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서윤리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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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개인윤리: 그 명칭의 제한성과 부당성

2. 신약성서윤리 연구의 필요성

3. `신약성서윤리`의 의미

본문내용

무 것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것도 역시 불가능하다 를 덧붙였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64번은 좀 더 강한 어조로 참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이식된 사람이 감사의 열매를 맺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고 가르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 믿음이 칭의된 그 사람 안에 어떤 심리 상태로만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구원성취에 필요한 모든 다른 은혜들도 그 믿음의 열매로 동반한다. 이처럼 믿음은 죽은 것이 아니고 사랑으로 역사한다 (11장 2). ... 점차 그들의 실생활에 성결이 이루어진다. 이런 성결이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보지 못한다 (13장 1). 성화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무엇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나타나야할 과정이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기독 신자는 따라서 성경 구절들의 각기 내용에 준하여 명령에는 순종하고, 경고에는 두려워한다 (14장 2). 생명에 이르는 회개는 복음적 은혜이다. 그러므로 복음사역자들은 누구든지 그것을 그리스도 인앙의 교리와 마찬가지로 전파해야 한다 (15장 1; 회개가 단순히 신앙에 이르는 길로 제시되어 있지는 않다).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으로 이루어진 선행들은 생명있는 신앙의 열매요 또 한 증표이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작품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행하기 위하여 창조되었으므로 결국은 그들이 성결의 열매를 맺게 되고 영생을 얻는다 (16장 2).
이러한 내용이 한국에도 그대로 소개되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박형룡박사의 조직신학 제5권 구원론(1972)에서 몇구절을 인용해 본다. 진정한 신앙은 선행에서 그 자체를 나타낼 것이니 선행은 사람들 앞에 이같은 신앙을 소유한 자의 의 (생명의 의)에 대하여 증언할 것이다. 의인의 行에 의한 칭의는 신앙에 의한 칭의를 굳게 한다 (294). 야고보서를 이해하기 위하여 그는 이중 칭의론을 말했고 행위는 신앙이 항상 바른 종류의 것이었음을 보여 주어 그것을 완성하였다 (295: 로페스)나, 야고보는 칭의의 열매들에 의한 칭의의 증명에 관심을 두었다 (296: 칼빈)도 인용하고 있다. 바울은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에 향해 주목하였다. 신앙과 율법의 행위 사이에는 이원론이 있으나, 신앙과 행위 사이에는 그렇지 않다... 신앙과 행위의 관계를 정확히 형용하기 곤란하나 우리는 행위가 신앙에게 형상(form)을 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12).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인으로 있는(자라남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라는 루터의 말에 동의한다(346). 성화와 칭의는 분리할 수 없도록 연결되어 있어서(356) 둘은 다같이 근본적이다(371). 선행에 관한 항목에서 그는 비록 구원론적 이란 단어를 채용하지는 않았지만 행위(삶)의 구원론적 가치를 분명히 인정하고 있다: 산 신앙 곧 사랑으로 역사하며 마음을 깨끗케하는 신앙 만이 영혼을 그리스도에게 연합시키고 우리의 하나님과의 화목을 확보한다. 부도덕한 생활은 은혜의 상태와 조응하지 않는다. 고의적으로 죄의 행습을 계속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371). 선행은 칭의받은 신자의 그리스도와 연합한 생활에 성화의 과실로서 필연적으로 따라 오는 것이다(372).
여기저기서 인용한 많은 단편들은 문맥과 배경에 관하여 별도의 설명을 필요로 하는 서로 상이한 내용들이다.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믿음은 행위, 삶, 선행을 필수적인 요소로 요청, 동반한다. 칭의는 성화를 필연적으로 요청한다.
5. 구원론적 의미
행위에 주어진 분명한 구원론적 의미가 살아나지 못한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처음에 언급한 것들 외에 하나를 더 지적할 수 있다. 그것은 체계나 순서에 치중했던 나머지 마땅히 물어 보았어야 할 질문을 빠뜨렸고 모두가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한 것이다. 믿음/칭의 - 행위(삶)/성화라는 내림차순만 관찰하는데 그쳤고 이 순서를 거슬러 올라가며 되물어보지 않은 것이 실수였다. 우리는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거나 혹은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뱉을 수 없다 는 것만을 강조한 나머지 행위를 자동적인 것으로 기대하게 되었다. 반면에 성경에 아주 분명한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이 좋은 나무요 나쁜 열매를 맺는 것이 나쁜 나무다 나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 것이다 , 혹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좋은 나무는 없고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 나쁜 나무는 없다 는 교훈을 등한히하였기 때문에, 행위와 삶을 가지고 믿음과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구원을 점검, 확인, 증명할 수 없었다.
구원론적 의미를 찾는 것은 행위가 구원을 얻는 공로가 된다거나 구원을 가져온다는 의미는 아니다. 기독론이 없고, 그리스도를 향하는 믿음이 없는 행위는 기독교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에 기독론적인 믿음으로만 우리가 구원의 반열에 참가하게 된다는 것은 으례히 전제된다. 이 믿음은 하나님의 뜻에 맞는 행위, 바른 삶, 선행이란 열매를 필연적으로 만들어 낸다. 만들어 내어야 한다. 필수적인 것이 있을 때는 믿음이 확인되고 구원이 확신되지만, 그렇지 못할 때, 즉 필연적인 것이 보이지 않을 때는 믿음과 구원에 의문이 제기된다. 이렇게 행위란 믿음의 유무나 강약이나 진위를 분간하는, 더불어 칭의나 구원의 확실성을 보여주고 확인하는 실제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
6. 맺는 말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행위들이 보이지 않는다면, 부정적인 요소들로 여전히 우리의 삶이 채워지고 있다면,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다고 생각된다면 그리고 십자가로 뒤덮히고 있는 사회가 더 어두워져 가고 있다면 우리는 갈수록 사납게 날뛰는 사탄과 악의 무리들에게 그 원인을 모두 돌리고 계속 콧노래를 흥얼거릴 것이 아니라 이 현상들을 그것이 열매와 관계된 때문에 바르고 완전하며 또 안전하다 생각해 온 믿음과 구원과 신학과 교회 등등을 검토, 강화, 수리, 개혁해야만 한다는 적신호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6. 규범
1) 구약의 율법
2) 가장 큰 계명
3) 사랑의 계명
4) 황금률
5) 교회의 권한
7. 적용대상
8. 실천대상
9. 적용범위
10. 실천가능성
11. 결론: 기독교인의 책임

키워드

신약,   성서,   윤리
  • 가격2,300
  • 페이지수13페이지
  • 등록일2002.10.22
  • 저작시기2002.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078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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