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서 론
1.연구목적
2.문제제기
3.연구방법
Ⅱ. 본 론
1. 처용가의 배경
2. 처용가의 노래말의 내용과 의미 검토
3. 처용가의 변전과 문학사적 해석
Ⅲ. 결 론
참고문헌
1.연구목적
2.문제제기
3.연구방법
Ⅱ. 본 론
1. 처용가의 배경
2. 처용가의 노래말의 내용과 의미 검토
3. 처용가의 변전과 문학사적 해석
Ⅲ. 결 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분노와 질책으로 보는 견해(이기문, 정렬모, 최철)
③ 신에 대한 청원으로 보는 견해(민긍기)
민긍기 교수의 견해도 처용의 화상이 문신으로 쓰이게 된 역신의 맹세를 공수로
보고, 그 공수를 불러일으킨 인간의 축원으로 역시 신적 권능이 부여되는 계기가
노래를 통해 확인된다는 측면에서 일정한 타당성을 지닌다.
다. 고려 처용가의 주술적 성격
고려 처용가는 독립된 노래로서 연행된 것이 아니라, 춤을 위한 반주적 성격이
짙다. 신라의 처용가도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唱歌作舞)'고 되어 있지만 노래
가 주가되어 그때의 춤은 어느 정도의 격식인지 그 실체를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과는 다르게 「고려사」「조선왕조실록」의 사서 기록을 보면 주로 춤에 쏠리
고 놀이에 나누어져 있어 노래가 춤을 위해 복속하는 양상을 보인다.
즉, 신라의 처용가가 순수하게 주술적 성격의 노래로서 본령을 유지했다면, 고려
처용가에 이르러서는 이에 더하여 연행적, 송도적 성격을 더 얹게 되었다.
또한 신라의 처용가보다 훨씬 주술성이 강화되었는데 그것은 신라는 설화적 문법
만으로도 신적 능력을 발휘하려 주술적 기능을 담당할 수 있었지만 고려 때는 신적
인 힘과 정치적인 힘이 상당 부문 나뉘어졌으며, 따라서 신적 권능은 보다 분명하
게 강조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노래로서의 처용가는 민간의 주술적 권능을 지닌 무당 처용에서 발원되었고, 이것이
신라를 거쳐 고려로 이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다시 궁중으로 수용되어 연희
적, 송도적 성격을 수반하며 대범한 굴절과 변이를 보이고 있지만, 여전히 그 주술
적 성격을 강화하면서 조선조까지 계승되었다.
2) 고려 처용가의 문학사적 해석
고려 처용가는 문학의 갈래상 측면에서 보면 서사적인 노래며, 발생의 원유와 기
능적인 측면에서 보면 신라 향가를 이으면서도 발전적으로 변전된 주술적 굿노래
가 되고, 연행의 측면에서 보면 궁중의 종합적인 가무회에 쓰인 노래로서 연희의 간
접 대본 구실을 하기도 한다.
가. 서사적 구조를 통해 본 처용의 정체
처용가의 전개의 중심축은 신적 존재인 처용과 인간의 합일에 있다. 노래 속 처
용은 인간세계의 혼란스러운 질서를 주재하는 초월자인 바, 구체적으로는 열병신을
퇴치하는 강한 무당인 것이다. 상대적으로 열병신은 단순한 질병의 차원 뿐 아니라
온갖 재액을 다 상징하는 존재로 보아야 하고, 이에 따라 처용의 신적 권능 또한
무한히 그 영역을 확대하여 볼 수 있다. 그러나 처용과 열병신의 둘 사이의 투쟁
결과에 따라 인간의 삶이 결정되는 인간의 나약함을 드러내주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대립, 갈등의 구도를 직접 문면에 드러내는 독특한 구조를 취하고
있는데 서사적 구조로 보는 시로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처용가는 연구분이 되
어 있지 않은데,
다섯 단락으로 나누어 보는 것이 문학적 분단으로 타당하다.
·첫째단락 : 축복·기원의 뜻
·둘째단락 : 처용의 용모와 복색에 대한 찬양
·셋째단락 : 처용의 위엄과 능력을 찬양
·넷째단락 : 열병신과의 투쟁
·다섯째단락 : 처용의 위력
처용가의 주제는 " 邪進慶"이 되고, 섣달 그믐 전날 궁중에서 儺禮에서 이 노래
가 驅儺의식에 쓰였다는 기록과 맞아떨어진다. 그러므로 처용의 정체는 신격화된 무당
이 된다.
) 박을수, 한국고시가 문학사, 아세아문화사, 1997
처용가는 고려시가의 하나로 樂章歌詞, 樂學軌範에 전하나, 신라 憲康王 때의
처용가에 대한 설화에 기원을 둔 굿 노래로 미분형 45행의 장편이다. 이 작품에 대
해 '高麗史' '樂志'에서는 신라 때 생긴 것이라고 밝혔으면서도, 삼국속악에 넣지 않
고, '高麗俗謠'라 한 것은 아마도 오래 전승되는 동안에 원래의 모습과 많이 달라졌
기 때문인 듯하다.
Ⅲ. 결 론
「삼국유사」'처용량 망해사'조에는 신라 처용가의 노래말과 함께 이 노래가 만
들어진 사연, 그리고 처용의 정체가 서술되었는데 이 기록으로 보아 처용의 행위는
무속신앙의 무격과 같은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로 볼 수 있다. 즉, 신라 헌강왕 때
에 처용굿은 나라의 불안한 조짐을 없애는 제액의 일을 담당했던 것이며 신라 처용
가는 고려시기에 와서 춤과 노래와 놀이로 다양하게 연행되면서 노래말도 더욱 길
어지고 표현도 훨씬 다듬어진 형태로 발전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 작품은 '삼국유사'의 처용설화에서 나온 내용, 즉 처용의 화상을 그려 역신을
피하던 습속이 고려대에 와서는 민간사회에서 주로 연행되다가 궁중에 유입되고,
궁중의 驅儺의 의식과 결부되어 처용무, 처용희로 발전되었으며, 조선조에 들어와
서는 12월 제야에 궁중에서 '驅儺義'를 행한 뒤 '학연화대처용무합설(鶴蓮花臺處容
舞合設)' 거행되는 나례의 한 절차로 제도화하여 정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필자는 처용가의 배경, 노래말의 내용과 의미, 변전
과 문학사적 해석을 통하여 오늘날에 처용가의 모습을 그 당시의 모습과 어떠한
차이점이 있는지 고찰해 보고자 하였다. 한편 문헌에 나타나는 처용무와 처용가는
서로 다른 것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 처용무는 두 번 추는데, 전도에선 16명의 여기가 처용가를 부르며 차례로 들어와 선 뒤 처용 만기(慢機) 음악에 맞추어 처용무를 추고, 후도에선 처용 만기의 연주와 처용가의 가창에 맞추어 처용무를 춘다. '국역 악학궤범'(Ⅱ), 민족문화추진회, 1985, p.31,34,41 참조
처용가와 처용무는 양식적 원리가 서로 다른
만큼 독립적이면서도 유기적이고, 상호의존적이며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지닌다.
) 박진태, 한국고전 가용의 구조와 구사, 형설출판사, 1998
따라서 처용가와 처용무를 분리시키지 않고, 처용가무 내지 처용가무극으로 통
합시켜 보는 관점을 취하는 것이 사실상 본질을 파악하는데 보다 바람직한 방법이
다.
《참고 문헌》
윤성현, 『고려 처용가 연구1』『한국고전시가작품론I』
최 철, 『고려국어가요의 해석』연세대학교 출판부
박병채, 『고려가요의 어석연구』국학자료원
양주동, 『麗謠箋注』을지문화사
김종오, 『고려가요감상』민족문화추진회
최정여, 『한국고시가연구』啓明大學校 출판부
김학성, 고전문학의 이해, 우리문학사, 1993
③ 신에 대한 청원으로 보는 견해(민긍기)
민긍기 교수의 견해도 처용의 화상이 문신으로 쓰이게 된 역신의 맹세를 공수로
보고, 그 공수를 불러일으킨 인간의 축원으로 역시 신적 권능이 부여되는 계기가
노래를 통해 확인된다는 측면에서 일정한 타당성을 지닌다.
다. 고려 처용가의 주술적 성격
고려 처용가는 독립된 노래로서 연행된 것이 아니라, 춤을 위한 반주적 성격이
짙다. 신라의 처용가도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唱歌作舞)'고 되어 있지만 노래
가 주가되어 그때의 춤은 어느 정도의 격식인지 그 실체를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과는 다르게 「고려사」「조선왕조실록」의 사서 기록을 보면 주로 춤에 쏠리
고 놀이에 나누어져 있어 노래가 춤을 위해 복속하는 양상을 보인다.
즉, 신라의 처용가가 순수하게 주술적 성격의 노래로서 본령을 유지했다면, 고려
처용가에 이르러서는 이에 더하여 연행적, 송도적 성격을 더 얹게 되었다.
또한 신라의 처용가보다 훨씬 주술성이 강화되었는데 그것은 신라는 설화적 문법
만으로도 신적 능력을 발휘하려 주술적 기능을 담당할 수 있었지만 고려 때는 신적
인 힘과 정치적인 힘이 상당 부문 나뉘어졌으며, 따라서 신적 권능은 보다 분명하
게 강조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노래로서의 처용가는 민간의 주술적 권능을 지닌 무당 처용에서 발원되었고, 이것이
신라를 거쳐 고려로 이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다시 궁중으로 수용되어 연희
적, 송도적 성격을 수반하며 대범한 굴절과 변이를 보이고 있지만, 여전히 그 주술
적 성격을 강화하면서 조선조까지 계승되었다.
2) 고려 처용가의 문학사적 해석
고려 처용가는 문학의 갈래상 측면에서 보면 서사적인 노래며, 발생의 원유와 기
능적인 측면에서 보면 신라 향가를 이으면서도 발전적으로 변전된 주술적 굿노래
가 되고, 연행의 측면에서 보면 궁중의 종합적인 가무회에 쓰인 노래로서 연희의 간
접 대본 구실을 하기도 한다.
가. 서사적 구조를 통해 본 처용의 정체
처용가의 전개의 중심축은 신적 존재인 처용과 인간의 합일에 있다. 노래 속 처
용은 인간세계의 혼란스러운 질서를 주재하는 초월자인 바, 구체적으로는 열병신을
퇴치하는 강한 무당인 것이다. 상대적으로 열병신은 단순한 질병의 차원 뿐 아니라
온갖 재액을 다 상징하는 존재로 보아야 하고, 이에 따라 처용의 신적 권능 또한
무한히 그 영역을 확대하여 볼 수 있다. 그러나 처용과 열병신의 둘 사이의 투쟁
결과에 따라 인간의 삶이 결정되는 인간의 나약함을 드러내주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대립, 갈등의 구도를 직접 문면에 드러내는 독특한 구조를 취하고
있는데 서사적 구조로 보는 시로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처용가는 연구분이 되
어 있지 않은데,
다섯 단락으로 나누어 보는 것이 문학적 분단으로 타당하다.
·첫째단락 : 축복·기원의 뜻
·둘째단락 : 처용의 용모와 복색에 대한 찬양
·셋째단락 : 처용의 위엄과 능력을 찬양
·넷째단락 : 열병신과의 투쟁
·다섯째단락 : 처용의 위력
처용가의 주제는 " 邪進慶"이 되고, 섣달 그믐 전날 궁중에서 儺禮에서 이 노래
가 驅儺의식에 쓰였다는 기록과 맞아떨어진다. 그러므로 처용의 정체는 신격화된 무당
이 된다.
) 박을수, 한국고시가 문학사, 아세아문화사, 1997
처용가는 고려시가의 하나로 樂章歌詞, 樂學軌範에 전하나, 신라 憲康王 때의
처용가에 대한 설화에 기원을 둔 굿 노래로 미분형 45행의 장편이다. 이 작품에 대
해 '高麗史' '樂志'에서는 신라 때 생긴 것이라고 밝혔으면서도, 삼국속악에 넣지 않
고, '高麗俗謠'라 한 것은 아마도 오래 전승되는 동안에 원래의 모습과 많이 달라졌
기 때문인 듯하다.
Ⅲ. 결 론
「삼국유사」'처용량 망해사'조에는 신라 처용가의 노래말과 함께 이 노래가 만
들어진 사연, 그리고 처용의 정체가 서술되었는데 이 기록으로 보아 처용의 행위는
무속신앙의 무격과 같은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로 볼 수 있다. 즉, 신라 헌강왕 때
에 처용굿은 나라의 불안한 조짐을 없애는 제액의 일을 담당했던 것이며 신라 처용
가는 고려시기에 와서 춤과 노래와 놀이로 다양하게 연행되면서 노래말도 더욱 길
어지고 표현도 훨씬 다듬어진 형태로 발전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 작품은 '삼국유사'의 처용설화에서 나온 내용, 즉 처용의 화상을 그려 역신을
피하던 습속이 고려대에 와서는 민간사회에서 주로 연행되다가 궁중에 유입되고,
궁중의 驅儺의 의식과 결부되어 처용무, 처용희로 발전되었으며, 조선조에 들어와
서는 12월 제야에 궁중에서 '驅儺義'를 행한 뒤 '학연화대처용무합설(鶴蓮花臺處容
舞合設)' 거행되는 나례의 한 절차로 제도화하여 정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필자는 처용가의 배경, 노래말의 내용과 의미, 변전
과 문학사적 해석을 통하여 오늘날에 처용가의 모습을 그 당시의 모습과 어떠한
차이점이 있는지 고찰해 보고자 하였다. 한편 문헌에 나타나는 처용무와 처용가는
서로 다른 것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 처용무는 두 번 추는데, 전도에선 16명의 여기가 처용가를 부르며 차례로 들어와 선 뒤 처용 만기(慢機) 음악에 맞추어 처용무를 추고, 후도에선 처용 만기의 연주와 처용가의 가창에 맞추어 처용무를 춘다. '국역 악학궤범'(Ⅱ), 민족문화추진회, 1985, p.31,34,41 참조
처용가와 처용무는 양식적 원리가 서로 다른
만큼 독립적이면서도 유기적이고, 상호의존적이며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지닌다.
) 박진태, 한국고전 가용의 구조와 구사, 형설출판사, 1998
따라서 처용가와 처용무를 분리시키지 않고, 처용가무 내지 처용가무극으로 통
합시켜 보는 관점을 취하는 것이 사실상 본질을 파악하는데 보다 바람직한 방법이
다.
《참고 문헌》
윤성현, 『고려 처용가 연구1』『한국고전시가작품론I』
최 철, 『고려국어가요의 해석』연세대학교 출판부
박병채, 『고려가요의 어석연구』국학자료원
양주동, 『麗謠箋注』을지문화사
김종오, 『고려가요감상』민족문화추진회
최정여, 『한국고시가연구』啓明大學校 출판부
김학성, 고전문학의 이해, 우리문학사,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