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에 대한 모든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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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23일에는 상원도 이에 동조하였다. 이러한 미국의 요구에 따라 유엔은 2월 1일 중국을 침략자로 규정하는 결의를 44대 7, 기권 9로 채택하였다.
결국 '군사적 승리에 의한 통일·독립 한국의 수립'의 목표에 달성에 한계를 절감한 미국은 반도의 허리선을 확보하여 친미 정권을 수립하는 것으로 전쟁 목표를 축소하고, 세계 대전을 유발하지 않는 범위에서 공산측에 최대한의 타격을 입히고 그들을 협상테이블로 끌어들여 전쟁을 종결짓는다는 제한전쟁전략을 수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5. 전선의 교착과 소모전의 지속
1) 휴전회담과 군사적 압력의 강화(1951년 7월 ∼ 1952년 2월)
미국은 군사적인 힘에 의한 명예로운 휴전을 획득하고자 노력했다. 원래 휴전 협상은 전투를 중지하고 진행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미국은 휴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전투를 중지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므로 어떠한 군사작전으로 회담을 뒷받침하느냐가 문제였다.
미국은 전선의 군사적 압력 강화로 '명예로운 휴전'을 모색하는 한편 군사력 증강과 지역 동맹체 제의 구축으로 전세계적 범위에서 대소 봉쇄의 기본 구도를 완성하였다.
2) 세균전 논쟁과 초토화 작전(1952년 2 ∼ 12월)
1951년 12월 중순 주유엔 소련대사 말리크가 미국이 독가스를 사용했다고 비난한 후 독가스 논쟁이 계속이던 1952년 2월 소련, 중국, 북한은 미군이 세균전을 하고 있다고 일제히 비난하고 나섰다. 이는 일본에서도 사실로 받아들여져 전후에는 『세균전 흑서』,『세균전』등 단행본이 출판되기까지 했다.
공산 측에 세균전 주장에 대해 미국은 전염병을 예방할 능력이 없는 공산 측이 세균전이라는 선전 공세를 벌여 그 책임을 미국에 전가시키려는 것이라고 강력하게 부인하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얼마 뒤인 1952년 5월 미국의 과학자 연맹이 "미국이 세균 병기를 개발해 왔고 그 계획을 위한 자금을 계속 늘려온 것이 사실이다."라고 폭로함으로써 미국 정부는 궁지에 몰렸다.
3) 원자탄 사용 위협과 댐폭격(1952년 12월 ∼ 1953년 7월)
1953년 1월 1일 출범한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택한 종전 정책은 원칙적으로 전과 같이 군사적 압력의 강화에 의한 명예로운 휴전의 성취였다. 그러나 트루만 행정부와는 달리 군사적 압력의 수단으로써 원자탄의 사용이 적극 고려되었고 중국에 대한 압력이 한층 강화되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원자탄을 단순한 위협으로서가 아니라 그 사용을 실질적으로 고려했다. 하지만 소련의 핵보복시 한국과 일본의 중요 도시도 쉽게 핵공격에 노출될 뿐만 아니라 원자탄 사용할 때 예상되는 동맹국과의 관계 악화와 유럽 우선주의 정책에 의해 끝내 원자탄은 사용되지 못했다.
기본적으로 장래가 불투명한 확전보다는 협상을 통한 종전을 선호한 아이젠하워와 덜레스의 종전 정책 그리고 1953년 봄 이후 공산 측의 적극적인 회담자세로 인하여 중국으로의 확전론은 휴전협정의 조인시까지 하나의 가능한 정책 대안으로써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부상병 포로가 교환된 후 협상이 다시 교착 상태에 빠진 5월 중순에 미군 폭격기들은 북한의 관계용 댐들을 폭격하였다. 이 폭격의 목적은 공산측의 교통망과 인명, 그리고 작물을 파괴함으로써 북한에 재개 불능할 정도의 타격을 입히고 전 국가적으로 불안을 증대시켜 협상의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것이었다.
6. 맺음말
미국의 개입 명분은 국제 공산주의의 팽창을 저지하고 자유세계를 수호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련은 실제로 전쟁의 발발에 거의 무관했고 전쟁에 직접 개입할 의사도 없었다. 미국은 안정적인 한반도 지배와 일본의 재무장화를 통해 아시아에서 대소 봉쇄 정책의 새로운 구도를 창출해 내는 한편 나토 강화와 지역동맹체제의 완성을 통하여 '팍스아메리카나'체제를 공고화하려는 의도와 1940년대 말 이후 총체적 위기 국면에 처해 있던 자국 경제의 재건을 위한 대규모적이고 장기적인 전쟁의 필요성에서 한국전쟁에 전면 개입하였던 것이다.
미국의 전쟁 전략과 전쟁 정책은 한국 민중의 이해, 요구와는 전혀 무관하게 이루어졌으며 이로 인해 삼천리 금수강산에서는 잿더미만이 남게 되었고 분단이 고착되었으며 한· 미 관계의 종속성이 심화되었다.
참고 서적
임재동, 최정미, 『한국 전쟁의 이해』중 "미국의 전쟁 전략과 전쟁 정책", 1990, 역사 비평사
유성하, 『한미 관계의 발자취』, 1991, 대동
결론
한국 전쟁에 대한 우리의 주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제 2차 대전 이후 미국에게는 한반도 내에서의 전쟁이 여러 원인에 의해 필요했다고 본다. 이를 위해 2번째 3번째 글에서 다루었다. 따라서 미국은 한반도 전쟁의 원인을 제공했고, 그 원인에 의해 일어난 전쟁은 미국에 바람직한 결과를 남기고 끝나게 된다. 이를 위해 과정과 결과는 4번째, 5번째의 글에서 다루고 있다. 이렇게 원인과 경과 결론을 다루며 우리는 나름대로의 논리를 전개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한국 내의 원인을 간과했다는 한계가 있음을 인정한다. 그 당시 남한과 북한에는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충분한 토대가 이루어 지고 있었다는 객관적 연구가 최근 수정주의의 새로운 흐름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쟁이후의 상황과 전쟁 이전의 여러 상황을 볼 때, 비록 전쟁을 처음 시작한 것도,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도 우리 민족이지만, 우리 민족의 전쟁에 대한 결정력에 의문을 갖게 된다.
즉 전쟁에 있어, 우리 민족의 행위가 큰 역할을 했음에는 분명하지만, 결국 그 행위의 결정에 있어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결국 주어진 판과 주어진 답안중 하나의 답을 고르는 제한된 행위자였다는 결론을 내렸다.
따라서 우리는 그 판을 만들고 그 판에 예상 답안을 제시하여, 자신들의 원하는 상황으로 이끌어 갔던, 적극적 행위자를 찾아 국제 정황에 눈을 맞추었고 그 결론은 위와 같은 한계를 남기게 되었다.
우리의 결론이 도출하기 위해 자료를 구하기가 힘들었음을 고백한다. 실제로 우리나라에는 전통주의에 대한 연구가 풍부함에도,수정주의에 대한 연구는 매우 빈약하다.
비록 그 자료가 빈약해도, 현재 세계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나라가 미국임을 감안해 주었음 한다는 양해를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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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27페이지
  • 등록일2002.09.21
  • 저작시기2002.09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03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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