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들어가기 전에
<정약용의 생애>
① 성장기
② 강진 유배기
③ 말년기
<정약용의 인성>
① 목민관으로서의 정약용
② 유배지에서의 성인
<정약용에게 영향을 준 사람>
① 정조와의 만남
⑴ 정치 관료로서의 만남
⑵ 기술 관료로서의 만남
② 다산과 광암 이벽과의 만남
③ 서용보와 만남
<정약용의 실학사상>
① 정치사상
⑴ 민권의식
⑵ 국민 참정권의 제시
⑶ 민중저항권
② 경제사상
⑴ 토지소유제도
⑵ 농업경영론
⑶ 산업경영론
1. 상업관
2. 화폐관
3. 대외무역관
4. 광업관
5. 기술관
③ 사회사상
⑴ 환자개혁론
<정약용의 저서>
① 여유당 전서 보유
⑴ 시문집류
<일기류>
<잡저류>
<교육>
<불교>
<역사>
⑵ 경학
⑶ 경세학(정법, 국방)
⑷ 실용서
② 기록으로만 전하는 책
③ 여유당전서 간행 이전에 단행본으로 출간된 책
<맺음말>
<정약용의 생애>
① 성장기
② 강진 유배기
③ 말년기
<정약용의 인성>
① 목민관으로서의 정약용
② 유배지에서의 성인
<정약용에게 영향을 준 사람>
① 정조와의 만남
⑴ 정치 관료로서의 만남
⑵ 기술 관료로서의 만남
② 다산과 광암 이벽과의 만남
③ 서용보와 만남
<정약용의 실학사상>
① 정치사상
⑴ 민권의식
⑵ 국민 참정권의 제시
⑶ 민중저항권
② 경제사상
⑴ 토지소유제도
⑵ 농업경영론
⑶ 산업경영론
1. 상업관
2. 화폐관
3. 대외무역관
4. 광업관
5. 기술관
③ 사회사상
⑴ 환자개혁론
<정약용의 저서>
① 여유당 전서 보유
⑴ 시문집류
<일기류>
<잡저류>
<교육>
<불교>
<역사>
⑵ 경학
⑶ 경세학(정법, 국방)
⑷ 실용서
② 기록으로만 전하는 책
③ 여유당전서 간행 이전에 단행본으로 출간된 책
<맺음말>
본문내용
여백에 다산 이 전주를 붙인 책,
주역잉언 - 주자의 주역 해석을 일일이 소개하면서 자신의 주역 해석을 덧붙인 글.
시경강의속집 - 1859년, 11권. 다산의 시경 강의를 다산의 외손자이자 제자 인 윤정기가 정리한 시경해석서
⑶ 경세학(정법, 국방)
산재냉화 - 수령과 백성 사이에 갖추어야 할 사항을 기술한 교훈집, 목민심서의 윤리적 측면을 강조한 것이라 할수 있다.
아방비어고 - 우리 나라의 국방 문제를 집대성한 책. 모두 30권으로 이 가운 데 민보의, 상토지 2권, 행군촬요, 일본고 등이 여유 당전서 보유에 실려있다.
⑷ 실용서
구고원류 - 동양의 구고수학의 기반 위에서 서양의 삼각기하학을 수용하여 직 각삼각법, 평면삼각법, 구면삼각법 등을 체계화한 수학 이론서. 서학에 관심이 많던 30 대 무렵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여범지남 - 사륙변려문을 짓는 방법을 기술한 일종의 작문지침서.
서의-서경에 나오는 구절을 다산 자신이 주석을 가한 책.
역의-주역에 나오는 구절을 주석한 책.
임자세제도태양출입주야시각 - 1792년. 전국의 일출, 일몰 시각을 비교 조사한 천운기상 관련서. 다산의 과학기술 사상을 잘 보여준다.
② 기록으로만 전하는 책
논어수차 - 규장각 필사본으로 현재 3권만 전한다. 논어고금주의 저본인 듯 하다.
소학보전 - 1801년, 1권. 아이들에게 소학을 강의할 때 사용하기 위해 집필한 것으로 선 인들의 주석 가운데 미비한 것을 보충함. 소학지언의 저본인 듯하다.
독상서보전 - 1827년 1권. 당대의 경학자인 홍석주가 쓴 상서보전을 읽고 저술한 책.
염씨고문소증초 - 1827년. 4권. 청나라 학자 염약거가 쓴 상서고문소증에 대한 견해를 담은 상서 주석서.
국조전례고 - 1818년. 2권.
화성정리통고
문헌비고간오 - 1800년, 1권. 문헌비고의 체제와 차례를 새로 다듬은 책.
사기찬주 - 사기영선에 대한 간략한 주해서.
이아술 - 1801년. 6권. 중국 고대의 사전인 이아를 주석한 책,
사대고례산보 - 1821년. 동문휘고, 통문관지 등 중국 서적을 널리 찾아서 사 대에 관련 된는 것을 모으고 분류한 책.
③ 여유당전서 간행 이전에 단행본으로 출간된 책
목민심서 - 1818년. 48권. 지방관들의 치적과 폐해를 고금의 사례를 통해 보여 주며 수 령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과 자세를 열거.
흠흠심서 -1819년. 30권 형벌과 재판에 관한 사항을 144개 조항의 사례를 들 어 상세히 설명한 책. 흠흠은 형벌을 신중히 하라는 뜻이다. 처음 이름은 명청록
경세유표 -1817년. 49권. 중국의 주례를 바탕으로 우리 나라 국가 체제를 전면 적으로 개혁하기 위해 쓴 다산의 국가개혁론. 처음 이름은 방례초본
아언각비 -1819년.3권, 우리 나라의 민간에서 흔히 쓰이는 한자말의 어원을 추 적하여 풀이한 책
마과회통 -1797년. 12권. 홍역을 치료하는 여러 가지 처방을 기록한 책, 당시 다산의 여 러 아들들이 연이어 홍역 으로 일찍 죽었기 때문에 자료를 수집하여 이 책을 썼던 것이다. 부록으로 제너의 우두법을 소개하고 있다.
이담속찬 - 1820년. 1권. 민간에서 널리 쓰이는 속담을 모은 속담집. 중국 속담 170여개 조와 우리 나라 속담 241조를 소개하고 출전을 밝혔다. 1801년에 쓴 백언시 를 수정, 보완한 것이다.
아방강역고 -1811년. 10권. 우리나라의 지리를 여러 지역별로 해설하고 그 육관을 그린 책. 줄여서 강역고라고도 한다.
<맺음말>
다산의 생애는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여느 인물처럼 그리 평범하거나 순탄하지는 않았다. 다산은 일찍이 정조와의 만남으로 그의 학문과 재능을 인정받기도 하지만 정조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기에 어쩌면 더욱더 불우한 삶을 살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소설 목민심서라는 책에서는 정조가 친히 정약용을 불러 술을 마시기를 좋고 그것을 본 많은 신하들이 그를 질투했다는 구절을 읽은 기억이 난다. 이벽과의 만남 또한 그에게는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천주학쟁이라는 별명을 가져다 준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를 만난 계기로 유배 생활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서용보 와의 만남 또한 악연이다. 아니 정약용이 너무 청렴결백한 탓이라면 그것이 문제이기도 하겠다. 어쨌든 그는 시대를 잘못만난 천재이자, 또한 그런 불우한 생활에도 굴하지 않고 508권의 저서와 2468편의 시를 남긴 불세출의 학자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다산은 뚜렷한 현실감과 새로운 것에 대한 개방성을 가지고 당시 온갖 폐습이 만연되어 국가 기강이 몹시 흔들리던 조선 사회를 새롭게 개혁시키기 위해 많은 개혁방안과 사상을 내어놓았다. 그를 통해 볼때, 정치사상면에 있어서 다산은 당시의 국가체제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민을 주체로 하는 정치사상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이의 구체적 내용으로서 민권의식의 형성, 국민 참정권과 민중저항권을 제시하였다. 경제사상면에서는 신분적 차별과 경제적 차별이 이루어지는 사회에서 재화의 공평한 분배와 민중의 생존권을 위해 여전제와 정전제를 그 내용으로 하는 토지소유제도와 농업 및 산업의 개혁과 생산력 증대를 위해서 각각의 여러 해결방안을 제시하였다. 또한 사회사상면에서 다산은 본래는 민을 위해 마련된 제도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민을 괴롭히는 주범이 된 환자제도를 그것의 본래 목적에 맞게 그리고 새로운 이상에 의한 새로운 사회의 올바른 제도로 구실하게끔 개혁방안을 제시하였다.
다산의 이러한 다방면의 여러 개혁방안은 당시의 여러 실학자들이 내놓은 사회개혁방안이 그랬던 것처럼 실제로 국가행정에 채택되어 시행되지는 못하였다는 단점이 있다. 또한 사회 발전을 선두에서서 추진해갈 개혁의 주체가 잘못 선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래로부터가 아닌 위로부터의 개혁을 주장한 것을 보면 그도 어쩔 수 없는 유교적 사고에 입각한 왕조시대의 인물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저술을 통해서 왜곡되고 모순된 현실사회를 실제적으로 분석하고 이에 가차없이 공격했다. 또한 유배지에서도 자신의 나아갈 방향을 잃지 않은 조선시대의 보기 드문 지식인이자 민중 철학의 선구자임에 틀림없다.
주역잉언 - 주자의 주역 해석을 일일이 소개하면서 자신의 주역 해석을 덧붙인 글.
시경강의속집 - 1859년, 11권. 다산의 시경 강의를 다산의 외손자이자 제자 인 윤정기가 정리한 시경해석서
⑶ 경세학(정법, 국방)
산재냉화 - 수령과 백성 사이에 갖추어야 할 사항을 기술한 교훈집, 목민심서의 윤리적 측면을 강조한 것이라 할수 있다.
아방비어고 - 우리 나라의 국방 문제를 집대성한 책. 모두 30권으로 이 가운 데 민보의, 상토지 2권, 행군촬요, 일본고 등이 여유 당전서 보유에 실려있다.
⑷ 실용서
구고원류 - 동양의 구고수학의 기반 위에서 서양의 삼각기하학을 수용하여 직 각삼각법, 평면삼각법, 구면삼각법 등을 체계화한 수학 이론서. 서학에 관심이 많던 30 대 무렵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여범지남 - 사륙변려문을 짓는 방법을 기술한 일종의 작문지침서.
서의-서경에 나오는 구절을 다산 자신이 주석을 가한 책.
역의-주역에 나오는 구절을 주석한 책.
임자세제도태양출입주야시각 - 1792년. 전국의 일출, 일몰 시각을 비교 조사한 천운기상 관련서. 다산의 과학기술 사상을 잘 보여준다.
② 기록으로만 전하는 책
논어수차 - 규장각 필사본으로 현재 3권만 전한다. 논어고금주의 저본인 듯 하다.
소학보전 - 1801년, 1권. 아이들에게 소학을 강의할 때 사용하기 위해 집필한 것으로 선 인들의 주석 가운데 미비한 것을 보충함. 소학지언의 저본인 듯하다.
독상서보전 - 1827년 1권. 당대의 경학자인 홍석주가 쓴 상서보전을 읽고 저술한 책.
염씨고문소증초 - 1827년. 4권. 청나라 학자 염약거가 쓴 상서고문소증에 대한 견해를 담은 상서 주석서.
국조전례고 - 1818년. 2권.
화성정리통고
문헌비고간오 - 1800년, 1권. 문헌비고의 체제와 차례를 새로 다듬은 책.
사기찬주 - 사기영선에 대한 간략한 주해서.
이아술 - 1801년. 6권. 중국 고대의 사전인 이아를 주석한 책,
사대고례산보 - 1821년. 동문휘고, 통문관지 등 중국 서적을 널리 찾아서 사 대에 관련 된는 것을 모으고 분류한 책.
③ 여유당전서 간행 이전에 단행본으로 출간된 책
목민심서 - 1818년. 48권. 지방관들의 치적과 폐해를 고금의 사례를 통해 보여 주며 수 령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과 자세를 열거.
흠흠심서 -1819년. 30권 형벌과 재판에 관한 사항을 144개 조항의 사례를 들 어 상세히 설명한 책. 흠흠은 형벌을 신중히 하라는 뜻이다. 처음 이름은 명청록
경세유표 -1817년. 49권. 중국의 주례를 바탕으로 우리 나라 국가 체제를 전면 적으로 개혁하기 위해 쓴 다산의 국가개혁론. 처음 이름은 방례초본
아언각비 -1819년.3권, 우리 나라의 민간에서 흔히 쓰이는 한자말의 어원을 추 적하여 풀이한 책
마과회통 -1797년. 12권. 홍역을 치료하는 여러 가지 처방을 기록한 책, 당시 다산의 여 러 아들들이 연이어 홍역 으로 일찍 죽었기 때문에 자료를 수집하여 이 책을 썼던 것이다. 부록으로 제너의 우두법을 소개하고 있다.
이담속찬 - 1820년. 1권. 민간에서 널리 쓰이는 속담을 모은 속담집. 중국 속담 170여개 조와 우리 나라 속담 241조를 소개하고 출전을 밝혔다. 1801년에 쓴 백언시 를 수정, 보완한 것이다.
아방강역고 -1811년. 10권. 우리나라의 지리를 여러 지역별로 해설하고 그 육관을 그린 책. 줄여서 강역고라고도 한다.
<맺음말>
다산의 생애는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여느 인물처럼 그리 평범하거나 순탄하지는 않았다. 다산은 일찍이 정조와의 만남으로 그의 학문과 재능을 인정받기도 하지만 정조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기에 어쩌면 더욱더 불우한 삶을 살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소설 목민심서라는 책에서는 정조가 친히 정약용을 불러 술을 마시기를 좋고 그것을 본 많은 신하들이 그를 질투했다는 구절을 읽은 기억이 난다. 이벽과의 만남 또한 그에게는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천주학쟁이라는 별명을 가져다 준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를 만난 계기로 유배 생활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서용보 와의 만남 또한 악연이다. 아니 정약용이 너무 청렴결백한 탓이라면 그것이 문제이기도 하겠다. 어쨌든 그는 시대를 잘못만난 천재이자, 또한 그런 불우한 생활에도 굴하지 않고 508권의 저서와 2468편의 시를 남긴 불세출의 학자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다산은 뚜렷한 현실감과 새로운 것에 대한 개방성을 가지고 당시 온갖 폐습이 만연되어 국가 기강이 몹시 흔들리던 조선 사회를 새롭게 개혁시키기 위해 많은 개혁방안과 사상을 내어놓았다. 그를 통해 볼때, 정치사상면에 있어서 다산은 당시의 국가체제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민을 주체로 하는 정치사상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이의 구체적 내용으로서 민권의식의 형성, 국민 참정권과 민중저항권을 제시하였다. 경제사상면에서는 신분적 차별과 경제적 차별이 이루어지는 사회에서 재화의 공평한 분배와 민중의 생존권을 위해 여전제와 정전제를 그 내용으로 하는 토지소유제도와 농업 및 산업의 개혁과 생산력 증대를 위해서 각각의 여러 해결방안을 제시하였다. 또한 사회사상면에서 다산은 본래는 민을 위해 마련된 제도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민을 괴롭히는 주범이 된 환자제도를 그것의 본래 목적에 맞게 그리고 새로운 이상에 의한 새로운 사회의 올바른 제도로 구실하게끔 개혁방안을 제시하였다.
다산의 이러한 다방면의 여러 개혁방안은 당시의 여러 실학자들이 내놓은 사회개혁방안이 그랬던 것처럼 실제로 국가행정에 채택되어 시행되지는 못하였다는 단점이 있다. 또한 사회 발전을 선두에서서 추진해갈 개혁의 주체가 잘못 선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래로부터가 아닌 위로부터의 개혁을 주장한 것을 보면 그도 어쩔 수 없는 유교적 사고에 입각한 왕조시대의 인물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저술을 통해서 왜곡되고 모순된 현실사회를 실제적으로 분석하고 이에 가차없이 공격했다. 또한 유배지에서도 자신의 나아갈 방향을 잃지 않은 조선시대의 보기 드문 지식인이자 민중 철학의 선구자임에 틀림없다.