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의학 교섭의 역사 한의학과 서양의학의 만남 일본 보건의료의 근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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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한의학과 서양의학의 만남

2.동서의학 교섭의 역사 - 중국의 경우

3.일본 보건의료의 근대화 과정

4.동서의학 교섭의 역사 - 한국의 경우

본문내용

차이가 없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운영과 활동의 주체, 한·양방 의료의 절충 수준, 의술 수준과 실시 지역 및 강도의 측면에서는 종전과 큰 차이를 보인다.
우선 운영과 활동의 주체를 보면, 일본인이 모든 보건의료 기구를 장악하였다. 즉 보건의료기관의 의료요원과 행정관리들을 일본인으로 대체, 임명하였다. 일부 분야에 조선인이 남아 있었다고 해도 형식적인 자리이거나 하급직이 고작이었고 대부분의 요직은 일본인의 차지였다.
다음으로 한·양방 절충의 측면을 보면, 정부의 의료활동에서 한의학을 노골적으로 배제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한·양방 겸용 병원이었던 광제원의 조선인 한의사들은 일본인 양의사들로 대체되었으며, 그 후신인 대한의원은 철저하게 근대서양의료기관으로 기능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정부 차원의 공적 의료가 근대서양의료 한 가지로 거의 일원화되었음을 뜻한다.
통감부는 민간의 한의약 종사자에 대해서는 일정 정도 지위를 허용하는 정책을 취하였는데, 이는 일본에서 한방의사를 전면 부정한 것과는 구별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강점 이후에는 1913년에 반포된 <의생규칙(醫生規則)>에 의거하여 이들 한의약 종사자들을 의사(醫士)나 의사(醫師)가 아닌 의생으로 격하하여 역할을 제한하였으며, 또 재생산구조를 억제하는 정책을 펼침으로써 한의학은 거의 질식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의생규칙이 반포된 뒤 1년 동안 면허 등록을 한 의생의 수는 5,879명이었는데 30년 뒤인 해방 무렵에는 그 수가 1,000명 미만으로 줄어든 것만 보아도 그 실상을 대번에 알 수 있다. 그에 반해 일제 강점초 100명 가량에 지나지 않았던 조선인 의사는 해방 당시 3,000여명으로 크게 증가하였다. (물론 이것도 당시 인구 2,300여만명에 비하면 대단히 적은 인원이다.) 일제가 일본 국내에서보다는 상대적으로 완만한 한방 억제 정책을 펼쳤다고 하지만 그 결과는 대동소이했던 셈이다.
의술 수준과 실시 지역 및 강도라는 측면을 보면, 대한의원의 의술 수준은 당시 일본의 의학 실력을 반영하듯 수준이 매우 높았고, 근대서양의술의 실시 지역은 한성에 국한되지 않고 이사청이 있는 지역까지 확대되었으며, 경찰과 헌병을 활용하여 이전보다 훨씬 강도 높게 실시되었다.
이렇듯 이전 시기에 비해 보건의료체제가 전국을 포괄하게 되었으며 각 부문마다 제법 효과를 볼 수 있는 내용을 갖추게 되었는바, 이는 일제가 조선의 근대화에 기여하였다는 주장의 근거로 쓰이고 있다.
그렇지만 당시의 보건의료체제가 어떠한 이념과 목표 아래에서 어떻게 작동하였는가를 살펴보면, 조선의 근대화에 기여하였다는 주장을 인정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예를 들어 중앙에 대한의원, 지방에 자혜의원을 두어 조선인 빈민환자들을 구료하였지만, 일본 '천황' 또는 일본인 지배자에 의한 은총의 형식으로 시행된 점이 단적으로 그러한 사정을 말해 준다. 그리고 일제의 보건의료체제는 매우 무단적인 성격을 띠었다. 즉 보건의료는 식민지 지배수단으로 활용된 것이다.
또한 일제가 크게 자랑하던 근대서양식 병원은 주로 일본식민주의자들과 조선인 부역자들에게 복무하였다. 이러한 특성은 전체 민중의 편의를 지향한다는 근대성과 거리가 멀 뿐 아니라, 특권적 형태의 보건의료가 축소되어 가던 대한제국 초기까지의 경향에도 역행하는 것이다.
이 시기에 일본이 점차 조선의 국권을 장악하게 되면서 그것을 되찾기 위한 흐름과 관련되는 보건의료 활동도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한 활동은 한편으로는 힘을 기르기 위한 단체와 학교 설립의 형태로 표출되었다. 김익남, 안상호 등 의학교 교관들과 유병필, 장기무 등 의학교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근대서양의학을 공부한 (양)의사들이 의사연구회(醫事硏究會)를 창설하고 한의사가 주축이 되어 동제의학교(同濟醫學校)를 설립한 것이 그 예이다. 또한 조선인 (양)의사들과 한의사들이 국권수호와 보건의료의 자주성 회복을 위해 자신들의 배경과 이해를 뛰어넘어 협조하는 모습도 이 시기에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가 지속되면서 조선인 의사와 한의사(의생) 사이에는 협조보다는 갈등과 질시의 모습이 점차 더 뚜렷해져 갔다.
4. 맺는말
1876년의 문호개방 이래 근대서양의학과 보건의료제도가 도입되어 기존의 것들과 더불어 새로운 보건의료체제의 내용을 이루게 되었는바, 근대적 개혁이 진행될수록 점차적으로 외래적인 것이 중심부에 자리잡고 전통적인 것은 주변부로 밀려나게 되었다. 그러나 외래적인 것과 전통적인 것 둘 사이의 대립이 수면 아래 잠재해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신식군대'와 '구식군대'의 갈등처럼 표면적으로 노출되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리고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조선 정부의 보건의료 정책도 대체로 '구본신참론'이나 '작고참신론'에 기반을 둔, 한·양방 겸용의 성격이 짙었다. 물론 조선이 국권을 유지하였더라면 그러한 모습이 지속되었으리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일제 식민통치 초기의 길지 않은 기간 동안 그 이전 30년에 걸친 노력은 거의 수포로 돌아가 한·양방의 공존이나 협조는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렵게 되고 전통의학은 급격히 위축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한·양방 관계는 갈등과 대립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고들 하는데, 그러한 현상이 초역사적이며 필연적인 것인지 아니면 역사의 소산인지는 더욱 곰곰히 따져볼 화두일 것이다.
특히 머지않은 장래에 통일이 이루어지리라고 전망되는 오늘날, 양·한방(근대의학과 전통의학) 각각의 위상과 둘 사이의 관계가 서로 다른 남북한의 의료체계를 순조롭게 통합하기 위해서도 그러한 고찰은 더욱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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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심포지움
"동서의학 교섭의 역사"
발 표 논 문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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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쇄 1999년 3월 12일
발 행 1999년 3월 13일
발 행 인 김 광 우
발 행 처 대 한 의 학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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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격3,300
  • 페이지수67페이지
  • 등록일2002.08.29
  • 저작시기2002.08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0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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