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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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 차

Ⅰ.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란?

Ⅱ. 광개토대왕은 누구인가?

Ⅲ. 신묘년(辛卯年)기사

Ⅳ. 왜지설(倭地說)

Ⅴ. 광개토대왕릉비에서 보이는 수묘제(守墓制)

Ⅵ. 광개토대왕비에 나타난 대외관계

< 참고문헌 >

본문내용

한 릉비의 글은 고구려의 지방 통치제도, 인민들에 대한 봉건적 부담의 부과방식, 수묘호들의 계급적 성격과 사회적 지위 등을 추단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
Ⅵ. 광개토대왕비에 나타난 대외관계
1. 고구려-백제의 관계
광개토 대왕비에 나타난 백제의 정벌은 永樂6년의 기록부터 시작 된다.
永樂6년 (396) “왕이 친히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공격하여 백제왕의 항복을 받고 그 王弟와 大臣 10 인을 포함한 포로 1천을 이끌고 개선하였다.”
永樂9년 (399) “백제가 전일의 맹세를 어기고 倭와 화통하자 이를 응징하기 위하여 대왕이 평양으로 南巡 하였는데, 신라가 사신을 보내어 전일에 이미 대왕의 덕화에 귀의하여 신하가 되었음을 전제로 국경에 침구한 왜구를 격퇴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내용은 사실 신라와의 대외 관계를 나타내주고 있으나 이것으로 인해 백제가 또 한번 공격 받았음을 알 수 있다.)
永樂14년(404) “영락 14년 왜병을 앞세워 고구려의 대방계에 침입하니, 대왕이 친히 친위병을 동원하여 이를 격파하고 무수한 왜구를 참살하였다.” (예전에는 대방계의 침입을 왜의 단독적인 군사 행동으로 보았으나 여러 가지를 종합해 볼 때 百濟를 主군으로 하고 倭를 從군으로하는 연합군의 작전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해지고 있다.)
永樂17년 (407) “영락 17년에 대왕은 5만의 보기를 파견하여 (백제?)를 쳐서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으며, 개선하는 길에 사구성(沙溝城) 등 6개의 성을 공파·획득 하였다.”
2. 고구려-신라의 관계
永樂8년 (398) “소규모의 군사를 파견하여 국경 지역의 백신토곡을 관찰, 이에 이어 주변국가의 남, 녀 3백여인의 民戶를 획득하는 한편, 이 후부터는 조공 관계를 맺게 되었다.”
(문자의 마멸과 구체적인 국명의 생략으로 8년 기사의 정복대상을 연해주 일대의 ‘숙신’이나 강원도 일대의 '예’로 규정하는 견해가 있었다. 그러나 전반부의 기사는 강원도 일대의 고구려 토강을 관찰한 것이고, 후반부의 기사는 산악을 경계로 하여 인접한 국가, 즉 신라에 대한 복속 기사로 볼 수 있으므로, 이때부터 고구려의 조공지 배권에 편입되었다고 본다.)
永樂9년(399) 백제와의 관계에서 언급한대로 신라는 이때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했다
永樂10년(400) “영락10년에 왕은 5만의 보기를 파견하여 난공강 유역에서 왜를 격퇴하 고, 任那加羅 및 安羅를 복속시키는 한편 신라를 구원하였다. 그 결과 종래와는 달리 신라국왕이 직접 고구려에 조공하였다.” (이때에도 역시 고구려는 신라를 구원하였다. 이때의 국제 정세는 고구려-신라, 백제-임나가라-왜의 대립구도였는데, 이를 계기로 고구려와 신라의 조공 관계는 더욱 강화되었다.)
3. 고구려-왜의 관계
능비문의 고구려-왜의 관계기사는 한·일 양국에 있어 과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하지 만 고구려의 왜에 대한 토벌 작전은 오히려 성격이 명확하다. 고구려의 남진에 있어 왜는 백제, 신라와는 달리 복속의 대상이 아니였다는 점을 보면 당시 왜는 고정된 거점이 있었던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고구려에 있어 정복의 주요 대상은 백제, 신라, 동부여였으며, 왜와 비려 등은 부수적인 대상으로 단지 토멸의 대상일 뿐이었다는 점이다.
신묘년 기사
이 시안의 요점은 세 가지 이다.
① ‘來渡海破’라고 읽어온 부분의 '破 '를 단순한 접속의 의미를 가진 글자로 본다.
② ‘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을 '……百殘將侵新羅……' 혹은 '……百殘欲取 新羅……'와 같이 豫定의 의미를 가진 글씨로 본다.
③ '倭以辛卯年來'는 '……신묘년에 왔다' 고 읽는 대신 '……신묘년 以來'라고도 읽을 수 있 다.
세 가지를 정리하면 '倭가 辛卯年 이래로 바다를 건너왔다. 故로 百殘이 新羅 를 侵하여 臣民을 삼으려 하였다' 는 것이다.
이 해석의 전반부분은 '百濟가 끌어들인 倭가 辛卯年 이래로 한반도로 건너왔다' 는 뜻 이다. 倭使 혹은 그 호위병력 등 본격적인 전투 병력이 아닌 倭의 소병력이 百濟로 건너 오기 시작했다는 것으로 보이다. 이 해석의 후반부분은 '그런 연유로, 倭와 제휴한 百濟가 新羅를 侵하려 하였다.'는 뜻이 다. 이때에 백제가 실제로 출병을 하지 않았지만, 백제의 그러한 위협적인 동향을 본 고구려가 마침내 永樂 6년에 백제를 토벌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 永樂 6년 전투에 倭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永樂 원년(辛卯)에 渡海한 倭가 전투병력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대상의 3차 왜병
① 1차 출병 - '광개토대왕능비' 에 보이는 서기 399∼404년의 倭
(이후 백제는 한문을 전파한 것으로 되어 있다.)
② 2차 출병 - '일본서기' 에 보이는 서기 554년의 倭
(이후 백제는 불교를 전파한 것으로 되어 있다.)
③ 3차 출병 - '唐書' 百濟傳에 보이는 倭
위에서 보이듯이 倭의 출병이 공교롭게도 모두 百濟의 요쳬에 의한 것이었던 까닭에, 이것이 倭의 이른바 '南朝鮮經營'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들 倭는 그 때마다 국제적으로 고립에 빠졌던 百濟의 請援에 의한 각각 별개의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 3차의 倭兵은 그 때마다 한반도 내에서 궤멸한 것이다. 倭가 '任那日本 府'등으로 한반도 정세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 같이 생각하는 견해가 얼마나 사실과 동떨어진 것이었는가, 이제는 분명해졌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 참고문헌 >
李基東,「硏究의 現況과 問題點」,『韓國史市民講座 제 3집』, 一潮閣, 1988
千寬宇,「廣開土王의 征服活動」,『韓國史市民講座 제 3집』, 一潮閣, 1988
박진석,『高句麗 好太王碑 硏究』, 아세아문화사, 1996
徐榮洙,「광개토대왕비의 진실은 무엇인가」
불함문화사,『高句麗史 論文選集 제 7권-高句麗 廣開土大王碑』, 불함문화사, 1995
불함문화사,『高句麗史 論文選集 제 8권-高句麗 廣開土大王碑』, 불함문화사, 1995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
목 차
Ⅰ.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란?
Ⅱ. 광개토대왕은 누구인가?
Ⅲ. 신묘년(辛卯年)기사
Ⅳ. 왜지설(倭地說)
Ⅴ. 광개토대왕릉비에서 보이는 수묘제(守墓制)
Ⅵ. 광개토대왕비에 나타난 대외관계

키워드

역사,   삼국,   광개토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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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06.08
  • 저작시기2003.0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23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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