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미국의 한국군 지휘체계 확립 과정 ( 한국전쟁 5.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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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머리말

2. 한국전쟁과 미국의 한국군 통제
1) 한국군 지휘권의 이양
2) 주한미군사고문단을 통한 한국군 통제

3. 전후 한국군 조직의 개편과 통제의 강화
1) 한국군 조직의 개편
2) 준전시 상태에서의 한국군 통제

4. 맺음말

본문내용

s," Jan. 9, 1964, RG 59, Country files, 1963-66, Lot 70D209, NA.
군사정부가 선거를 통해 민간정부로 이양된 1964년에 이르러서는 이제 더 이상 정치적인 이유로 군축을 반대하는 입장은 나타나지 않았다. 한국군이 베트남전에 참전하기 직전인 1965년까지 미국의 대한정책 문서는 한국군의 감축을 실행하는 방안이 정책의 주요한 골자의 하나로 제기되었다. 1965년에 작성된 "National Policy Paper: Republic of Korea"에서는 한국에 대한 미국의 부담을 일본으로 넘겨야 한다는 점과 함께 한국군의 규모를 조만간에 10만 정도 감축해야 한다는 정책이 결정되었다.
) Department of State, National Policy Paper: Republic of Korea, Part One: U.S. Policy, November 9, 1965, NND 979519 RG 59, Box 306
그러나 결국 한국군 감축안은 예정대로 실행될 수 없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정치적인 이유가 그 첫 번째 원인이었다. 즉, 과연 한국군의 감축이 군사정부의 안정성을 뒷받침할 수 있을 것인가, 한국 내의 여론이 어떻게 표출될 것인가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가 제기된 것이다. 1963년에 나온 "Guidelines Paper"는 군사정부의 안정을 위하여 군축에 반대하였다. 미국의 이러한 입장은 주한미군과 관련된 정책에서 더 잘 나타난다. 당시 주한미군 철수를 반대했던 한국주재 미국관료들은 (1)한국 내에서 버림받았다는 두려움을 야기시킬 것이고, (2)현 한국정부의 위신이 실추될 것이며, (3)한국군의 자율적 지휘권 보장에 대한 요구를 불러 일으킬 것이며, (4)대한민국이 북한과 독자적으로 협상할 가능성을 증대시킬 것이라고 보았다.
) Macdonald, ibid., p. 68
이것은 곧 군사정부의 안정을 통해 한국의 대내적 안정을 유지하고자 한 것이었다.
정치적인 이유보다 더 큰 원인은 한국군의 베트남 파견이었다. 마치 1950년대를 통해 이승만 정부가 인도네시아 파병을 제안했던 것처럼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1961년 11월 케네디를 만난 자리에서 베트남 파병을 제안하였다. 이 제안은 미 행정부에 긍정적으로 수용되었고, 결국 미국은 1963년 말 한국군의 파병을 한국정부에 정식으로 요청하였다.
) 미국의 Bundy 차관보는 "1월 15일까지 한국군이 월남에 도착하면 미국정부에 큰 도움이 되겠다"는 견해를 주미한국대사에게 표시하였다. 〈"월남파병문제"에서 고려되어야 할 문제점〉, 대통령 비서실 문서, 보고번호 65, 제7호, 1964년 1월 6일자
1964년 초 청와대에서의 베트남 파병 논의 당시에도 "군원(軍援) 이관의 즉각 중지"를 미국 측에 요청해야 할 필요성이 파병의 조건으로 강조되었다.
) 〈"월남파병문제"에서 고려되어야 할 문제점〉. 권원이관의 즉각 중지 외에도 기타 각종 경제적 보장이 이루어져야 하며, 이러한 보장이 없다면 "미국비행기와 무기로 전쟁은 한국군이 하고, 일본만이 "돈"을 버는 결과가 될 것"이라고 분석하였다.
한국정부는 국회의 동의를 거쳐 1차적으로 1964년 9월 태권도 교관들과 함께 비전투부대를 파견하였으며, 1965년에도 한국군 공병, 운송 및 자체경비병력 등의 건설지원단 2천명을 파견하였다.
) 상기 문서에서는 한국이 SEATO의 회원국이 아니기 때문에 UN의 요청이 아니라면 비정규군이나 의용군을 보낼 수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1964년의 1차 파병 때는 한국 측이 미국에 대해 특별한 요구를 하지 않았지만, 1965년 2차 파병부터는 미국 측에 몇 가지 사안을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한국 측 요구의 핵심은 한미상호안보조약을 넘어서는 보다 확고한 안보공약과 함께, 더 이상의 주한미군 철수를 막는다는 것이었다. 당시 국무성과 Korea Task Force에서 대한정책을 입안하였던 Donald S. Macdonald는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으로 인하여 "한국군의 감축 문제는 또다시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 Macdonald, From Liberation to Self-reliance: Twenty Years Records(Westview Press, 1992), p. 99
4. 결론
1960년대 대한정책은 1950년대의 대한정책에 대한 비판 위에서 제기되었다. 경제개발원조를 기본 골격으로 하여 한국 내부에서의 사회개혁, 한일관계의 정상화 등이 대한정책의 중요한 기조로 결정되었다. 군사원조 중심의 1950년대 원조와는 질적으로 다른 차이를 갖는 것이었다.
정책 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한국군 감축을 위한 정책은 1950년대와 동일하게 1960년대 초반에도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한국군의 감축과 함께 주한미군을 감축하고, 군의 감축을 통해 나타날 수 있는 공백을 현대식 무기로 확충한다는, 1950년대와 거의 유사한 군축정책이 그대로 표출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의 군축정책은 정책 실행을 가능하게 하는 배경, 정책의 목표 등에서 1950년대와는 다른 내용을 가지고 있었다. 남북한 군의 전력에 대한 평가, 경제개발을 위한 비용의 전용 등을 군축의 명분으로 삼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한국군 감축 정책은 결국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으로 실패하였지만, 당시 미국의 대한정책 기조를 잘 보여주는 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60년대는 세계사뿐만 아니라 한국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세계는 베트남전을 계기로하여 정치, 사회, 문화, 경제적으로 한차례의 변화를 겪었던 시기이다. 한국은 경제개발의 기치 하에 한일협정, 베트남 전쟁 참전 등을 통해 사회 전체의 거대한 변화를 이끌었던 시기이다. 이 시기 미국은 새로운 대한정책을 입안하며, 새로운 관점을 가지고 한반도를 바라보기 시작하였다. 1940년대에는 이데올로기의 전쟁터로서, 1950년대에는 완충지대로서 강조되었던 한반도는 1960년대 들어서 양자의 역할이 모두 강조되기 시작하였다. 한국에 대한 경제개발원조와 군축정책은 이 두가지 위상 사이에서의 갈등과 조화를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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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08.12
  • 저작시기20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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