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악(禮樂)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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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서론 : 전통음악의 근원적 뿌리인 예악

2.본론 : 1.중국의 예악(禮樂)
-공자의 예악
-도가의 예악
-예악의 붕괴
2.우리나라의 예악
-예악이 발생하게 된 배경
-조선시대의 예악
ㄱ.세종의 예악관
ㄴ.세종의 음악적 업적
ㄷ.영조의 아악중흥시책
-예악의 역할
3.예악의 발달에 뒷받침한 사람들
-다산 정약용의 <악론>
-박 연

3.결론 : 예악의 의의

본문내용

(聲)은 자연적인 개념임에 대해 음(音)은 인위적인 개념이며 악(樂)은 더욱 고차적인 윤리적 성격을 지닌 개념으로서 오직 군자만이 악의 본질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가질 수 있는 것이며, 음이 무엇인가를 이해할 수 있게 될 때에 예(禮)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는 곧 유덕자(有德者)로서의 인격 완성을 위한 예(禮)와 악(樂)의 효율성을 말하기도 하는데, 그러한 윤리적 음악관에 바탕을 둔 음악의 교육적 내지 실천적 효용성은 조선 말기의 다산 정약용의 <악론(樂論)>에서 볼 수 있다.
인간은 자연히 선(善)한 것이 아니라, 반드시 가르친 후에야 선하게 서는 것이다. 이는 7정 (情), 희(喜), 노(怒), 애(哀), 구(懼), 애(愛), 오(惡), 욕(慾)의 일곱 가지 감정이 마음 속에 얽혀서 고르지 못한 까닭이다. 그래서 성인(聖人)은 조석으로 금(琴), 슬(瑟), 종(鍾), 고(鼓), 경(磬), 관(管) 등의 음을 듣고 마음을 씻어 혈맥을 고동케 함으로써, 그 화평하고 화락한 뜻을 유발토록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순(舜) 임금이 나라를 세울 때 악(樂)이 완성됨에 따라 그 효과로써 모든 관원이 성실하게 화합하고 덕으로 겸양했으니, 인간은 반드시 음악으로써 가르치는 것이 알맞지 않은가. 성인의 도로 음악이 아니면 행하지 못하고, 음악이 아니면 성공하지 못하며, 천지 만물의 정(情)도 음악이 아니면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禮)와 악(樂)은 잠시라도 몸에서 떠나서는 아니 되며, 음악을 진작함으로써 인간을 교화할 수 있는 것이다.
2 박 연
세종을 도와 시종 궁중아악 정비 사업을 수행한 사람이 악리학자(樂理學者) 박연이었다. 박연의 자는 탄부(坦夫), 호는 난계(蘭溪)라 하여 고려 우왕 4년(1378) 충청도 영동(永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아버지(天錫)를 여의고 어머니를 극진한 효성으로 받들며 학문에도 힘써 글이 능란하고 예악(禮樂)에 밝았으며 특히 음률(音律)에 정통하였다. 앉으나 누우나 가슴에 손을 대고 박자를 짚고 휘파람을 불어 율려(律呂)소리를 냈다.[[註12] 그의 이웃에 적(笛, 대금)을 잘 부는 사람이 있어 글공부의 여가에 그에게서 적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얼마 안되어 그 고을에서 첫 손을 꼽는 적의 명수로 이름이 원근에 높았다. 그러나 그는 뒷날 서울에 올라와 장악원(掌樂院) 악사(樂師)에게 적을 들려 주고 평을 구했다가 크게 망신을 당하고 이에 발분해서 그 악사를 스승으로 삼아 적을 다시 배웠는데 금방 그 스승보다 더 잘 불었다고 하는 일화가 있다.[[註13]
집현전 교리, 사간원 정언을 역임했는데 세종이 등극하자 그 이름을 듣고 예우를 두터이 하며 경적(經籍)을 주어 장려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세종 7년 2월에 악학별좌(樂學別坐)로서 악서(樂書)를 내었고, 동(同) 8년에는 봉상시(奉常寺) 판관(判官)으로서 악장을 고쳤으며, 동 9년 5월에는 석경(石磬) 한 틀 12매를 새로 만들어 조회용(朝會用)으로 정했다.[[註14] 이로부터 박연은 음악에 관한 일을 전관(專管)하게 되었는데, 세종은 특히 악기의 제작을 그에게 맡기면 성음(聲音) · 절주(節奏)를 가히 얻을 수 있다고 믿고 두터이 신임하였다. 그리하여 세종은 그와 더불어 아악의 기틀을 확립하고 다음과 같은 말로 그의 공을 칭찬하였다. '그대 내가 아니었으면 음악을 짓지 못하였고 내 또한 그대가 아니었으면 음악을 짓기 어려웠을 것이다'[[註15] 박연이 탁월한 음악가로 연주, 이론, 행정에 고루 뛰어났던 것은 뒷날 세조가 악학도감(樂學都監) 제조(提調) 성임(成任)에게 '음악을 배우면 박연과 같이 될 이가 있을까'라고 물었을 때 '박연은 배워 따를 수 없으나 또한 얻음이 있을 것입니다'[[註16]라고 대답한 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세종과 예악을 정립하면서 함께 많은 일을 했는데, 그 일화로는 박연이 고심하고 애써서 새로 만든 경(磬)을 궁중에 들여와 그 소리를 세종대왕에게 직접 들려 드렸는데 조용히 귀 담아 듣고 있던 임금이 "중국의 편경은 조율이 정확치 않은데 박연은 참 잘 만들었다. 경돌을 얻은 일도 다행이려니와 이 돌로 만든 편경의 소리는 맑고 고우며 그뿐만 아니라 조율도 퍽 잘되었다. 그런데 이칙(夷則)의 경돌이 소리가 조금 높으니 어찌 된 일인가?" 하고 물었다. 박연이 놀라 경돌을 살펴보니 칫수대로 돌을 갈지 않아서 먹줄이 그대로 남아있는 부분이 있었다. 는 일화가 있다.
3. 끝마치면서..
예악에 대해 아는 것이 그다지 없어서였는지, 자료를 찾기 꽤 힘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악은 충분히 흥미가 생길 만한 자료였다. 중국 시대에 인성을 바로잡기 위해 공자가 만든 예악이라는 개념이, 우리 나라로 들어오면서 비슷하지만, 약간은 다른, 고려시대와는 다른 조선시대를 만들기 위한 의도에서도 있고, 또한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려는 의도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 예악이 세종대왕에 의해서 보급된 것 또한 흥미있는 부분이었다.
단순한 음악이 가지고 있는 개념과는 달리, 예악은 정치적인 목적에 의해 보급된 음악이다. 음악은 대중이 사랑하고, 자연스레 퍼지는 것과는 달리 예악은 정치 고위층 (성균관, 세종대왕 등) 에 의해 미리 퍼지고, 그리고 백성들에게 약간은 반 강제적이다 싶을 정도로 보급된 것에서도 음악과 예악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예악이 퍼져나감으로써 백성들의 심성을 순화시키고, 또한 통치를 좀더 수월히 할 수 있다는 점을 통치자들이 노린 것이었겠지만, 내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예악을 보급한 것은 실패작에 가까웠다고 본다.
왜냐하면 예악이 많은 계층 사이에 퍼뜨려졌지만, 백성들 사이에서 알게 모르게 퍼져나갔던 사설시조나, 가사 등에 따르지 못했던 이유는 의도적인 목적에서 이루어진 음악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예악이 올바로 자리잡기 못했기 때문에, 주로 궁중음악 (제례악 등) 으로만 그 자취를 찾을 수 있는 것이며 민중 사이에서는 그다지 호응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음악이 약간은 고급스러운 귀족층에서 향유할 수 있는 분위기였던 것도 그 이유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의도를 가진 음악이 민중에게서 퍼지기가 힘든 것이 더욱 큰 이유라고 본다.

키워드

예악,   정약용,   악론,   박연,   세종
  • 가격1,300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02.12.01
  • 저작시기2002.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13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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