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그프리드 헤르만의 이스라엘 역사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1. 사울 왕국

2. 다윗 제국

3.솔로몬 치하의 다윗제국

4. 제국의 분열과 남북의 후계자들

5. 이스라엘의 오므리 왕조

6. 두 혁명들-이스라엘의 예후와 예루살렘의 아달랴

7. 앗수르의 팽창 정치하의 이스라엘과 유다

본문내용

서 복수를 감행한다. 이에 격분한 예루살렘인들은 셀로이키덴의 왕 데메트리우스 III세에게 도움을 청하여 그의 군대는 세겜에서 알렉산더를 섬멸하였다. 그러나 데메트리우스가 철수한 뒤 그는 다시 복수를 감행한다. 알렉산더 얀나이는 주전 76년 49세의 나이로 죽는다.
5. 하스모네어 왕가의 실추는 알렉산더 얀나이에게서 최하점을 이루었다. 그의 후계는 살로메 알렉산드리아 여왕이었다. 그녀는 그녀의 권위를 안전하게 했으며 그 나라를 평정시켰다. 여왕은 그녀의 장자 히르칸(II)에게 최고 제사장직을 넘겼다. 그녀가 73세로 죽자 하스모네어 국가의 지배를 둘러싼 아들들의 싸움은 불가피하였다. 동시에 외부세력의 위험이 점증되었다. 남쪽에서는 나바테어인들이 새로이 공격해 왔다. 서부와 북부에서는 로마인들이 왔다. 폼페이우스와 함께 소아시아 지방을 궁극적으로 서쪽 강대국에 넘겨질 때가 왔던 것이다.
6. 살로메 알렉산드리아가 죽은 후 그의 아들인 최고 제사장 히르칸 II세에게 왕의 품위는 머물러 있었으나, 그의 정력적인 형제 아스토리불은 그를 예루살렘 포위 직후에 사두개인들의 도움으로 왕위를 포기하게 할 수 있었다. 히르칸은 도피처를 찾았다가 나바테어인들의 지원을 받으면서 예루살렘에 나타났다. 그러나 성문밖의 나바테어인들이 무언가 예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면서 히르칸과 아스토리불은 다메섹에서 폼페이우스로부터 위임받은 로마의 장군 스카우루스에게 지원을 요청하였다. 로마는 아스토리불의 돕기로 결정하여 나바테어인들을 철수시켰다. 그후로 아스토리불은 더 이상 1인체제를 굳히지 못하였다. 그는 로마에 의존하게 되었다. 폼페이우스는 직접 예루살렘을 향하여 진입하였다. 도시의 주민층은 그 도에 달한 위험에 직면하여 성문을 열어 놓았다. 그러나 성전지역은 강력한 반대의 힘을 가지고 저항하였다. 그러나 3개월 포위당한 끝에 성전도 로마인의 손에 함락되었다.
7. 그럼으로서 주전 63년에 예루살렘에서 로마 통치가 시작된다. 로마인들은 항복한 지역들을 재정비하고 동시에 행정 지역들도 만들었다. 유대는 남부 사마리아 지구들 영향 아래 예루살렘에 소속되었다. 사마리아는 시리아에 설치되었던 로마의 지방행정부에 직접 예속되었다. 이럼으로서 사실상 옛 셀로이키덴 국가동맹의 서쪽 부분을 종결지었던 전체적인 시리아 '팔레스틴'지역은 시리아 지방으로서 한 총독밑에 종속되었다.
고대 이스라엘-유대 국가영역에 침입한 로마의 등장과 시리아의 지방으로 편입됨에 따라 이스라엘 역사는 구약 시대의 한계의 극한점에 도달했다. 유대 관계들의 새로운 영향권 주위에 아리스토불과 그의 아들들의 싸움들은 때때로 로마 세력가들과 결탁한 최고 제사장과 싸움, 그리고 헤롯과 그의 후예들의 등장은 완전히 새로운 역사의 단면을 형성한다. 로마 통치는 가장 부담스러운 억압중에 하나였는데, 그런 억압에 이스라엘이 넘겨졌다. 로마는 서부의 군사력이었다. 그 세력은 동방에게 아무것도 줄 수가 없었다.
8. 예루살렘-유대의 공존적인 존재가 적어도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시대 이후에 중지되었던 부담들을 정치적인 힘과 정신적인 대결들의 교차에서 개별적으로 상상하기는 어렵다. 요르단 서부와 동쪽에 비교적 작은 영토에 외세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침해와 연속된 힘들은 백성 전체의 연이은 심적인 손실뿐 아니라, 저항 의지의 마비와 그의 정신적인 전제들의 마비를 초래하여야만 했다. 그럼에도 어떤 규모로 이런 저항 세력이 성장되었으며 모든 면에서 받은 위협 속에 공동존재에서 계속된 삶을 위한 전투가 인도되었는지 놀랄만하다. 이러한 가운데 문학적인 표현들은 새로운 형식들을 창안하였다.
9. 소위 묵시록적인 문학 형태에서 적어도 주전 2세기 중엽이후 하나의 새로운 이스라엘 정신의 형성이 나타난다. 그것은 유대 백성의 일각에서부터 새로운 세계 정치의 체험들의 표현으로 이해된다. 묵시록은 그의 커다란 가시적인 표상들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정신적으로 신학적으로 현재와 미래를 파악하려는 독특한 시도들에 속한다. 다니엘의 묵시록은 거의 절대적으로 커다란 세계사건을 숙고하고 있다. 다니엘 7장에 보면 상징적으로 네 짐승들의 형상이 혼돈의 바다에서 일어나서 네 개의 강대국가들을 구현시키는 것을 유도하고 있다. 여기에는 여러 특징을 가진 세계 강대국들을 겹쳐 놓은 도식이 가공되어 있다. 다니엘서의 네 짐승들은 네 개의 마지막 세계 강대국들을 암시한다. 다니엘 7장은 다만 짐승의 형상으로 알려진대로 그의 세계정치적-가시적인 상징으로써 묵시록적인 문학의 한 원형이 되었을 뿐 아니라, 동시에 천상적인 장면의 간략한 표현들로써, 장엄한 규모로 초월적인 세계를 묘사하는 세계는 후기 이스라엘의 영적인 것과 일치하고 있으며 결국에는 요한 계시록 1장에까지 계속 영향을 남기었다. ①'묵시록 기자들'의 기대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거룩한 아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그의 의지를 지상에 실행하실 것이며 지상의 나라들은 그들이 이룩한 결과를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②묵시록 기자들의 비판은 절대적으로 현재에 있었으며 그들의 희망은 전적으로 미래에 있었다. ③묵시록 기자들의 질문은 어떤 규모로 '하나님의 통치'가 세계역사와 그 자체로 보면 복잡 다난하게 분열된 이스라엘 자체의 운명에 있어서 표준적이며 혹은 새롭게 될 수 있는가 이다. 이런 통치의 주권자는 누구이며, 그의 선택된 증인들은 누군가, 그런 선발의 판단표준은, 그리고 하나님 통치의 침투에 특별히 수반되는 상태들에 관한 질문을 생ㄴ생하게 하는 것들이다. 이렇게 한 "종말적인 희곡"의 요소들의 형성되었다. 그런 희곡은 하나님을 원수시하는 세력들의 멸망에서부터 불경자들의 심판과 그 다음 메시야의 등장과 완전한 이상적인 구원시기에 이르기까지 포함하고 있다. 다니엘 7장에 나오는 인자(Menschensoh)의 상징적 형상은 독립적인 종말론적인 구원의 인물로 발전되었다. 그런 방법으로 "메시야"의 기능들은 강한 수축을 경험하여 왔다.
10.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는 유대종교와 기독교 사상의 이해를 위한 전제를 이룬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그의 역사의 과정에서 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했기 때문이다. 그 하나님은 유대인과 기독교에 공통적인 분이시다.

키워드

  • 가격2,300
  • 페이지수11페이지
  • 등록일2002.09.26
  • 저작시기2002.09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04364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