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의 생애와 전태일평전에 대한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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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전태일의 생애와 전태일평전에 대한 서평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전태일의 생애
1. 어린시절의 전태일
2. 소년 시절의 전태일
3. 청년시절의 전태일
4. 열사 전태일
1) 재단사의 꿈과 고뇌
2) 사랑과 투쟁의 불길
3) 거룩한 불꽃이 되어

Ⅱ. 열사 전태일의 일기장
1. 대통령에 보내는 편지
2. 친구 원섭에게 보내는 편지
3. 근로감독감님께 보내는 편지

Ⅲ. 결 론(서평)

※ ≪ 참 고 문 헌 ≫

본문내용

실토할 테니까!
3. 근로감독감님께 보내는 편지
여러분, 오늘날 여러분께서 안정된 기반 위에서 경제 번영을 이룬 것은 과연 어떤 층의 공로가 가장 컸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여러분의 애써 이루신 상업기술의 결과라고 생각하시겠습니다만은 여기에는 숨은 희생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즉, 여러분들의 자녀들의 힘이 큰 것입니다. 성장해 가는 여러분의 어린 자녀들은 하루 15시간의 고된 작업으로 경제발전을 위한 생산계통에서 밑거름이 되어 왔습니다. 특히 의류 계통에서 종사하는 어린 여공들은 평균 연령이 18세입니다. 얼마나 사랑스러운 여러분들의 전체의 일부입니까? 가장 잘 가꾸어야 할, 가장 잘 보살펴야 할 시기입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어느 면에서나 성장기의 제일 어려운 고비인 것입니다. 이런 순진하고 사랑스러운 동심들을 사회생활이라는 웅장한 무대는 가장 메마른 면과 가장 비참한 곳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메마른 인정을 합리화시키는 기업주와 모든 생활 형식에서 인간적인 요소를 말살 당하고 오직 고삐에 메인 금수처럼 주린 창자를 채우기 위하여 끌려다니고 있습니다. 곧 그렇게 하는 것이 현 사회에서 극심한 생존경쟁에서 승리한다고 가르칩니다. 기업주들은 어떠합니까? 아무리 많은 폭리를 취하고도 조그만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습니다. 합법적이 아닌 생산공들의 피와 땀을 갈취합니다. 그런데 왜 현 사회는 그것을 알면서도 묵인하는지 저의 좁은 소견은 알지를 못합니다. 내심 존경하시는 근로감독관님. 이 모든 문제를 한시 바삐 선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1969. 12. 19일
Ⅲ. 결 론(서평)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 발전의 역사 한가운데 전태일이 있다. 군사독재의 칼날 앞에서도 그는 의연하게 자신의 마지막 남은 힘까지 바쳤던 것이다. 내 가정을 위해서, 노동자를 위해서, 밝은 조국의 미래를 위해서 그는 한 줌의 재로 사라졌던 것이다. 전태일 열사의 육신은 한 줌의 재로 사라져 갔지만, 그가 남기고간 교훈은 훗날 가슴 따뜻한 귀감이 되어 사회의 발전을 조국의 민주화를 이끌었는지도 모른다.
태일이 자신의 생명을 던짐으로써 한국노동운동은 새로운 단계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 아래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던 노동운동이 조금씩 싹을 틔우기 시작했고, 태일의 죽음으로 시작된 노동운동의 발달은 70년대 청계피복노동조합의 합법성 쟁취와 민주노동운동의 발달에 있어 근원이 되었다. 또한 지식인들이 노동운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민중의 삶과 투쟁이 역사의 전면으로 부각되기 시작한 기폭제가 되었으며 민주주의를 앞당기는 역사적 사건이 되었다.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 열사의 죽음은 피끓는 고통의 결과였지만 그 고통을 넘어 모든 노동자와 민중은 진정한 인간다운 삶과 민주주의를 향해 한걸음 더 내딛을 수 있었다. 전태일 열사가 산화한 1970년을 분기점으로 노동운동의 양상은 급격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 시대에 노동운동은 민족해방운동과 맞물려 민족주의적이면서 사회주의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었으며, 해방 후 좌우익의 대결 속에서는 전평으로 대표되는 좌익 노동운동이 대세를 이루다가 이승만 정권과 미군정에 의해 와해되고 말았다. 산업화가 본격 시작된 1960년대부터 노동자와 노동운동은 단지 '산업역군'이라는 이름으로 왜곡되면서 군부독재의 지독한 탄압을 받게 된다. 전태일 열사가 증언했던 것처럼, 평화시장의 상황은 결코 이곳만의 특별한 상황이 아닌, 한국 노동자가 처한 보편적인 노동조건이며 생존의 현실이었던 것이다.
전태일 열사가 산화한 이후, 박정희 정권은 정치적 위기를 맞아 71년에 '국가비상상태'를 선포하고 72년에 10월 유신과 긴급조치를 선포하면서 공포정치로 민중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각하기 시작한 노동자의 투쟁은 더욱 가열차게 불타올라 70년는 가장 격렬하고 뜨거운 투쟁이 타올랐던 시기였다. 70년대에 약 2,500개가 넘는 노동조합이 결성되었고 70년 11월 청계피복노조, 73년 신진자동차(현 대우자동차), 원풍모방, 아세아자동차 노동조합 등 대기업 민주노조의 탄생을 알리는 사건들이 속속 발생했다. 80년, 전두환, 노태우 일당의 군부쿠데타 이후, 노동운동은 다시 가혹한 탄압 속에서 잠시 활동이 멎는 듯 했다. 하지만 83년부터 시작된 노동운동은 노동조합의 민주화 투쟁, 대규모 노동조합의 결성, 대학과 연계한 현장 투쟁 등 다양한 방법과 발전된 운동 방식으로 노동운동의 비약적인 도약이 있었다. 특히, 노동운동이 노동조합적인 내용에 머무르지 않고, 미국을 겨냥한 반제국주의, 반독재, 반자본의 성격을 확실하게 띄었으며 노동자의 계급적 각성을 통해 노동자가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게 된 것이 가장 큰 소득이었다. 87년 6월 항쟁이후 불붙기 시작한 노동운동은 7-9월의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전 산업의 모든 노동자와 사무직 노동자들이 일치 단결하는 계기가 되었고 노동자의 단결된 힘을 보여준 감동적인 사건이었다.
이 모든 투쟁과 승리의 역사를 이루는 근간에는 전태일 열사의 죽음이 있다. 한 노동자의 죽음으로 노동운동이 꽃피고 열매를 맺게 된 것이다. 전태일 열사를 이어 산화한 수 많은 노동 열사와 민주 열사의 명목을 빌며,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룰 때까지 노동자의 전진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전태일은 우리 곁에 왔다가 한방울의 이슬, 거룩한 불꽃이 되어 우리 곁을 떠났다. 한 사람의 일생이 이렇게 치열하고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인간 존재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본다. 그의 인간에 대한 한없는 사랑과 희망, 고통과 좌절을 따라가면서 자신을 돌이켜 보지 않을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시대가 변하고 날이 갈수록 발전되는 이 사회 속에서도, 아직도 세상의 음지에서는 고통 받고 있는 노동자들이 수 없이 많을 것이다. 아직도 우리 사회 곳곳에서는 전태일 역사의 가르침을 잊지 말아야 할 곳이 너무도 많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일지도 모르겠다.
※ ≪ 참 고 문 헌 ≫
1. 전태일평전 - 조영래 / 돌베개 / 2001년
2. 전태일 열사의 집 (http://www.junt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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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6.12
  • 저작시기20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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