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시어, 시구 풀이]
[전문 풀이]
[핵심 정리]
▶ 학습 자료
▶ 작품 해설
<참고> 도산십이곡 발
[전문 풀이]
[핵심 정리]
▶ 학습 자료
▶ 작품 해설
<참고> 도산십이곡 발
본문내용
6곡과, 학문과 수련의 실제를 시화(詩化)한 언학(言學) 후 6곡 등 12수로 된 연시조이다.
인간 속세를 떠나 자연에 흠뻑 취해 사는 자연 귀의 생활과 후진 양성을 위한 강학(講學)과 사색에 침잠(沈潛)하는 학문 생활을 솔직 담백하게 표현해 놓았다.
이 작품의 끝에 붙인 발문(跋文)에 지은이 자신이 이 노래를 짓게 된 연유와 우리 나라 가요를 평하는 말 가운데, 그의 문학관이 잘 나타나 있다.
우리 가곡이 무릇 음란한 노래가 많아서 이야기할 만한 것이 못 되며 이별(李鼈)이 '육가(六歌)'를 본떠 이 노래를 짓는다고 밝히고 있고, 또한 이를 아이들로 하여금 익혀 부르게 하여 나쁜 마음을 씻어 버리고 서로 마음이 통하게 하고자 한다는, 퇴계의 문학관을 밝히고 있다.
'도산육곡(陶山六曲)', '도산전후육곡(陶山前後六曲)'이라고도 부른다.
<참고> 도산십이곡 발(陶山十二曲跋)
이 '도산십이곡'은 도산 노인(陶山老人)이 지은 것이다. 노인이 이 시조를 지은 까닭은 무엇 때문인가. 우리 동방의 가곡은 대체로 음와(淫 )하여 족히 말할 수 없게 되었다. 저 '한림별곡' 과 같은 류는 문인의 구기(口氣)에서 나왔지만 긍호(矜豪)와 방탕에다 설만(褻慢)과 희압(戱狎)을 겸하여 더욱이 군자로서 숭상할 바 못 되고, 다만 근세에 이별(李鼈)이 지은 '육가(六歌)'란 것이 있어서 세상에 많이들 전한다. 오히려 저것[육가]이 이것[한림별곡]보다 나을 듯하나, 역시 그 중에는 완세 불공(玩世不恭)의 뜻이 있고 온유 돈후(溫柔敦厚)의 실(實)이 적은 것이 애석한 일이다.
노인이 본디 음률을 잘 모르기는 하나, 오히려 세속적인 음악을 듣기에는 싫어하였으므로, 한가한 곳에서 병을 수양하는 나머지에 무릇 느낀 바 있으면 문득 시로써 표현을 하였다. 그러나 오늘의 시는 옛날의 시와는 달라서 읊을 수 있겠으나, 노래하기에는 어렵게 되었다. 이제 만일에 노래를 부른다면 반드시 이속(俚俗)의 말로써 지어야 할 것이니, 이는 대체로 우리 국속(國俗)의 음절이 그렇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내가 일찍이 이별의 노래를 대략 모방하여 '도산 육곡'을 지은 것이 둘이니, 기 일(其一)에는 '지(志)'를 말하였고, 기 이(其二)에는 '학(學)'을 말하였다. 아이들로 하여금 조석(朝夕)으로 이를 연습하여 노래를 부르게 하고는 궤( )를 비겨 듣기도 하려니와, 또한 아이들로 하여금 스스로 노래를 부르는 한편 스스로 무도(舞蹈)를 한다면 거의 비린(鄙吝)을 씻고 감발(感發)하고 융통(融通)할 바 있어서, 가자(歌者)와 청자(聽者)가 서로 자익(資益)이 없지 않을 것이다.
돌이켜 생각컨대, 나의 종적이 약간 이 세속과 맞지 않는 점이 있으므로 만일 이러한 한사(閑事)로 인하여 요단(鬧端)을 일으킬는지도 알 수 없거니와, 또 이것이 능히 강조(腔調)와 음절에 알맞을는지도 모르겠다. 아직 일 건(一件)을 써서 서협(書 ) 속에 간직하였다가, 때때로 내어 완상(琓賞)하여 스스로 반성하고, 또 다른 날 이를 읽는 자의 거취(去取)의 여하(如何)를 기다리기로 한다.
가정(嘉靖) 44년(1565) 을축년 3월 16일 도산 노인은 쓴다.
(해설)
이 글은 지은이 자신이 문학 작품에 대한 스스로의 느낌과 의의를 토로한 글이라는 점에서 평문(評文)의 범주 속에 넣을 수 있다. 성리학자로서 지은이 자신이 지니고 있는, 시가와 문학에 관한 태도가 비교적 솔직하게 드러나 있다. 아울러 세속을 대하는 지은이 자신의 모습도 고백되어 있어 재미있다. 이 글 속에 언급된 '한림별곡'이나 기타 '동방의 가곡'들에 대한 평가를 음미해 보고, 이러한 발문(跋文)류의 글이 가지는 비평적 성격과 문학적 기능을 이해하도록 하자.
인간 속세를 떠나 자연에 흠뻑 취해 사는 자연 귀의 생활과 후진 양성을 위한 강학(講學)과 사색에 침잠(沈潛)하는 학문 생활을 솔직 담백하게 표현해 놓았다.
이 작품의 끝에 붙인 발문(跋文)에 지은이 자신이 이 노래를 짓게 된 연유와 우리 나라 가요를 평하는 말 가운데, 그의 문학관이 잘 나타나 있다.
우리 가곡이 무릇 음란한 노래가 많아서 이야기할 만한 것이 못 되며 이별(李鼈)이 '육가(六歌)'를 본떠 이 노래를 짓는다고 밝히고 있고, 또한 이를 아이들로 하여금 익혀 부르게 하여 나쁜 마음을 씻어 버리고 서로 마음이 통하게 하고자 한다는, 퇴계의 문학관을 밝히고 있다.
'도산육곡(陶山六曲)', '도산전후육곡(陶山前後六曲)'이라고도 부른다.
<참고> 도산십이곡 발(陶山十二曲跋)
이 '도산십이곡'은 도산 노인(陶山老人)이 지은 것이다. 노인이 이 시조를 지은 까닭은 무엇 때문인가. 우리 동방의 가곡은 대체로 음와(淫 )하여 족히 말할 수 없게 되었다. 저 '한림별곡' 과 같은 류는 문인의 구기(口氣)에서 나왔지만 긍호(矜豪)와 방탕에다 설만(褻慢)과 희압(戱狎)을 겸하여 더욱이 군자로서 숭상할 바 못 되고, 다만 근세에 이별(李鼈)이 지은 '육가(六歌)'란 것이 있어서 세상에 많이들 전한다. 오히려 저것[육가]이 이것[한림별곡]보다 나을 듯하나, 역시 그 중에는 완세 불공(玩世不恭)의 뜻이 있고 온유 돈후(溫柔敦厚)의 실(實)이 적은 것이 애석한 일이다.
노인이 본디 음률을 잘 모르기는 하나, 오히려 세속적인 음악을 듣기에는 싫어하였으므로, 한가한 곳에서 병을 수양하는 나머지에 무릇 느낀 바 있으면 문득 시로써 표현을 하였다. 그러나 오늘의 시는 옛날의 시와는 달라서 읊을 수 있겠으나, 노래하기에는 어렵게 되었다. 이제 만일에 노래를 부른다면 반드시 이속(俚俗)의 말로써 지어야 할 것이니, 이는 대체로 우리 국속(國俗)의 음절이 그렇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내가 일찍이 이별의 노래를 대략 모방하여 '도산 육곡'을 지은 것이 둘이니, 기 일(其一)에는 '지(志)'를 말하였고, 기 이(其二)에는 '학(學)'을 말하였다. 아이들로 하여금 조석(朝夕)으로 이를 연습하여 노래를 부르게 하고는 궤( )를 비겨 듣기도 하려니와, 또한 아이들로 하여금 스스로 노래를 부르는 한편 스스로 무도(舞蹈)를 한다면 거의 비린(鄙吝)을 씻고 감발(感發)하고 융통(融通)할 바 있어서, 가자(歌者)와 청자(聽者)가 서로 자익(資益)이 없지 않을 것이다.
돌이켜 생각컨대, 나의 종적이 약간 이 세속과 맞지 않는 점이 있으므로 만일 이러한 한사(閑事)로 인하여 요단(鬧端)을 일으킬는지도 알 수 없거니와, 또 이것이 능히 강조(腔調)와 음절에 알맞을는지도 모르겠다. 아직 일 건(一件)을 써서 서협(書 ) 속에 간직하였다가, 때때로 내어 완상(琓賞)하여 스스로 반성하고, 또 다른 날 이를 읽는 자의 거취(去取)의 여하(如何)를 기다리기로 한다.
가정(嘉靖) 44년(1565) 을축년 3월 16일 도산 노인은 쓴다.
(해설)
이 글은 지은이 자신이 문학 작품에 대한 스스로의 느낌과 의의를 토로한 글이라는 점에서 평문(評文)의 범주 속에 넣을 수 있다. 성리학자로서 지은이 자신이 지니고 있는, 시가와 문학에 관한 태도가 비교적 솔직하게 드러나 있다. 아울러 세속을 대하는 지은이 자신의 모습도 고백되어 있어 재미있다. 이 글 속에 언급된 '한림별곡'이나 기타 '동방의 가곡'들에 대한 평가를 음미해 보고, 이러한 발문(跋文)류의 글이 가지는 비평적 성격과 문학적 기능을 이해하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