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가황조에 나타난 역사적 흐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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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송가황조 줄거리

2.송가황조의 역사적 흐름

3.송가황조의 역사적 배경
1.신해혁명
2.서안사변
3.국공합작
4.만주사변
5.북벌

4.결론

본문내용

군)을 8로군으로 개편하는 것에 동의하고 내전중지와 항일을 선언하게 되었으며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졌다. 제2차 국공합작은 1차 때와는 달리 중공이 자신의 래甘寧邊區(래감영변구)정부와 홍군이란 군대를 갖고 있어 명실공히 당 대 당의 國共(국공)합작이었다.
4.만주사변(滿洲事變)
1931년 9월 18일 류탸오거우사건〔柳條溝事件〕으로 비롯된 일본군의 만주 침략전쟁. 일본이 러·일전쟁으로 창춘〔長春;寬城子〕∼뤼순〔旅順〕간 철도와 이에 따른 이권을 획득하고 관둥저우〔關東州〕를 조차(租借)한 이후 만주는 일본의 자본투자·상품시장·중공업원료공급지화하여 일본의 생명선으로서 중요시되었다. 일본은 제1차세계대전 이후 펑톈군벌〔奉天軍閥〕 장쭤린〔張作霖〕을 원조하며 중국관내의 침략을 노렸다. 그러나 장쭤린이 피살되고 장쉐량〔張學良〕이 장제스〔蔣介石〕의 국민정부에 합류한 이후, 만주에서도 일본상품 배척과 제국주의적 이권회수운동이 격화하였다. 대공황으로 만주철도의 영업이 부진한 데다 국민정부에 의한 만주철도포위선 건설계획은 만주철도를 위협하게 되었다. 일본국내에서는 이것을 <만·몽(滿蒙)의 위기>라고 선전하고, 1931년 7월의 완바오산사건〔萬寶山事件〕, 나카무라〔中村〕 대위 사건과 더불어 배외주의 고양에 이용하였다. 중국의 국권회복운동이 거세게 일고, 소련이 1928년부터 추진한 제1차 5개년계획의 진척 등이 관동군을 자극하여, 관동군내에서는 이미 고급참모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郎〕대령을 중심으로 <만몽영유계획>이 입안되어 있었다. 관동군은 1931년 9월 18일 밤 10시 반 펑톈 교외의 류탸오거우에서 만주철도를 폭파하고 이를 장쉐량 군대의 행위라는 구실로 군사행동을 일으켰다. 장쉐량의 군영인 북대영〔北大營)과 펑톈성을 공격하였고 이튿날 펑톈시를 비롯하여 만주철도 연변 주요 도시를 점령하였다. 또한 지린〔吉林〕으로의 출병, 9월 21일 조선군 사령관 하야시 센주로〔林銑十郎〕 중장에 의한 조선군의 독만 월경으로 전화는 남만주 전체에 확대되었다. 일본정부는 군사행동의 정당성과 금후의 불확대방침을 발표, 사건을 공인하였다. 1931년 10월 진저우〔錦州〕 폭격 등 남만주를 점령한 후 관동군은 북만주 점령을 꾀하여 11월에 치치하얼〔齊齊哈爾〕 점령에 이어, 1932년 2월 하얼빈〔哈爾濱〕을 점령, 이후 북만주의 주요도시를 점령했다. 당초 만몽을 영유하려고 계획했던 관동군은 만주 지배방식을 괴뢰국가 수립으로 변경했다. 1931년 10월 <만몽공화국 통치대강안>을 작성, 통치방침·정부조직을 결정하고 각지의 군벌군인에게 지역적독립정권을 세우도록 하고, 11월에는 톈진〔天津〕에 망명중이던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를 탈출시켜 새로운 국가의 원수로 삼을 준비를 추진하였다. 1932년 1월 말, 항일운동이 심한 상하이에서 일본 해군육전대와 중국군의 충돌이 일어나자 3월 1일, 장징훼이〔張景惠〕 등에 의한 둥베이행정위원회〔東北行政委員會〕가 <만주국> 성립을 선언하고 9일 푸이가 집정에 취임, 새로운 국가가 출발하였다. 중국은 일본의 군사행동을 국제연맹에 제소하여 리턴조사단이 파견되었으나 조사단이 도쿄〔東京〕에 도착한 다음날 만주국이 성립되었다. 국제연맹은 리턴조사단의 조사보고서를 채택, 일본군의 철수를 권고하였으나, 러허성[熱河省]을 점령한 일본은 이를 거부하고 1933년 3월 국제연맹을 탈퇴하였다. 이를 계기로 일본 정국(政局)은 정당내각(政黨內閣)에 종지부를 찍고 파시즘 체제로 전환하였으며, 이러한 침략행위는 1937년의 중일전쟁과 1941년의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었다.
5. 북벌(北伐)
광동정부는 1925년에 孫文(손문)이 서거하자 집단지도체제의 국민정부로 개조되었으며 군을 국민혁명군이라 불렀다. 국민혁명군은 군벌을 타도하고자 1926년 7월 북벌을 시작했다. 국민혁명군(북벌군)의 총사령관은 蔣介石(장개석)이었으며, 북별을 계기로 그의 당내 위치가 크게 올라갔다. 당시 국민정부 좌파와 中共(중공)은 蔣(장)의 세력이 확대되는 것을 염려하여 북벌에 반대하였다.
북벌군은 10만여 명에 불과했으나 군벌세력은 약 1백만 명이었다. 그 가운데 吳佩孚(오패부) 張作霖(장작림)의 세력이 제일 컸으며, 孫傳芳(손전방)이나 閻錫山(염석산) 馮玉祥(풍옥상)의 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북벌은 중공과 일본의 방해(濟南事變)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풍옥상과 염석산이 국민혁명군에 협조하여 순조롭게 집행되었다. 북경에 있었던 장작림은 동북으로 돌아가다 일본군에게 皇姑屯(황고둔)에서 폭사당하였다. 이를 안 아들 張學良(장학량)이 국민정부의 깃발로 바꾸어 달고(東北易幟(동북역치)라 함) 국민 정부의 명에 따르기로 함으로써 북벌은 끝나고 전중국을 통일하게 되었다. 이로써 국민정부는 軍政(군정)의 단계를 마감하고 訓政(훈정)의 단계로 들어갔다.
결론
송가황조는 근대 중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내가 사학과라서 중국의 고 중세사는 공부할 기회가 많았으나 중국의 근대사는 내가 알고 있는 지식도 짧고 공부할 기회가 별로 없어서 무관심 했었다. 이번에 공부하면서 가장 놀라웠던 것은 우리 나라의 열사들 만만치 않게 중국에도 수많은 열사들이 있었고 혁명에 인생을 바친 사람들도 많았다는 사실이다. 손중산이나 송미령이나 그외 다수의 무명인들. 중국을 사랑하기에 자신의 행복을 포기하면서까지 중국국민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하던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있었기에 그나마 중국은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중국의 위대한 잠재력을 새삼 일깨워주는 부분이다.
국민당과 공산당의 갈등도 잘 나타나 있었다. 무엇보다도 장개석의 정치의 잘못된 점은 무엇이었는지 어째서 국민당과 공산당을 그렇게 충돌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다. 이 영화 감상을 계기로 중국을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아 기쁘다.
현재는 과거의 연속이라고 한다. 과거 중국의 근현대사시기 장개석이 대만으로 건너가고 지금까지 이어지는 중국과 대만의 관계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역사를 지나간 과거라고만 생각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 영화를 통해서 지금에까지 이어지는 역사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미래를 위해서 현재를 열심히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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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05.28
  • 저작시기20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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