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기스칸과 몽골의 세계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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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목차

1. 칭기스칸의 일생

2. 몽골이 세계 대제국 건설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3. 몽골의 세계 경영

4. 칭기즈칸 리더십과 현대사회에 주는 메세지

본문내용

찌고 배부른 기름맛을 알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원정길을 포기하고 음주가무에 빠져 들 것을 경계한 것이다. 그리고 살림이 풍족해 지면 더 많은 재물에 욕심을 내고 단신의 군장이 온갖 재물보화로 무거워질 것이기 때문이며 서로 많은 재물을 차지하려고 서로 싸울 것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오늘 날 우리의 위정자들이 험난했던 민주투사의 역정에서는 서로 잘 뭉치다가 정권을 잡으니 서로 싸우는 것과 다를바 없는 것이다. 배고픈 시절 굶주림을 면하려고 이역만리 먼 땅의 건설현장에 나가던 우리의 근로자들이 이제는 3D기피 현상에 빠진 것에 비추면 새삼 뒤돌아 볼만한 대목이 아닌가 싶다. 여섯 번째 그의 리더십 비밀은 스피드이다.(기동력으로서의 스피드가 아닌 사고의 스피드이다.) 마차로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2년이 걸리던 것을 생각하면 중원을 점령하는 2년여의 세월은 거의 말을 달리는 속도로 영토를 점령해 간 것이나 다름없다고 한다. 먼저 의사결정의 스피드주의를 보자. 원정군들은 온갖 작전계획을 세우느라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다. 수많은 정보와 판단을 요구하는 결정임에도 그들은 철저한 임장주의(臨場主義)를 선택하였다. 이는 현대적 의미의 현장주의인데, 탁상공론으로 세월을 보내 봤자 소용이 없고 "저 산을 넘어 가 보아야 그곳이 산일지 바다일지를 안다"는 모토로 일단 대원칙을 먼저 세우고 행동에 옮기며 상황을 보아가며 세부적인 사항을 그때 가서 결정한다는 방식이다. 물론 시행착오도 있었을테지만 이는 모르고 내린 결정보다 안전한 것이다. 그리고 이렇듯 무모한 방식이 가능했던 것은 그들의 조직이 기동력에서 탁월했기 때문이다. 그 유명한 몽고말과 손에 익은 작은 칼, 그리고 사냥터에서 갈고 닦은 그들의 활솜씨는 무거운 갑옷으로 무장한 중세 서양의 병정들은 양철 허수아비와 같이 다루기 편한 연습상대에 불과했다. 일곱 번째는 칭기스칸의 통합적 패러다임에 있다. 일단 전쟁을 벌인 적국이라 할지라도 전쟁이 끝난 뒤 제국의 일원으로 충성을 맹약하기하만 하면 이러 저러한 제한을 가하지 않았다. 그들의 재산은 물론, 왕권, 심지어 종교까지 자율권을 부여했다. 각 국가가 가진 고유의 특수성(개체성)을 보존하는 것은 보편성(전체성)을 의미하는 제국에 대한 충성하나로 허용되었던 것이다. 여덟 번째는 현대인의 생각을 앞지를 정도의 성개방 의식에 있었다, 아울러 자손을 번영시키는 근본으로서의 여성 지위를 무척 인정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사실 그의 아내는 자신의 부락이 공격을 받을 때 적국에게 납치되어 2년여를 적의 장수에게 잡혀 있었다. 그가 자신의 아내를 되찾았을 때는 이미 그의 아내는 아이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천하에 그 사실을 알리고 나의 아내가 낳은 아이는 나의 자식임을 선포한다. 그리고 그 아이는 대몽골족의 장손으로 남아 그의 아버지 위업을 이어 받게 된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우리가 국사에서 배운 바와 같은 고려 시대의 공녀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해가 빠르다. 궁녀로 끌려간 조선의 아녀자들은 그들의 원래 가문의 등급에 따라 대접을 받게 되는데 공녀 위씨는 나중에 원나라 황제의 후궁이 되기도 한다. 아홉 번째는 명분과 정당성의 확보이다. 그의 부족들은 명예를 중시하고 이름 석자에 대한 오명을 몹시도 싫어한다. 항상 그들은 옳은 쪽으로 평가받기를 원한다. 청군 아니면 백군인 상태의 전쟁이 아니라 자신들은 정의의 편이라는 생각으로 싸우도록 같은 전쟁을 하더라도 명분이 없는 전쟁을 하지 않았다. 금나라 100만 대군을 칠 때도 그 명분은 나라를 물려받지 못할 불효한 놈이 천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명분이었다. 그리고 백성들을 향해서는 일종의 해방전쟁이라고나 할까 땅을 빼앗거나 명분 없는 약탈을 자제하였다. 다음으로 이러한 칭기스칸의 리더쉽 분석을 통해서 현대사회에 주는 메시지를 알아보자. 간단히 말하면, 상반된 개념을 동일하게 바라볼 수 있다라는 것이다. 첫 번째로 자유와 단결이라는 상반된 개념을 동일시 하였다. 자유라는 것이 주어졌을 때야말로 단결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칭기스칸의 부하들이 아무때나 칭기스칸을 찾아가 극존칭을 쓰지 않고 대화를 나눔으로서 자유로운 대화가 가능해졌고, 그러한 자유로운 대화는 칭기스칸 군대에 단결을 가져왔다. 우리 사회에서는 남, 북이라는 대치상황에서 북에 대한 모든 부분을 규제하는 것이 우리 사회에 더욱더 분열을 조장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두 번째로 빠른 안정과 빠른 변화의 개념의 동일시다. 빠른 안정이 빠른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정복 활동시 끝까지 저항한 도시의 사람을 다 죽이고 난 뒤에는 완전히 새로운 도시로 탈바꿈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에서 잘못된 집단이 있다면 빨리 제거하는 것이 빠른 안정을 가져올 수 있다는 메시지를 준다. 세 번째로 조직의 실현을 위해서 혈통의 윤리를 상당부분 버린 것이다. 칭기스칸은 자신의 혈통이 공을 세우지 못했을 때에는 재물을 나누어주지 않고 공을 세운 자신의 부하들에게 재물을 나누어주는 행동을 취하였다. 우리 사회는 50대 재벌이라는 거대한 조직이 혈통을 위주로 한 재화의 분배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이렇게 칭기스칸이 리더쉽과 그러한 리더쉽의 분석을 통한 메시지를 알아보았다. 그렇다면 이러한 분석이 가능하게 한 칭기스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칭기스칸이 어떻게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었을까? 그에 대한 답은 다름아닌 그가 문맹이었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칭기스칸은 무식했기 때문에 단순하였고, 그러한 단순성은 공이 있는 사람에게는 재물을 공이 없는 사람에게는 재물을 전혀 주지 않는 행동을 취하게끔 하였다. 자신에게 맞는, 유리한 조직, 말, 법, 체제만을 이용하고, 인정하려하는 이성의 지식인이 아닌, 느낀대로 가슴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는 문맹자였기에 감성의 칭기스칸의 위대한 업적은 실현될 수 있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 몽골사회제도사:베·야·블라디미르초프
▣ 유라시아 유목제국사:르네 그루쎄
▣ 유목사회의 구조: 하자노프
▣ 몽골 세계제국:스기야마 마사아키
▣ 유목민이 본 세계사:스기야마 마사아키
▣ 격동의 아시아 정복왕조시대: 조성을 편역(집현전)
▣ 동양의 역사와 문화:국학자료원
▣ 동양사 개론: 삼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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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3페이지
  • 등록일2003.08.26
  • 저작시기2003.08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24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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