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회사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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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벤츠

2.BMW

3.아우디

4.폭스바겐

5.포르쉐

6.볼보

7.사브

8.푸조

9.시트로엥

10.롤스로이스

11.포드

12.크라이슬러

13.르노

본문내용

높이의 낭떠러지에서 곤두박질치며 떨어진 에어플로는 부서진 곳 하나 없이 시동도 잘 걸렸고, 잘 다렸다.
세계의 어느 자동차 회사에서도 일찍이 이런 실험을 한 적이 없었다. 이 대담무쌍한 실험 소식은 매스컴을 타고, 혹은 입에서 입으로 전 미국에 퍼져 나갔고, 여기저기에서 주문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크라이슬러가 미처 생각지도 못한 점이 있었다. 밀려드는 주문에 맞춰 차를 만들어 낼 시설이 부족했던 것이다. 결국 제 날짜에 차를 만들어 내지 못했고, 게다가 차에 문제가 생겨서 출고 날짜가 늦어진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주문은 뚝 떨어졌고, 차를 산 사람들은 반환해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결국 엄청난 손해를 본 에어플로는 나온지 3년 만에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로부터 20년 뒤, 에어플로의 유선형 자동차 세계를 휩쓸 줄은 미처 몰랐다.
에어플로의 실패와 상관 없이 크라이슬러는 여전히 '기술 제일주의'를 바타으로 자동차 특허 75개를 따 내며 계속해서 차를 만들어 냈다. 1928년에는 닷지 사를 사들이고 플리머드와 데소토 자동차 회사를 만들어 여러 갈래의 회사를 거느리게 되었고, 플리머드는 시보레, 포드와 함께 미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차가 되었다.
1930년대에 이르자 제너럴 모터스가 미국 제일의 자동차 회사로 떠올랐다. 선두를 지키던 포드는 T형만 고집했기 때문에 차츰 밀려났고, 이 틈에 크라이슬러가 포드를 따라잡았다. 1937년이 되자, 제너럴 모터스가 미국 자동차 시장의42%를, 포드는 21%를, 그리고 크라이슬러는 25%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1950 ~ 60년대에 이르러 크라이슬러는 내리막길을 걸었다. 무리하게 해외로 뻗어 나갔고, 기름값을 절약해 주는 소형차 대신 대형차만 고집하다가 1970년대에 이르러 석유값이 크게 오르자 커다란 타격을 받았던 것이다. 크라이슬러는 외국에 있는 자회사들을 처분하고 공장을 줄이는 등 온갖 노력을 다했으나, 이미 기울어 가는 회사의 운명을 바로잡을 수는 없었다.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 크라이슬러는 빅3의 이름뿐인 세 번째를 차지하고 있었다.
크라이슬러를 살린 아이아코카
1978년, 크라이슬러가 1억 6천만 달러의 빚을 지고 파산하게 되었을 때, 리 아이아코카가 혜성처럼 나타났다. 경제 대통령이라는 별명처럼 아이아코카는 회사를 경영하는 데 비상한 재주가 있었다.
아이아코카는 32년 동안 포드 자동차 회사에서 일하면서 사장 자리에까지 오른 사람으로, 포드의 유명한 스포츠 카 머스탱, 소형차 피에스타를 만들어 자동차 업계에서 포드의 자리를 굳게 지켜 주었던 사람이다.
그러나 너무 똑똑해도 미움을 받는다는 옛말처럼 아이아코카는 하루 아침에 사장 자리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이유는 단 하나, 회장이었던 헨리 포드 2세의 눈에 거슬렸다는 것이었다.
실업자가 된 아이아코카에게 여기저기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쏟아져 들어왔다. 뉴욕대학교 경영 대학원장, 르노 자동차의 경영 고문, 항공사 사장 등.
그러나 아이아코카가 선택한 것은 다 쓰러져 가는 크라이슬러였다. 크라이슬러 자동차를 보란 듯이 일으켜 포드에게 복수하고 싶었던 까닭일까. 포드 사에서 연봉 36만 달러를 받던 아이아코카는 크라이슬러에서는 단돈 1달러를 요구했다. 혼신의 힘을 다해 크라이슬러를 일으켜 세우기로 결심한 아아아코카에게 돈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아이아코카는 우선 35명의 부사장 중 33명을 갈아치우고 폴크스바겐과 제너럴 모터스에서 뛰어난 기술자들을 스카우트해 왔다. 또 종업원을 줄이고 적자를 내는 공장은 팔았다.
아이아코카와 전 크라이슬러 직원들의 피땀어린 노력은 헛되지 않아, 3년이 지난 1981년부터 크라이슬러는 차츰 제 자리를 찾아 갔다.
그 무렵, 아이아코카가 3년 동안 수십억 달러를 투자해 개발한 야심작 K카가 나왔다. 앞바퀴 굴림의 소형차 K카는 나오자마자 크게 성공했다. 1갤런의 기름으로도 거뜬히 25Km를 갈 수 있는 K카야말로 미국 사람들이 오래도록 바라던, 미국인 손으로 만든 소형차였기 때문이다.
아이아코카는 K카를 한 대라도 더 많이 팔기 위해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5년 5만 마일 정책'을 폈다. '5년 5만 마일 정책' 이란 K카를 사 간지 5년이 되기 전이나, 5만 마일을 달릴 동안에는 크라이슬러에서 자동차 수리를 공짜로 해 준다는 것이었다. 또 만약 차를 뽑은 지 30일 안에 고장이 나면 새 차로 바꾸어 주겠다고 고객들에게 약속했다.
아담한 모습에 실용성과 파격적인 애프터 서비스때문에 K카는 그야말로 날개 돋친 듯이 팔렸고, 크라이슬러는 5년이 못 되어 불사조처럼 다시 일어설수 있었다.
크라이슬러의 차들
크라이슬러는 거대한 자동차 회사로, 그 안에는 계열사처럼 조그만 자동차 회사들이 있다. 그 중 크라이슬러 지프와 닷지, 이글이 유명하며, 스트라터스, 네온, 비젼, 뉴욕커, 보야거 등의 모델이 있다.
르노
프랑스의 국영 자동차회사.
국가 : 프랑스
업종 : 자동차 및 자동차부품
설립자 : L. 르노
설립일 : 1898년
본사 : 파리 교외 비양쿠르
총자산 : 465억 29백만 달러(1999)
매출액 : 400억 99백만 달러(1999)
1898년 L.르노(1877∼1944)가 파리 교외 비양쿠르에 설립한 자동차공장에서 비롯되었다. 1920년대 소형차 생산에 진출함으로써 프랑스 자동차산업에 있어서 유력기업의 하나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르노가 나치스에 협력한 죄로 1945년 자산이 국가에 의하여 몰수됨과 동시에 국유화되었다.
1947년 개발된 르노 4CV차를 비롯하여 1958년 도핀차 등 일련의 소형 승용차의 대량생산에 성공, 프랑스 최대의 자동차 기업이 되었다. 1955년 자회사인 사비엠을 설립하여 트럭 ·버스 등의 생산에도 진출하였고, 1966년 경쟁력 강화를 위하여 푀조와 업무제휴를 맺었다. 본사 및 공장은 비양쿠르에 있으며, 국내의 6개 공장 외에 벨기에 ·에스파냐 ·아르헨티나 ·브라질 등 10여 개 국에서 르노차(車)의 조립이 이루어지고 있다. 1999년 3월 일본의 닛산자동차를 인수하였으며, 2000년 9월 한국의 삼성자동차(주)를 인수하여 본격적인 아시아 시장 공략에 나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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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22페이지
  • 등록일2002.11.23
  • 저작시기2002.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12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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