 들어서는 입구에 놓여 있다. 버려져 있다. 막무가내 술청으로 드는 입구에 놓인 육사시비.
병 없이 앓는,
안동댐 민속촌의 헛 제삿밥 같은,
그런 것들을 시랍시고 쓰지는 말자.
강 건너 臨淸閣* 기왓골에는
아직도 북만주의 삭풍이 불고,
한낮에도 무시로 서리가 내린다.
진실은 따뜻한 아랫목이 아니라
성에 낀 창가에나 얼비치는 것,
선열한 陸史의 겨울 무지개!
유유히 날던 학 같은 건 이제는 없다.
얼음 박힌 山川에 불을 지피며
오늘도 타는 저녁 노을 속,
깃털을 곤두세우고
찬 바람 거스르는
솔개 한 마리.
*臨淸閣은 임정 국무령을 지낸 石洲 이상룡 선생의 故宅으로 그 집 안은 사 대에 걸쳐 쓰라린 풍상을 겪었다.
- 김종길, 「솔개 - 안동에서」
김종길 시인의 단단하고 품격 높은 경험적 서정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이상룡 선생과 이육사, 그리고 김종길 시인. 세 사람을 잇는 '솔개'의 정신은 민족/반민족 담론 속에서는 자리가 분명했다. 그러나 근대/탈근대 담론이 우리 사회 안밖을 뒤덮고 있는 오늘날, '솔개'의 정신은 술청의 객담거리로 떨어져버렸다. 의열단원이었던 육사, 그 의열이 깃들 자리는 더욱 좁아졌다. 문학관이나 문학상은 그만두고라도, 소박한 이육사문학제마저 열린다는 풍문이 들리지 않는 것도 내 귀가 가는 탓일 것이다.
우리 근대문학사에서 작품과 그 삶이 한 고리로 묶여드는 희귀한 보기에 드는 시인은 많지 않다. 이육사, 그의 시대 유치진과 주요한 그리고 이광수는 거의 왜인이 되어 '북만주'를 호기롭고도 자랑스럽게 오갔다. 그의 시대 동래의 박차정 열사는 남편인 의열단장, 밀양의 김원봉 장군과 지나의 모래 '삭풍' 속을 떠돌고 있었다. 할머니 의령댁과 어머니. 이른바 정신대, 곧 수욕여성에 뽑히지 않기 위해 일찌감치 아버지와 혼인했던 어머니의 고향은 현풍이다. 이육사의 시대, 아버지는 서부 경남 합천의 어느 조그만 초등학교의 새내기 교사였다.
君向中原我達邱
後方留約每關愁
八方豪俊同趨路
一局風雲急變秋
月景憑知燕戌雁
旅情安涉鴨江舟
眠獅欲起狐將退
雪滿乾坤杖劍遊
- 이선장의 「送陸史李活之北京」
그대는 북경 나는 달구벌
언제나 남긴 약속 마음에 걸려
온 나라 호걸들 함께 좇는 길인데
세상은 바람구름 급히 변하는 가을
연경의 달 경치는 기러기떼로 알고
부디 몸조심하게 압록강 배 건널 때
잠든 사자 깨려하면 여우야 물러가리
온누리엔 흰눈, 칼 집고 떠나네
- 시인의 옮긴시에 글쓴이 손봄
그리고 그의 시대, 그의 동지가 남겨둔 한 시 한 편을 뒤늦게 찾아 읽는 기쁨이 가슴을 쓸쓸하게 한다. 이름 모를 이의 한시집을 뒤적이다 찾은 한 편이다. 같은 시집에서 육사의 시 「광야」와 「청포도」를 애써 한역하고 있는 모습이 일찌감치 육사와 맺었던 깊은 인연을 엿보게 한다. 1926년 스물 셋 젊은 나이부터 서울서 북경감옥으로 압송되었던 1940년까지 육사는 여러 차례 북경을 오갔다. 이 시에서 말하는 '육사를 보낸' 때가 언젠가는 알 수 없다, 젊은 시기였을 것이라는 짐작뿐. 어쨌든 "원수놈들이 못 견디게 미워지면 입에 흘러나오는 대로의 語句들을 붓끝 가는 대로 적어둔 것이 日政때의 詩稿 약간편이며 놈들에게 보이지 않게 감추어 온 것"이라 한 시인의 '卷頭言'을 그대로 믿는다면, 그 시기 "잠든 사자 깨려할 제 여우야 물러가리"라는 표현은 노골적이다.
지역자치제가 급히 시행되고, 많은 문화행사가 거듭되고 있다. 도나 시 문화관이니 문학관, 기념물과 같은 문화공공재도 곳곳에서 모습을 들내고 있다. 그 가운데서는 없어야 될 것이 마련된 경우가 있는가 하면, 졸속으로 이루어져 벌써부터 처치 곤란한 애물단지로 떨어진 것도 있다. 더욱 두려운 일은 지역문화 발전이라는 이름 아래, 정체가 의심스러운 이의 상찬도 버젓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 보면 육사에 대한 세상의 대접이 너무 소흘하다. 시인이야 후대의 대접에 무슨 관심이 있으랴만, 다만 남은 이들의 삶이 버겁고, 문학이 무거울 때마다 그의 시대가 가슴을 울린다. 이육사문학제나 이육사문학상 시상식장의 뒷자리를 조용히 지킬 수 있는 즐거움이 머지 않아 주어지기를 기대한다.
연이 닿다보니 안동, 영양 쪽 걸음이 잦다. 지난 여름부터 한 해 동안에 세 번이다. 걸음마다 이저곳을 달리 해 둘러본 셈이지만, 벌써 낯익은 한길과 능선 그리고 물줄기가 마음 여러 자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풍산들의 스산한 가을 햇살도 좋지만, 병산서원이 불러 앉힌 풍광은 언제나 찬탄을 부른다. 그 멋스런 자리를 동강내며 세워진 최신 숙박시설은 지금도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어찌 자본이 자신을 포기하랴. 이웃 물돌이동의 변신은 갈 때마다 놀라움을 더하게 한다. 흙빛 시멘트로 쳐 올린 벽이며 길바닥 그리고 장터 뺨치는 소란스러움에 마을로 들어설 엄두도 내지 못하고 물가로 걸음을 돌렸던가.
영양은 영양대로 가슴 두근거리게 하는 몇 갈래 길을 숨기고 있다. 이병각 시인이 자신의 시에다 옮겨놓은 낡은 사당으로 올라서는 원촌 옛길. 창수로 넘어서는 한적한 길은 그 너머 영덕 갯가에서 보냈던 내 이십대의 한때를 새삼스러운 밀물로 돌려세운다. 오일도와 조지훈 생가로 이어지는 길로 따르다, 선돌 못미처 이병철 시인의 잊혀진 생가와 우물터를 떠올리는 것도 한 즐거움이다. 물소리 돌돌 구를 그 언저리에 그의 고단한 삶이 가재 등껍질처럼 어둡게 깃들어 있으리라. 오일도를 민족시인이라 새긴 시비의 글귀가 거슬리긴 하지만, 근대 인물인 오일도나 조지훈의 생가까지 도문화재로 만들어놓고 돌보는 마음씨는 참으로 기껍다.
그리고 이육사. 이육사를 떠올리면 마음이 아프다. 이육사 시비를 보러 안동으로 처음 들어선 때가 대구에서 잠시 군 생활을 할 때인 1976년 무렵이었던 듯 싶다. 낙동강 물가에 세워져 있었던 그 시비가 안동댐 건설공사와 함께 댐 밑으로 옮겨간 것도 모른 채 다시 찾아 나섰다 못 찾고 돌아섰던 때는 또 몇 해가 흐른, 대학의 복학생 무렵이었다. 부석사에서부터 시작해서 안동, 고령을 거쳐 하단에 이르는, 낙동강 긴 답사기획의 어느 더운 여름 한낮이었다. 지금 그 육사시비는 광복열사 석주 이상룡 선생의 고택인 임청각을 멀리 건너다보며, 댐 아래 이른바 민속촌 들어서는 입구에 놓여 있다. 버려져 있다. 막무가내 술청으로 드는 입구에 놓인 육사시비.
병 없이 앓는,
안동댐 민속촌의 헛 제삿밥 같은,
그런 것들을 시랍시고 쓰지는 말자.
강 건너 臨淸閣* 기왓골에는
아직도 북만주의 삭풍이 불고,
한낮에도 무시로 서리가 내린다.
진실은 따뜻한 아랫목이 아니라
성에 낀 창가에나 얼비치는 것,
선열한 陸史의 겨울 무지개!
유유히 날던 학 같은 건 이제는 없다.
얼음 박힌 山川에 불을 지피며
오늘도 타는 저녁 노을 속,
깃털을 곤두세우고
찬 바람 거스르는
솔개 한 마리.
*臨淸閣은 임정 국무령을 지낸 石洲 이상룡 선생의 故宅으로 그 집 안은 사 대에 걸쳐 쓰라린 풍상을 겪었다.
- 김종길, 「솔개 - 안동에서」
김종길 시인의 단단하고 품격 높은 경험적 서정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이상룡 선생과 이육사, 그리고 김종길 시인. 세 사람을 잇는 '솔개'의 정신은 민족/반민족 담론 속에서는 자리가 분명했다. 그러나 근대/탈근대 담론이 우리 사회 안밖을 뒤덮고 있는 오늘날, '솔개'의 정신은 술청의 객담거리로 떨어져버렸다. 의열단원이었던 육사, 그 의열이 깃들 자리는 더욱 좁아졌다. 문학관이나 문학상은 그만두고라도, 소박한 이육사문학제마저 열린다는 풍문이 들리지 않는 것도 내 귀가 가는 탓일 것이다.
우리 근대문학사에서 작품과 그 삶이 한 고리로 묶여드는 희귀한 보기에 드는 시인은 많지 않다. 이육사, 그의 시대 유치진과 주요한 그리고 이광수는 거의 왜인이 되어 '북만주'를 호기롭고도 자랑스럽게 오갔다. 그의 시대 동래의 박차정 열사는 남편인 의열단장, 밀양의 김원봉 장군과 지나의 모래 '삭풍' 속을 떠돌고 있었다. 할머니 의령댁과 어머니. 이른바 정신대, 곧 수욕여성에 뽑히지 않기 위해 일찌감치 아버지와 혼인했던 어머니의 고향은 현풍이다. 이육사의 시대, 아버지는 서부 경남 합천의 어느 조그만 초등학교의 새내기 교사였다.
君向中原我達邱
後方留約每關愁
八方豪俊同趨路
一局風雲急變秋
月景憑知燕戌雁
旅情安涉鴨江舟
眠獅欲起狐將退
雪滿乾坤杖劍遊
- 이선장의 「送陸史李活之北京」
그대는 북경 나는 달구벌
언제나 남긴 약속 마음에 걸려
온 나라 호걸들 함께 좇는 길인데
세상은 바람구름 급히 변하는 가을
연경의 달 경치는 기러기떼로 알고
부디 몸조심하게 압록강 배 건널 때
잠든 사자 깨려하면 여우야 물러가리
온누리엔 흰눈, 칼 집고 떠나네
- 시인의 옮긴시에 글쓴이 손봄
그리고 그의 시대, 그의 동지가 남겨둔 한 시 한 편을 뒤늦게 찾아 읽는 기쁨이 가슴을 쓸쓸하게 한다. 이름 모를 이의 한시집을 뒤적이다 찾은 한 편이다. 같은 시집에서 육사의 시 「광야」와 「청포도」를 애써 한역하고 있는 모습이 일찌감치 육사와 맺었던 깊은 인연을 엿보게 한다. 1926년 스물 셋 젊은 나이부터 서울서 북경감옥으로 압송되었던 1940년까지 육사는 여러 차례 북경을 오갔다. 이 시에서 말하는 '육사를 보낸' 때가 언젠가는 알 수 없다, 젊은 시기였을 것이라는 짐작뿐. 어쨌든 "원수놈들이 못 견디게 미워지면 입에 흘러나오는 대로의 語句들을 붓끝 가는 대로 적어둔 것이 日政때의 詩稿 약간편이며 놈들에게 보이지 않게 감추어 온 것"이라 한 시인의 '卷頭言'을 그대로 믿는다면, 그 시기 "잠든 사자 깨려할 제 여우야 물러가리"라는 표현은 노골적이다.
지역자치제가 급히 시행되고, 많은 문화행사가 거듭되고 있다. 도나 시 문화관이니 문학관, 기념물과 같은 문화공공재도 곳곳에서 모습을 들내고 있다. 그 가운데서는 없어야 될 것이 마련된 경우가 있는가 하면, 졸속으로 이루어져 벌써부터 처치 곤란한 애물단지로 떨어진 것도 있다. 더욱 두려운 일은 지역문화 발전이라는 이름 아래, 정체가 의심스러운 이의 상찬도 버젓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 보면 육사에 대한 세상의 대접이 너무 소흘하다. 시인이야 후대의 대접에 무슨 관심이 있으랴만, 다만 남은 이들의 삶이 버겁고, 문학이 무거울 때마다 그의 시대가 가슴을 울린다. 이육사문학제나 이육사문학상 시상식장의 뒷자리를 조용히 지킬 수 있는 즐거움이 머지 않아 주어지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