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경건과 윤리
2. 기독교가 꼭 대답해야 할 윤리 문제들
3. 성서 윤리
4. 기독교와 윤리사상
2. 기독교가 꼭 대답해야 할 윤리 문제들
3. 성서 윤리
4. 기독교와 윤리사상
본문내용
소들을 고려해야 한다고 한다. 율법주의자들은 이 네 가지 요소를 다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이 요소에 사랑이 결여되어 있다면 무용지물이다. "수단만이 아니라 목적도 또한 상대적이다"라는 말은 주의해볼 만하다. 수단들과 목적들은 선한 일을 성취하는 데 공헌했을 때에만 선하다. 세상엔 절대선이란 존재치 않지만 사랑이라는 최고선이 있음을 명시해야 한다.
수단을 존중하는 것
어떤 결정을 할지라도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 수단은 그 자체만으로 정당화되지 못한다. 기독교 상황 윤리학에서 말하는 자기 실현의 목적은 사랑에 둔다. 기타의 모든 목적과 수단들은 한없이 변하는 상황과 변화와 가치에 따라 정당화될 수 있다.
제8장 사랑은 구체적인 결단을 한다.
체계를 구함
많은 사람들은 마음 속으로 도덕에 대하여 완전히 잘 갖추어진 어떤 윤리체계가 있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다. 사람들은 율법의 보호 아래에서 탐닉하고 그 속에 움츠리고 있고 싶어한다. 율법에 대한 관심을 사랑에로 전향을 시킨다는 것은 괴롭고 또 그의 마음에 큰 위협을 준다. 자유에는 온갖 애매함이 따르지만 결단할 수 있다. 윤리생활을 모험이 수반된다.
회색의 영역
현대 사회의 급격한 양상들의 변화는 모든 윤리적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고, 전문화되고 기능화되어 가는 현대 사회 안에서 진위를 밝히기란 매우 어렵다. 흑과 백 사이에는 '회색의 영역'이 있는 것이 확실하다. 윤리적 완벽을 기한다거나 율법주의적 태도를 그대로 견지하고자 하는 사람은 현실을 직시할 능력을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데올로기의 끝
많은 사람들은 현실을 법칙에 부합시키려고 하지 법칙들을 현실에 부합시키고자 하지는 않는다. 정치학은 물론 윤리학에서도 이데올로기는 이제 종말을 고하고 있는 듯 하다. 교리화된 윤리이론체계는 이제는 실제의 문제와 정면적으로 맞서게 되었다. 상황에 따라 행위가 결정되기 위해서는 일단 모든 법칙들로부터 해방되어있는 자유로운 상태가 요구된다.
광신적 덕(狂信的 德)
광신적 덕은 악덕을 전부 합해놓은 것보다 더 타인과 사회에 악한 영향을 준다. 행위가 옳다는 것은 그속에 의(義)가 있다는 것이 아니다. 그 상황을 이루고 있는 모든 요소들에 견주어 보아 그 행위가 옳다 또는 그르다 판단하는 것이다. 모든 행동에 대한 윤리적 판단은 추상적인 선의 개념으로 할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산 인격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옳은 것이 옳게 되는 경우
율법이 아닌 사랑이 행동을 지배하게 될 때, 모든 양심의 결정은 상황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절대적' 사랑을 실현할 수 있는 '상대적'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자유에 대한 권리를 행사하려 한다면, 어떤 처해진 상황 속에서 그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이 먼저 갖춰져야 한다. 비록 율법이 사랑을 성취시키는 때가 간혹 있을지라도, 율법이 사랑을 부정하거나 파멸시키는 때가 있음을 명시해야 한다.
제9장 부기(附記): 왜?
신결의론(新決疑論)
상황주의는 현대의 실용주의와 상대주의에 의해 기독교 윤리가 새로운 모습으로 적출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의 내면적 생활과 외면적 실생활 사이에 놓여있는 갭(gap)을 접근시켜가고 있는 것이다. 신결의론은 과거의 결의론과 마찬가지로 사건중심적이고 구체적이며 기독교의 명령들을 실제의 문제에 부합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신결의론이 현저하게 다른 점은 그들이 처해있는 실존적 특수성에 관하여 관심을 둔 행동결정을 시도한다는 것이다.
십계명을 또 다시 만들자는 것은 아니다.
율법의 법조문보다는 그 율법의 정신이 중요하다. 율법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는 자연법과 성문화된 율법을 동시에 제정하신 분으로 인간이 닥치게 될 모든 상황을 이미 알고 계셨다고 주장하면서 공정을 자연법에 적용할 것을 거부한다. 우리의 비극은 우리의 상황을 우리 자신이 파악하거나 꿰뚫어 보지 못한다는 점이다.
율법 반감증(律法 反感症)
어떤 이들은 상황주의는 자유를 중요하게 취급하다거나 율법에 대한 반감증으로 가득차있다고 말한다. 이 '새로운 도덕'이라는 것이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듯이 새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 다만 이 새로운 도덕의 초점은 인간의 행동의 '결정'에 있다. 사실 사람 자체가 결단이다. 인간 실존은 결단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결단이다. 기독교 상황 윤리학자들이 의도하는 바는 어떤 것을 결정짓고자 마음 먹지 않으려고 한다. 그것은 어떤 공개된 사례 가운데서 하나를 택하는 행위가 아니다. 이를 선택하는 결단은 율법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다.
크리스찬 이유는 무엇인가?
윤리적 행동의 결정하는 데는 목적, 수단, 동기, 예견될 직접, 혹은 간접적 결과의 네 가지 요소가 고려된다. 크리스찬 사랑 윤리는 '코이노니아 윤리'이다. 이는 기독교인들의 사랑과 윤리적인 이해는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조성되어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 자체는 기독교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기독교의 사랑은 응답적인 사랑이면서 감사의 윤리이다. 이것은 규범적이 아니라 동기에서부터 비롯된 내용이다. 따라서 사랑의 개념에 준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파악하고자 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토대 위에 서서 사랑에 대한 이해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
크리스찬의 소명은 그의 이웃에게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제 10장 부록: 두 가지 다른 부패와 네 가지 케이스
경건주의
율법주의가 율법을 절대화한 나머지 우상화하였다고 하면, 경건주의는 경건을 개인적 요소로 생각한 나머지 완전히 주관적인 것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리하여 경제적인 일과 정치적인 일에는 전혀 관계가 없이 개인적이고 내면적이며 신비주의적인 일에만 종교가 관여하여야 하는 것처럼 만들었다. 이들은 거룩한 것을 이 세상과 연결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도덕주의
도덕주의는 도덕 생활을 보잘것없는 훈련의 과정으로 취급하여 기타 상황들을 정죄하고 있지만, 단 한 번도 사랑이나 공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적극적인 방법을 모색하려고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들이 제정한 청교도적 금기를 전부 지킴으로써 구원을 받게 된다는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수단을 존중하는 것
어떤 결정을 할지라도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 수단은 그 자체만으로 정당화되지 못한다. 기독교 상황 윤리학에서 말하는 자기 실현의 목적은 사랑에 둔다. 기타의 모든 목적과 수단들은 한없이 변하는 상황과 변화와 가치에 따라 정당화될 수 있다.
제8장 사랑은 구체적인 결단을 한다.
체계를 구함
많은 사람들은 마음 속으로 도덕에 대하여 완전히 잘 갖추어진 어떤 윤리체계가 있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다. 사람들은 율법의 보호 아래에서 탐닉하고 그 속에 움츠리고 있고 싶어한다. 율법에 대한 관심을 사랑에로 전향을 시킨다는 것은 괴롭고 또 그의 마음에 큰 위협을 준다. 자유에는 온갖 애매함이 따르지만 결단할 수 있다. 윤리생활을 모험이 수반된다.
회색의 영역
현대 사회의 급격한 양상들의 변화는 모든 윤리적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고, 전문화되고 기능화되어 가는 현대 사회 안에서 진위를 밝히기란 매우 어렵다. 흑과 백 사이에는 '회색의 영역'이 있는 것이 확실하다. 윤리적 완벽을 기한다거나 율법주의적 태도를 그대로 견지하고자 하는 사람은 현실을 직시할 능력을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데올로기의 끝
많은 사람들은 현실을 법칙에 부합시키려고 하지 법칙들을 현실에 부합시키고자 하지는 않는다. 정치학은 물론 윤리학에서도 이데올로기는 이제 종말을 고하고 있는 듯 하다. 교리화된 윤리이론체계는 이제는 실제의 문제와 정면적으로 맞서게 되었다. 상황에 따라 행위가 결정되기 위해서는 일단 모든 법칙들로부터 해방되어있는 자유로운 상태가 요구된다.
광신적 덕(狂信的 德)
광신적 덕은 악덕을 전부 합해놓은 것보다 더 타인과 사회에 악한 영향을 준다. 행위가 옳다는 것은 그속에 의(義)가 있다는 것이 아니다. 그 상황을 이루고 있는 모든 요소들에 견주어 보아 그 행위가 옳다 또는 그르다 판단하는 것이다. 모든 행동에 대한 윤리적 판단은 추상적인 선의 개념으로 할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산 인격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옳은 것이 옳게 되는 경우
율법이 아닌 사랑이 행동을 지배하게 될 때, 모든 양심의 결정은 상황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절대적' 사랑을 실현할 수 있는 '상대적'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자유에 대한 권리를 행사하려 한다면, 어떤 처해진 상황 속에서 그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이 먼저 갖춰져야 한다. 비록 율법이 사랑을 성취시키는 때가 간혹 있을지라도, 율법이 사랑을 부정하거나 파멸시키는 때가 있음을 명시해야 한다.
제9장 부기(附記): 왜?
신결의론(新決疑論)
상황주의는 현대의 실용주의와 상대주의에 의해 기독교 윤리가 새로운 모습으로 적출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의 내면적 생활과 외면적 실생활 사이에 놓여있는 갭(gap)을 접근시켜가고 있는 것이다. 신결의론은 과거의 결의론과 마찬가지로 사건중심적이고 구체적이며 기독교의 명령들을 실제의 문제에 부합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신결의론이 현저하게 다른 점은 그들이 처해있는 실존적 특수성에 관하여 관심을 둔 행동결정을 시도한다는 것이다.
십계명을 또 다시 만들자는 것은 아니다.
율법의 법조문보다는 그 율법의 정신이 중요하다. 율법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는 자연법과 성문화된 율법을 동시에 제정하신 분으로 인간이 닥치게 될 모든 상황을 이미 알고 계셨다고 주장하면서 공정을 자연법에 적용할 것을 거부한다. 우리의 비극은 우리의 상황을 우리 자신이 파악하거나 꿰뚫어 보지 못한다는 점이다.
율법 반감증(律法 反感症)
어떤 이들은 상황주의는 자유를 중요하게 취급하다거나 율법에 대한 반감증으로 가득차있다고 말한다. 이 '새로운 도덕'이라는 것이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듯이 새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 다만 이 새로운 도덕의 초점은 인간의 행동의 '결정'에 있다. 사실 사람 자체가 결단이다. 인간 실존은 결단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결단이다. 기독교 상황 윤리학자들이 의도하는 바는 어떤 것을 결정짓고자 마음 먹지 않으려고 한다. 그것은 어떤 공개된 사례 가운데서 하나를 택하는 행위가 아니다. 이를 선택하는 결단은 율법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다.
크리스찬 이유는 무엇인가?
윤리적 행동의 결정하는 데는 목적, 수단, 동기, 예견될 직접, 혹은 간접적 결과의 네 가지 요소가 고려된다. 크리스찬 사랑 윤리는 '코이노니아 윤리'이다. 이는 기독교인들의 사랑과 윤리적인 이해는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조성되어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 자체는 기독교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기독교의 사랑은 응답적인 사랑이면서 감사의 윤리이다. 이것은 규범적이 아니라 동기에서부터 비롯된 내용이다. 따라서 사랑의 개념에 준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파악하고자 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토대 위에 서서 사랑에 대한 이해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
크리스찬의 소명은 그의 이웃에게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제 10장 부록: 두 가지 다른 부패와 네 가지 케이스
경건주의
율법주의가 율법을 절대화한 나머지 우상화하였다고 하면, 경건주의는 경건을 개인적 요소로 생각한 나머지 완전히 주관적인 것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리하여 경제적인 일과 정치적인 일에는 전혀 관계가 없이 개인적이고 내면적이며 신비주의적인 일에만 종교가 관여하여야 하는 것처럼 만들었다. 이들은 거룩한 것을 이 세상과 연결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도덕주의
도덕주의는 도덕 생활을 보잘것없는 훈련의 과정으로 취급하여 기타 상황들을 정죄하고 있지만, 단 한 번도 사랑이나 공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적극적인 방법을 모색하려고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들이 제정한 청교도적 금기를 전부 지킴으로써 구원을 받게 된다는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