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올로기
본 자료는 7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해당 자료는 7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7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1. 백인 `영웅본색` 인디 존스
2. 스펙타클의 탈정치화, <간디>
3. <마지막 황제>, 헐리우드의 자금성

[영화로 본 여성, 페미니즘 ]
1. 남성 지배-여성 복종의 이데올로기
2. 관객 심리와 정신 분석학
3. 페미니즘
4. <피아노>와 <올란도> : 여성성과 양성성 사이
5. 그녀들의 역사는 그녀들이 만든다

[`신`에 관한 짧은 필름 ]
1. `신`은 없다
2. `신`은 있다
3.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신`에 관한 언급
4. 내가 `신`을 생각할 때
5. 마지막
⊙참고문헌

본문내용

보실 뿐이다. 자유의지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하자면 원래는 하느님 뜻대로 인간이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는 길은 자유의지를 획득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자유의지의 첫 시험경기에서 부진한 성적을 보였기 때문에 우리 인간이 진정한 자유를 느끼려면 그 날 이후로 자유 의지를 자신의 마음속에서 파괴해야만 한다. 너무 섬뜩하지 않은가? 네 번째 문제는 하느님과 인간의 최초의 약속이 공정했느냐를 따진다. 그리고 심지어는 최초의 불평등 약속이라고까지 말한다. 맞다! 공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우주적인 법칙과 철학적 인식들을 백과사전처럼 명백히 저리할 수 없다면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서 공정함을 찾는 일은 핫도그 장사가 핫도그의 반란에 장사를 더이상 할 수 없는 그런 경우이다. 구체적으로 핫도그의 반란은 핫도그가 자신을 만드는 주인에게 말을 하는 것이다. 왜 뜨거운 기름에 자신을 담가두느냐고.. 다섯 번째 문제는 최초의 인간이 지은 죄로 인류 전체가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에 관한 것이다. 만약에 지금까지 창조론의 역설에서 주장한 이야기들이 맞는 얘기라면 이 문제에 관해서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모르겠다. "희생"이라는 말을 꺼내 볼까..종교적 인간으로서 타르코프스키가 흥미를 느끼는 것은 그 원천이 자신을 구하기 위함이건 정신적 원칙 때문이건 간에,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물론 나 역시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종교적인 사람들을 꼭 종교적이지 않은 사람이라도 그 목적이 참된 선이라면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이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을 인류 모두의 "희생"을 통해 해결하라고 기다리시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인류가 겪는 고통은 너무나도 크다. 분명히 죽은 후에는 지구에서의 삶보다 아주 많은 시간을 평온하게 살 수 있는 천국이 있는 것처럼 인류의 고통은 셀 수조차 없다. 여섯째 문제는 하느님의 인간 구출 작전의 과정에서 생기고 있는 죄악에 관한 것을 언급하고 있다. 위에서 말했듯이 진짜 우리 인간에게 "희생"을 요구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는 하느님에게 부끄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하느님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었지 않았는가? 그 마지막 문제가 우리에게 주신 자유의지에 관한 것이다. 왜 자유의지를 주어서 이리저리 진리의 주변에서 삶의 가장자리에서 고통을 받아야 하는 건지...어찌 하느님의 깊으신 뜻을 알 수가 있겠습니까..자유의지를 마음속에서 파괴하는 것도 하느님께 가는 한 가지 방법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위에서 언급한 문제들 모두 현대 사회에서 해결을 이끌어 낼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끈임 없이 우리는 정진하고 사유하고 싸워야 한다. 무지한 인간이 될 것인가? 사탄의 자유 속에서 허무주의를 찬양할 것인가? 물론 나도 허무주의의 공간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가끔 영원히 허무주의의 공간에 빠져 있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매력적이지 못한 불안감과 두려움을 느끼곤 한다.하지만 허무주의가 우리를 만족시키어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마 우리 인간은 죽을 때 조차 만족을 느끼어 보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세상이 있다면 그곳은 어떤 곳일까? 어떤 이들은 그런 곳이 있다면 그것은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과 흡사할 것이라 말한다. 즉 전쟁과 전쟁의 위협, 범죄와 정치인들의 부패, 무작위 적인 잔인함으로 갇혀진 세상. 그런데 진정 하느님이 예시지 않는 세계는 이보다 더할 것이다. 그런 세계는 아무도 범죄나 잔인함 앞에서 분노하지 않고, 그런 행위를 종결하려는 마음조차 들지 않는 곳일 것이다. 물론 이러한 현상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철학자나 사회학자의 의견이 있기는 하지만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은 아직도 세상을 바꾸려는 열정으로 가슴속의 찌꺼기들이 꿈틀거리지 않는가? 또한 하느님이 없는 세계는 인간 각각의 삶의 유익을 챙기는 것 외에는 목표가 없을 것이고, 무미건조하고 단색 적인 세상일 것이다.그렇다면 외로워지지 않을까? 물론 하느님이 계시는 지금도 외로움은 우리 인간에게 오고 있지만 지금 것과는 다른 원초적이고 본질적인 외로움 말이다. 생각만 해도 채워진 모든 것들이 빠져나가는 기분이다.
5. 마지막
인생에는 마지막이 있다. 그 마지막은 훌륭한 완성을 위해 하느님과 만나야 한다. 말하는 것이 가끔 두려울 때가 있다. 말하는 목소리가 내 목소리 같지 않아서 부끄러워지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무엇이 진정한 진실인지 구별할 능력이 나에게는 없다. 혹시 있다고 생각되어져도 그건 사탄의 유혹일 뿐인지 모른다. 하느님은 믿지만, 종교에 관해서는 자유주의적인 입장을 취하고 싶다. "하느님! 지구의 한 나라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고 있습니다. 사후의 찬란한 천국이라도 준비되어져 있는 것입니까?" 하느님의 깊으신 뜻을 헤아릴 수 없지만 내 자유의지가 가만있지 않는다. 진정 하느님을 믿는 것은 이런 것은 아닌데 나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하니...이렇게 믿으면서도 호기심이 작동하는 것은 정작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소식들은 전달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말하는 묵시록 적인 정적의 전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희망은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대답은 타르코프스키가 적절하게 설명한 듯하다. 그 대답은 메말라 시들어 버린 나무에 참을성 있고 짜증내지 않으며 물을 준다는 오래된 전설이다. 모든 이성에 반(反)하여 수년간 산으로 물통을 날랐던 수도승은 현혹되지 않고 확실하고 구체적으로 신의 존재와 기적을 믿었기 때문에, 어느 날 그에게 그 같은 기적이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이다.앙상하게 메말랐던 가지들이 하룻밤 사이에 푸른 잎사귀로 뒤덮여 버린 것이다.
⊙참고문헌
성경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봉인된 시간", 본도출판사, 1991, 김창우 역
김진, "철학의 현실문제들", 철학과 현실사, 1997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순교일기", 두레, 1997,김창우 역
강영계, "강영계 교수의 철학이야기", 가서원, 1998
해롤드 쿠시너, "현대인에게도 하나님이 필요한가?", 홑성사, 1997
윌리엄 바클레이, "그리스도인의 365일", 종로서적, 1990
  • 가격2,300
  • 페이지수20페이지
  • 등록일2002.12.08
  • 저작시기2002.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14775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